[10월 90호] 대전·충남문인탐방 10

시 「머들령」, 「밀고 끌고」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정훈 시인을 찾아 떠난다. 해방 이후 그는 박용래, 박희선 시인 등과 함께 『향토』와 『동백』을 창간하는 등 척박한 대전의 시밭을 일군 시인이다. 휘문고보 시절 정지용, 이병기 시인에게 문학적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1937년 『자오선』에 「유월공」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후 작고할 때까지 그는 대전의 시문학 발전에 커다란 공을 세운다. 그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혜화당한약방’이 대흥동에 그대로 남아있으며, 그의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시비는 만인산 휴양림 입구에 위치해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인 「머들령」이 새겨져 있다. 도회지로 가기 위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머들령 고개를 넘던 유년시절 시인의 슬픈 모습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정훈 시인은 1911년 3월 16일에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내리에서 부친 정영창과 모친 송정회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7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정갑수(丁甲秀)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오른다.(이 이름은 1952년에 ‘정훈’으로 개명되기 전까지 사용하였다.) 그의 또 하나의 이름은 ‘소정(素汀)’인데, 이 호(號)로 그는 잡지에 자주 발표하곤 했다. 짧은 생으로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자 시인이자 한학자인 조부(정대현)와 자모(慈母) 밑에서 자라게 된다. 조부가 잠시 거주하던 전북 무주군 안성면 금평리에서 안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 때까지 다닌다. 이후 그는 대전삼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7년 2월 졸업하게 된다. 한학과 한시 등을 접한 정훈은 이 시기 문학에 빠져든다. 이러한 문학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문인들의 산실인 휘문고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당시 문단에서 주목받던 김영랑, 박종화, 정지용 등이 이 학교 출신으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었다.

정훈은 1928년 4월 4일 문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휘문고보(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이 학교에는 265명 모집에 1,250명이나 모일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다. 시인은 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것이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본격적으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시 이 학교에는 한글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과 3학년 때 부임한 정지용 시인이 있었다. 이 시기 정지용 시인은 「향수」 등을 발표하여 한국시단에 별처럼 빛나는 존재였다. 이 두 분의 영향으로 시나 시조를 쓰려는 지망생이 많았고 훗날 적잖은 시인을 배출하게 된다. 정훈 시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 그는 성신순 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1937년 6월 『자오선』에 「유월공(六月空)」을 싣게 된다. 휘문고보 후배인 오장환 시인이 부탁해서 실은 것이라고 시인은 밝히고 있다. 

  

  

때는 오전 열한시

창공에는 흰 구름이

해오리처럼 떠다니오

  

배짱이 찔 찌르르-

소리를 찧소

그 음향 따끈따끈 해라

  

청제비가 더운 가슴을

쏘고 간 다음

푸른 화폭에 꽃자마리 한쌍 

- 「유월공」 전문

  

  

시인은 단순히 배짱이 울고 구름이 떠다니고, 청제비나 잠자리가 나는 유월 풍경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예년과 똑같은 유월 풍경이지만 식민지현실이기 때문에 텅비어있는 것처럼 느끼는 ‘공’의 개념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유월 하늘을 통해 식민지현실의 슬픔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 「머들령」에서도 “유월 하늘에는 슬픔 상기 어린다”라고 하여 유월 하늘에 담긴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정훈 시인은 꿈에 그리던 시인이 된 것이다. 일제 치하에 발표된 시 「아리랑民」에서는 나라 잃은 민족의 애환과 고향(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잘 담겨져 있다.

해방 이후 서울에 올라간 정훈은 정치, 문화(문학, 예술) 등의 방면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대전으로 내려와 보람있는 일을 찾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육사업을 벌이게 된다. 성인들의 재교육과 청소년들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교육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몇몇 뜻있는 동지들의 힘을 얻어 대전의 중교 다리 옆에 있던 커다란 사찰을 개조하여 ‘계룡의숙(鷄龍義塾)’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불과 몇 주 만에 수백 명의 청소년이 모여 들어 성황을 이루게 된다. 대학설립재단으로 인가를 받은 계룡의숙은 ‘대전학원’, ‘대전계룡공민학교’, ‘계룡학관’을 거쳐 ‘호서민중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호서민중대학은 대전지역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세워졌으나 한국전쟁으로 교사가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대전·충남 문학 단초의 계기를 마련한다. 해방 이후 그는 “민족정서를 계발하고 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취지 아래 임영선, 송석홍, 원영한 등과 함께 종합지 형태의 『향토』를 창간한다. “내 조국 내 민족의 정서를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하여 제호를 ‘향토’로 정했다는 이 잡지는 정해붕이 편집 겸 발행을 맡아 국판 30쪽 분량으로 1945년 10월 초에 창간되었는데, 이는 대전은 물론 충청지역 최초의 잡지이다. 불행하게도 이 잡지는 단명하고 만다. 그리하여 정훈, 박희선, 박용래 등은 1946년 2월 “본격적인 문학의 장”을 만들자고 ‘동백시회’를 창립한 뒤 『동백』을 창간하게 되는데, 이 또한 대전  최초의 문학지이면서 순수 시지(詩誌)이다. 『향토』, 『동백』 등을 통해 지역 문학 발전을 도모해 온 시인은 1949년에 첫시집 『머들령』(계림사)을 펴낸다. 그가 “슬픈 족속(族屬)이면 슬픈 노래를 지녔다. 슬픈 노래만이 오히려 진실한 벗이었기 때문에….”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시집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슬픔’이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슬픔과 민족의 고뇌를 잘 담아내고 있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나라 잃은 서러움을 잘 반영한, 제목과도 같은 그의 대표시 「머들령」을 보기로 한다.

  

  

첫 시집 머들령 표지

  

  

요강원을 지나

머들령

  

옛날 이 길로 원님이 내리고

등짐장사 쉬어넘고

도적이 목 지키던 곳

  

분홍 두루막에 남빛 돌띠 두르고

할아버지와 이 재를 넘었다

뻐꾸기 자꾸 울던 날

  

감장 개명화에

발이 부르트고

  

파랑 갑사 댕기

손에 감고 울었더니

  

흘러간 서른 해

유월 하늘에 슬픔이 어린다

- 「머들령」 전문

  

  

‘마달령(馬達嶺)’으로도 불리는 ‘머들령’은 금산에서 대전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말한다. 즉, 금산군 추부면의 삽티고개와 동면 장터를 지나면 나오는 요광리에서 대전시 동구 상소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일컫는다. 시인은 이 시의 창작배경을 “20세가 넘어서 두 번째 머들령을 넘으며 7,8세 때에 할아버지와 넘을 적에 그 추억을 되새겨본 시다. 어릴 때는 개명화에 발이 부르터 울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긴 세월이 흘러도 조국 하늘에는 아직 슬픔이 어리어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랄까?”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는 지역적 소재인 ‘머들령’에 얽힌 유년시절에 대한 추억을 그리는 것을 뛰어넘어 식민지현실의 슬픔까지 형상화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황폐해진 한밭에 시인은 문학의 싹을 틔운다.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충남지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1951년 11월에 홍성규, 한성기, 박용래, 권선근 등과 함께 ‘호서문학회’를 창립한다. 회장에 정훈, 부회장에 임지호, 송영헌을 선출하고 한성기, 임강빈, 강소천, 권선근, 임희재, 원영한 등 50여 명은 창립 이듬 해인 1952년 9월 1일에 『호서문학』을 창간하게 된다. 4·6배판 30쪽 분량으로 만들어진 이 잡지에는 시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잡지에 정훈은 ‘창간사’를 쓰고, 시 「비절(悲絶)」 등을 발표한다. 이후 2집(1954. 2)과 3집에도 권두언과 시 등을 발표하여 왕성하게 활동한다. 정훈을 중심으로 한 『호서문학』은 대전지역 문학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한다. 또한 이 잡지는 동시대에 나온 전주의 ‘가람동인회’, 서울의 ‘시작(詩作)’, 강릉의 ‘청포도동인’, 경남의 ‘청맥’, 조치원의 ‘백수문학’, 목포의 ‘시정신’ 등과 함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정훈 시인은 전쟁으로 인한 상흔을 더불어 함께 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밀고 끌고」에서 엿볼 수 있다.

  

  

나랑 앞에서 끌게

엄니랑 뒤에서 미세요

  

한밭 사십리길

쉬엄쉬엄 가세요

  

가다가 지치시면

손은 얹고 오세요

  

걱정말고 오세요

발소리만 내세요

  

엄니만 따라 오면

힘이 절로 난대요

  

나무 팔고 갈제면

콧노래도 부를께요

  

형은 총을 들고

저는 구루마 책장을 들고

  

형이 올 때까지

구김 없이 사라요

  

엄닐랑 뒤에서 게세요

절랑 앞에서 끌게요

  

우리의 거센 길을

밀고 끌고 가세요

- 「밀고 끌고」 전문

  

  

전후 시기에 쓰여진 이 작품에서는 식민지시대의 우울한 고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끈끈한 모자(母子)의 정 내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식을 엿볼 수 있다. “대전과 금산 사이의 고개에서 40대 어머니와 아들이 손수레에 마을과 나무를 싣고 ‘밀고 끌고’ 넘는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썼다.”라고 밝힌 시를 쓰게 된 동기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데, 이 시에서는 현실 속에 자신이 체험한 유년시절의 고향을 겹쳐놓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년시절의 풋풋한 고향의 모습과 현실의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이 중층묘사되어 나타난 미적 고향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거센 길을 / 밀고 끌고 가세요”라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당시 현실 속에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이 시에서 “밀고 끌고”라는 시구의 어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도 흥미있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수레를 끄는 모습을 연상해보면, “끌고”라는 행위가 “밀고”라는 행위보다 앞서 나타나거나 동시에 나타난다. 그런데 왜 시인은 “끌고 밀고”라고 하지 않고 “밀고 끌고”라고 했을까? 아마도 시인이 수레를 끄는 시적 화자보다는 미는 어머니를 더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끄는’ 주체뿐만 아니라 ‘미는’ 주체도 중요시함으로써 공동체의식을 드러내려 한 듯하다.

시인은 첫 시집 『머들령』을 낸 지 5년 만에 『파적』(1954)을 출간한다. 이어 『피맺힌 연륜』(1958), 『산조』(1966), 『거목』(1979) 등 다섯 권의 시집과 시조집 『벽오동』(1956)과 『꽃시첩』(1960)을 발간한다. 이후 유고시집 『회상』(2002)과 유고시조집 『밀고 끌고』 등이 출간되기도 한다. 시적 연륜에 비해 과작이라 할 수 있다.

  

  

정훈 시인이 머무른 혜남한약방

  

  

그의 시에는 ‘머들령’, ‘한밭’, ‘황토재’, ‘요강원’, ‘목척다리’, ‘탄지봉’, ‘오적봉’, ‘여숫골’ 등 지역 정서가 담긴 지명이 자주 등장하고, 그 지명에 연관된 내용도 자주 보인다. 점점 물질문명화 되어가는 현실을, 자본화 되어가는 현실의 부정성을 목도한 시인은 ‘자연’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한다. 어느 시인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일종의 ‘자연주의’라고 언급한 것도 결국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자연에게서 해답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유년시절에 경험했던 공간으로 회귀하기도 하고, 그곳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자연을 통해 ‘지금-이곳’의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했던 것이다.

평생을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대전·충남지역 근대문학의 초석을 다졌고, 지역문학의 활성화를 꾀한 그는 1992년 8월 2일 82세의 일기로 대전시 중구 대흥동 50번지에서 영면하게 된다. 그의 유해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 신대리 평화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대전·충남문학사에서 그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남긴 흔적은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했다. “자랑하고 싶은 게 없다.” “시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중등교과서에 무슨 시가 수록되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자신을 낮추었다. “너를 너무 말하지 말라. 잘 나고 못난 것은 주위에서 판단하는 법이다.”라고 일러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아주 충실히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여 만인산에 들러 대전 근대문학의 장을 열고 지역문학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도모한 정훈 시인의 시비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 사진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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