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0호] 대전여지도 90

1.

10여 년 전에 마을 남쪽에서 깊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하천에 커다란 돌 하나가 떠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커다란 돌을 건져내 마을 이름을 새긴 후 옛 1호 국도 어귀, 마을 초입에 세웠다. 그 돌에는 이렇게 새겼다. 어득운이(魚得雲里).
이 조그만 마을을 부르는 비슷한 이름이 더 있다. 어두니와 어두근이(그니)다. 그렇지만 마을에서 주민이 새겨 세워둔 마을 이름비에 어득운이라 썼으니 이것을 공식 명칭으로 삼는 것이 옳겠다.

어두니라 부르는 세력은 이 마을이 워낙 깊은 골에 있어 해가 드는 시간이 짧고 어두컴컴해 그렇게 부른다고 설명한다. 마을에서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모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찾아간 때가 한낮이긴 했지만 주변을 둘러싼 산이 그리 높지 않아 해가 잘 든다. 해가 지는 마을 서쪽으로 낮지 않은 우산봉이 우뚝 솟았지만, 마을 이름으로 삼을 정도로 그리 어두컴컴한 동네는 아니다. 오히려 마을을 둘러싼 산이 햇살을 그러모아 마을에 담아주는 듯하다. 양짓골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마을에 햇살이 가득하다. 그 햇살을 한껏 받으며 감이 붉게 익어간다.

  

  

2.

마을에 관해 속속들이 모두 잘 알았다는 할머니는 작고한 뒤였다. 그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또다른 할머니는,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잘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고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마을 이름 유래에 관해 유일하게 증언해 준 주민은 최병수(72) 씨다. 지난 번에 소개한 어두근이와 이웃한 진정이 마을에서 들었던 서당 고 최범석 훈장의 손자다. 지금 최병수 씨가 사는 집이 바로 그 어두근이 서당터다. 집을 허물고 새로지어 옛 서당 흔적은 전혀 없다.

“열두 세미래라고 있어요. 옛날에는 그곳에 모두 물이 차 있었대요. 그중에 이 동네 부근에서 물고기가 가장 많이 잡혔다지요. 그래서 물고기 어(魚)자와 얻을 득(得)자를 써서 마을이름을 삼았대요. 실제로 옛날에 내가 도룡동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거기 논은 물툼뱅이였다니까요. 물이 참 많이 났어요.”

열두 세미래 지역이 과거에 모두 물이 채여 있었던 곳이라는 이야기는 처음이다. 농경지로 변한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때 물이 무척 많이 났다는 것을, 이 일대가 옛날 물이 가득했던 곳이었다는 믿음에 관한 증거로 제시했다. 여하튼 몇 년 전에 어두근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삼동을 취재하며 그곳이 바깥 세미래 지역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세미래는 한자로 삼미천(三美川)이다. 삼미는 좋은 물, 좋은 쌀, 좋은 인심을 뜻한다. 산 좋고 물 좋고 사람 좋은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떻게 보든, 그만큼 살기 좋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어득운이 마을을 포함한 안산동도 바로 이 열두 세미래 지역이다. 조금 거리가 먼 도룡동도 열두 세미래에 포함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두 세미래처럼 살기 좋은 명당을 칭하는 말로 공주 갑사 근처에 열두 대장골이 있단다. 아홉도 아니고 열도 아니고 열둘이 지닌 민속적 의미가 분명 있는 모양이다. 완전수라는 주장도 있다. 일 년은 열두 달, 하루는 오전과 오후 각 열두 시간, 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 예수의 열두 제자 등등.

  

  

최병팔 홍영자

  

  

3.

마을 지명비가 선 길은 옛 국도 1호선으로 주요도로였다. 지금은 안금로라 칭하는 조그만 소로에 불과하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고 마을을 잇는 시내버스가 간혹 지난다. 그 길에서 마을까지는 대략 1km 남짓이다. 걸어서 10여 분이 걸린다.

우산봉 아래 성재골과 상대방골에서 부채처럼 넓게 퍼진 농토는 좁아져 길게 이어지다가 안금로를 지나 작골에 다다라 다시 넓은 농토를 형성한다. 깊은 골짜기지만 제법 넓은 농토를 마을에 선사한다.

어득운이는 넓게 퍼진 농토가 좁아지는 그 즈음에 마을을 형성했다. 산자락에 기대어 형성한 마을 터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마을 아래 개울쪽으로 붙어 있는 논자락 위에 최근 재실을 새롭게 지었다. 경주 최씨 재실이다.

그곳에서 산자락을 따라 북쪽을 향해 집이 앉았다. 소담하고 정갈한 집이다. 찾아간 날이 유성장날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작은 마을은 더 고즈넉하다. 안길을 따라 위로 올라서니 노부부가 앞마당 감나무에서 감을 딴다. 아직 덜 익었지만 우려 먹을 생각이다.

무뚝뚝해보이던 할아버지가 다 익은 감을 가려 따서 건넨다. “요즘에 어디 월하를 쉽게 먹을 수 있는지 알어?”

말하는 데 자부심 비슷한 것이 묻어난다. 그럴만하다. 달콤함이 거부감 없이 입에 착 녹아든다. 설탕맛과는 비교불가다.

감을 건넨 최병팔(83) 씨는 열여덟 살에 한국전쟁이 터져 군에 입대한 후 10년간 군생활을 하다가 제대했다. 한국전쟁 때는 백마산, 오성산, 92고지 등 숱한 전투에 참여했다. 제대 후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경기도 양평에서 살다가 45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할아버지가 태어난 바로 그 집이다. 이 집터에서 박사가 둘이나 나온 것이 할아버지는 자랑스럽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고향에 돌아와 산지는 이제 17년 째다. 돌아올 때 아내 홍영자(77) 씨와 함께 들어왔다. 홍영자 씨는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따라온 것이라며 웃는다. 할머니 고향은 경기도 수원이다.

최병팔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시간이 결코 짧지 않지만 어린시절 추억은 고스란이 남아 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안 가지만 어릴 때는 우산봉에 많이 갔지. 왜 가긴 땔감하러 간 거지. 지금은 묵었지만 옛날에는 저 골짜기 위에까지 농토였어. 우산봉 아래 물방골이라는 곳에는 개울이 있어 여름에 놀면 아주 시원하지. 우리 동네 들이 좁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뭐해. 일본놈들이 들어와서 식량을 다 뺏어가고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도토리 주워먹고 아카시나무 꽃 따서 먹고 그랬는데. 아예 이 동네에 막사를 지어 놓고 주둔하면서 전쟁 준비를 했다니까. 지금도 그때 일본놈들이 파던 굴이 남아 있어. 두 개를 파고 있었지. 그 일본놈 막사에 몰래 가서 구멍을 내 쌀을 훔쳐먹곤 했는데.”

전쟁이 나도 그 사실을 몰랐을 것 같은 깊은 골짜기에 일본군이 막사까지 설치해 두고 수탈과 전쟁 준비를 하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군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 일대가 전략적 요충지였긴 했나보다. 마을 뒷산에 삼국시대 백제군이 사용한 안산산성이 있었다는 사실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할아버지 집 바로 위에는 샘이 있다. 물이 부족하지 않아 온 동네 사람이 모두 그 샘에서 물을 길어 먹고 채소도 씻고 빨래도 했다. 지금도 메우지 않아 남았다. 샘 주변에 콘크리트를 치고 길을 만드느라 지붕 비슷한 것이 생겼지만 여전이 물은 잘 고인다.

“여름에는 무척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뜻했던 샘이여. 지금은 물이 나오는 곳에 문을 만들어 닫아 놓았지만 엄청 컸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김치도 담가 놓았다가 시원하게 먹고 그랬지.”

지금도 누군가 검은 비닐봉지에 막걸리 서너 병을 담아 우물에 담갔다. 한낮 가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지만 그 막걸리 만큼은 시원하게 타는 목을 적셔줄 것이다.

모두 장을 보러 갔는지 조용한 집안에서는 개만 시끄럽게 짖으며 낯선 이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계 신호를 분명하게 보낸다.

  

  

4.

어득운이 마을에 안산동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고 마을 안길에 들어섰을 때 세월이 한껏 묻어나는 돌담을 본 기억도 났다. 그 돌담은 작은 건축물의 벽이었다. 놀랍게도 요즘 정말 보기 힘든 ‘잿간’이다. 구조로 보았을 때 부춛돌 잿간이라 부르는 형식이었다. 재를 쌓아두는 곳과 볼일을 보는 곳, 재와 섞인 똥을 모아두는, 세 칸 구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았다. 잿간 앞에 장작을 잔뜩 쌓아 두었다. 재는 불을 때는 아궁이에서 나오고 똥과 섞여 농토에 뿌리는 거름으로 썼다. 아주 어릴 적 기억도 가물가물하던 시절에 시골 외가에서 사용했던 기억이 머릿꼭지를 간지럽힌다. 회색빛 재가 주는 당돌한 차가움 때문에 지금도 잿빛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허구영 작가 작품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오는가?>라는 작품이 비로소 가슴에 들어온다.

이 잿간은 최병근(85), 김순임(82)씨 부부 집 바깥마당 한쪽에 있다. 마을 위쪽으로 올라서는 길에 경계를 만든다. 잿간 맞은편에는 경운기를 보관하는 임시 창고가 있고 그곳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ㄱ자 집과 마주한다. 바깥마당과 경계를 짓는 건물이 한쪽에 놓여 있는데 옛날에 일소가 먹고 자던 외양간이다. 일소가 필요없어지면서 창고로 개조했다. 그 ㄱ자 집 아래로 一자 형태 집을 새로 지어 최 씨 부부가 기거한다. 결국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태 집이 되었다. ㄱ자 형태 집이 一자 형태 집보다 조금 높다. 아들부부가 부모가 기거하는 집을 마당 건너 올려다보는 형국이다. 유교적 사상을 반영했다면 좀 과잉이겠지. 땅이 그렇게 생겨 그랬을 것을.

집 안마당에는 고추를 말리는 등 농사일에 쓸 하우스를 설치했다. 하우스를 피해 집을 살펴본다.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고 여전히 짱짱해 보인다. ㄱ자 집 끝 모서리는 부엌이다. 개량하지 않은 옛 부엌 모습 그대로다. 불 떼는 아궁이 위에는 검은 무쇠솥 하나와 양은솥 하나가 걸려 있고 벽에는 온통 그을음이다. 새까맣다. 부엌 안으로 들어서자 어떤 ‘냄새’가 확 풍겨온다. 그 냄새는 아주 깊은 곳에 침잠해 있던 과거 한 대목을 쑥 끄집어낸다. 강한 힘이다. 눈물나게 정겹다.

“계속 쓰는 부엌이면 벽에 황토를 발라 깨끗하게 만들어 쓰지. 뽀얗고 참 이뻤는데. 지금은 새까맣지? 가끔 시래기 삶을 때나 쓰니까. 그냥 두는 거여. 그래도 그 아궁이에 불 뗄때 방에 들어가면 얼마나 뜨듯하고 좋은지 몰라.”

이웃한 대평리에서 시집을 왔다는 김순임 씨는 현재 생활하는 공간 안에서 고개만 마당쪽으로 내민 채, 이리저리 집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니는 낯선 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툭툭 던진다. 정말 외가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 이 집을 알려주며 최병수 씨는 ‘종갓집’으로 불렀다.

“진정이도 그렇고 이 동네도 그렇고 경주 최씨는 다 이 집에서 퍼져 나간 거랴. 우리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100세인데 그 웃대 어른들부터 살았다니께 무지하게 오래된 집이지. 나도 물러 정확하게는, 그냥 무지하게 오래되었어. 옛날에 이 집에 중이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고. 잿간도 돌막으로 쌓아서 많이 허물어졌어도 저렇게 남아 있는 거지.”

  

  

5.

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은 엄마 품을 파고들어간 어린 아이처럼 편안해 보인다. 마을이 기댄 산 비탈은 불편함이 아닌 든든함이 전해지고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을 준다.

지금은 어린 아이 울음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마을은 주민과 함께 나이들어감이 보이지만 그조차도 섧지 않다. 마을도 생태 순환에 편입해 자연스럽게 스며든 느낌이다.

어득운이는 그렇게 조용히 품격있게 나이들어가며 따뜻한 햇살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잿간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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