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09호] 천천히 무르익는 도시
1년 만에 다시 찾은 옛 연초제조창은 뜨거운 햇볕 아래에 서서 선크림을 바르고 BB크림을 발랐다. 퍼프에 파우더를 묻혀서 툭툭 칠하기도 했다. 이제 피부 화장은 대충 마친 것 같았다. 앞으로는 색조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화장대 앞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어떤 색 립스틱을 칠할지, 아이라인은 얇게 그려야 할지 두껍게 그려야 할지, 볼 터치는 무슨 색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2014년부터 봄이면 매년 청주시에 방문했다. 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이슈가 있었다. 2014년에는 중앙동 차 없는 거리에서 주민자치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도시대학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주민이 도시재생의 필요성을 깨닫고 실천할 때 생기는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또 사직2동의 한 폐교에 들어간 예술가가 단절되었던 공간과 마을을 어떻게 융화시키는지 보았다.
오랫동안 청주시에서 지역 경제를 이끌었던 옛 연초제조창은 1999년 담배원료공장을 폐쇄하고 2004년 완전히 문을 닫으면서 빈 곳으로 남았다. 건물만 24개 동에 면적은 12만 2181㎡에 이른다. 한때의 명성은 이 공간이 텅 비어있는 것을 더 못 견디게 했다. 청주시는 이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했다. 한때 수많은 이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비어있을수록 마음 아픈 흔적이었다.
빨리 옛 흔적은 치우고 새로운 것을 집어넣자는 의견과 그대로 두면서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설왕설래했다. 결국, 청주시는 이곳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청주시는 옛 연초제조창 터를 2011년부터 단계적으로 매입했다. 그 과정에서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등 문화예술로 공간을 활용하며, 공간의 가능성을 봤다. 동부창고는 옛 연초제조창 터에 있는 담배 창고였다. 2015년 3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문화재생서식처 동부창고34》 전을 열었다. 동부창고가 문화예술플랫폼으로 변화하기 전 동부창고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전시였다. 동부창고와 옛 연초제조창을 둘러본 지 약 1년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동부창고는 총 일곱 동이다. 동부창고 일곱 동은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에서 운영한다. 비둘기 깃털과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비둘기의 사체, 누군가 오래전에 버리고 간 물건 등이 전시되었던 공간인 동부창고34동은 커뮤니티아트플랫폼으로 변했다. 커뮤니티아트플랫폼에는 말 그대로 시민이 예술로 교류하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회의실, 영화관, 동아리 모임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 소규모 키친, 목공 공방, 갤러리가 동부창고34동에 있었다. 2015년 당시 금강송을 이용한 목조 트러스가 동부창고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는데 에어컨, 전기 등을 공사하면서 덧댄 쇠 구조물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건축물 부분은 참 아쉬워요. 건축은 실패 사례로 꼽히는데 공간을 활용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건축 자문하셨던 교수님께서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죠. 그래도 좋은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시민과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의 김아미 연구원의 안내로 동부창고를 둘러볼 수 있었다. 동부창고34동은 공방, 키친 등에 들어가는 여러 집기를 들여놓고 지난 4월, 문을 연 지 한 달쯤 되었다. 동부창고35동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조성 및 지원하는 청주공연예술종합연습장으로 개장했다.
“시민이 리허설까지 할 수 있는 공간은 별로 없어요.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최종 리허설 연습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음향부터 조명까지 일반 공연장과 같은 구조로 만들었어요. 시민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여료는 종일 사용하는 데 2만 원, 네 시간 사용에 5천 원이다. 1년에 한 번씩은 연습실을 사용한 단체들의 기획공연을 마련할 예정이다. 일곱 동 중 두 동은 이미 쓰임이 정해졌다. 나머지 네 동 중 두 동 역시 옛 모습 그대로 두기로 했다. 공간 자체를 아카이빙한 것이다. 두 동 중 한 동은 그곳의 주인이었던 비둘기들이 계속 있을 수 있도록 했다. 다른 한 동은 공간에 남아 있던 물건을 전시했다. 두 개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유리로 칸막이했다. 유리 칸막이 너머에서 아직 푸드덕거리며 살아 있는 비둘기들이 제집에 드나든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 옷도 입지 않은 세 개 동 중 한 동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생활문화센터조성사업에 선정되어 동아리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동은 공방형 상점으로 꾸미려고 한다. 일곱 개 동 모두가 제 옷을 갖춰 입으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동부창고 일곱 개 동의 ‘보호자’ 같은 옛 연초제조창 본 건물들은 현재 첨단문화산업단지가 들어와 있다. 2011년 국제공예비엔날레가 열리면서 옛 연초제조창은 문화로 재생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청주 시민이 매일 보고, 지나치던 낡은 건물은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찬사를 이끌었다. 현재 청주시의 계획대로라면, 옛 연초제조창 일대에는 새롭게 조성할 동부창고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비즈니스센터와 호텔, 복합문화레저시설, 공예클러스터 및 창작촌 등이 들어올 예정이다.
청주시는 2015년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제법 가까운 거리인 연초제초창, 청주산업단지, 원도심을 묶어 제조, 문화, 업무, 레저, 행정, 상업까지 가능한 하나의 도시로 계획하고 있다. 청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 홍병곤 사업지원팀장은 이를 “도시경제기반 트라이앵글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청주시는 도시재생이라는 이슈를 한결같이 끌고 갔다. 지속해서 크고 작은 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그로 인해 조금씩 변화를 보았다. 이 과정이 최근 몇 년간 끊기지 않도록 했다는 게 청주시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꾸준함은 주민참여형 지역 재생사업에 선정되어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생기기 전부터 도시대학을 운영하며 도시재생 ‘교육’에 힘쓰고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생긴 후에도 도시대학은 이어진다. 새로 생기는 기관이라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아니다. 이전부터 이어온 잘 된 사례는 그대로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청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는 2015년 1월 개관했지만, 지금껏 청주시에서 꾸준히 했던 도시재생 업무를 잇고 있습니다. 유사기관이나 사업 등에 관한 주도성도 도시재생지원센터에 있죠. 이는 도시재생 업무가 산발적으로 일어나더라도 센터가 거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선도지역 중 하나인 옛 연초제조창 터는 총 3,114억 원의 사업비가 책정되었다. 국비 896억 원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과 국제공예비엔날레, 시민예술촌(동부창고) 조성 등 여섯 개 사업을 진행한다. 공공사업(마중물 사업) 500억 원으로는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문화업무시설과 중앙광장, 공연소극장 등을 조성하는 사업비로 집행되었다. 민간참여사업비로 책정된 1,718억 원은 비즈니스센터 및 호텔, 복합문화레저시설 등 세 개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에 청주시는 민간 투자를 받기 위해 투자설명회를 진행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같은 경우는 2011년에 논의될 때에는 390억 원을 투입해 수장고로만 만들려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만 두기엔 너무 아까운 공간이었죠. 청주시 전체에서 관련 기관과 협의하고, 사업 타당성 조사에서 경제성을 확보하는 등 노력 끝에 지금은 628억 원 국비를 확보해 전시형수장고로 사업계획을 변경했습니다.”
청주시는 이러한 성과의 가장 첫 번째로 지속성을 꼽는다. 주민이 도시재생에 참여해서 변화를 일으키기까지는 관과 주민의 노력이 있었다. 관도 주민도 함께 공부하고, 도시재생이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이익을 줄지를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줬다. 한 예로 도시대학에서는 이론 교육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구현할 수 있는 도시재생 방안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도록 했다. 주민이 교수와 대학원생 등 전문가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수정하고, 직접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이를 공모사업에 지원해 구현할 수 있도록 하면서 주민이 자신들의 계획이 실행되는 것을 눈으로 보게 했다. 이는 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데 있어서 큰 계기가 되었다.
“사업이 끝날 즈음에 또 다른 사업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이전의 것들을 함께 복기하고, 그런 것들이 쌓여서 지금에 이른 것 같습니다. 많은 분이 청주시 규모 때문에 다양한 사업을 따올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으시더라고요. 그것 역시 맞는 말씀이고요. 청주시 시청사가 중앙동에 있거든요. 워낙 옛날 건물이고 지금은 사람이 많아져서 좁아요. 불편한데 불편한 대로 사용하고 있거든요. 계속 도시재생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시청을 신도시로 옮길 수 없잖아요.”
워낙 넓어서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끊임없는 목소리가 있었던 옛 연초제조창 터는 청주시 전체의 도시재생 구역 중 하나로 자리하면서 거대한 계획으로 채워져 있었다. 낡은 건물 몇 채가 아니라 공간 자체를 도시의 자원으로 보고 매입을 결정한 청주시와 시민이 직접 참여하도록 지속해서 노력한 관련 단체들, 그리고 발 딛고 사는 도시에 관한 고민을 시작한 시민까지 많은 사람의 노력이 청주시의 계획을 완성했다. 이제 막 피부화장을 마친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을 비롯한 도시재생선도구역은 조화로운 색을 신중히 고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