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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0호] 장바구니 프로젝트
대흥동 주민 7개월 차, 생각해보니 대흥동엔 도서관이 없다. 중구 문화동에 있는 한밭도서관이 대흥동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지만 그나마도 버스로 30분은 달려야 갈 수 있다. 오랫동안 대흥동에 터를 잡고 지낸 주변 지인에게 작년까지만 해도 테미공원 옆 테미도서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테미예술창작센터로 모습을 바꿔 몇몇 입주 작가가 예술혼을 불사르며 작품 활동을 한다.
도서관은 참 다양한 기능을 한다. 물론 책을 보고, 빌리는 목적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정말 책만 보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엄마한테 혼나고 쫓기듯 집에서 나와 갈 곳 없는 우리를 받아주는 곳이기도 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데이트하기도 좋은 곳이며, 엄마와 아이가 서로 힘들이지 않고 각자 방식대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기로에 서서 치열하게 에너지를 쏟아내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기사를 쓰는 지금 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목록으로 만들어 직접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흥동에도 하나, 선화동에도 하나…. 크고 좋은 도서관이 아니어도 좋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고 한가로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 생겼으면 하고 바랐다. 바라지만 말고 도서관을 직접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것은 몇 개월 전 오피스 쉐어링 ‘코끼리 공화국’ 취재를 위해 광주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길거리 벤치에 책을 몇 권 놓아둔다. 길을 지나는 사람, 벤치에 앉아 잠시 숨 고르는 사람, 누구든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다. 특별한 규칙은 없다. 책을 읽고 제자리에 두면 되고, 자신의 책을 가져다 놓아도 좋다. 개방형 공공 도서관인 셈이다.
2013년 9월 광주 북구 전남대학교 안 작은 벤치에 처음 책을 놓았다. 책을 가져다 놓은 이는 전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탁아림 씨다. 그녀는 자신을 벤치지기라고 칭하고 틈틈이 벤치에 들러 책을 정리하고, 없어진 책을 다시 채웠다. SNS에 그녀의 이야기가 퍼지면서 광주 곳곳에 책 읽는 벤치와 벤치지기가 늘어났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개인부터 시민 단체까지 100여 명의 벤치지기가 탄생했다.
벤치지기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책 읽는 벤치를 꾸미고 관리한다. 글을 남길 수 있는 메모지를 함께 두기도 하고, 철가방 속에 책을 넣어 둔 재미난 벤치도 있다. 벤치지기는 SNS 페이지를 통해 자신이 관리하는 ‘책 읽는 벤치’ 이야기를 공유한다. 벤치캐스터가 SNS에 올린 날씨 정보를 확인하고 책이 비와 눈에 젖지 않도록 미리미리 책을 수거 하는 일도 그들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책 읽는 벤치’는 네덜란드 Ruilbank Project(루일방크 프로젝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루일방크 프로젝트는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한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함께 만든 프로젝트다. 벤치 한 귀퉁이에 빨간 클립을 설치해 책이 아닌 다 읽은 신문이나 일간지를 꽂아 두고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마치 다 읽은 신문을 지하철에 두고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을 홍보하기 위한 것도, 책 많이 읽기 캠페인도 아니다. 내가 본 것을 너도 읽고 함께 공유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작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 작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루일방크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가치이다.
대전 대흥동 토마토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책을 두기로 했다. 대전평생학습관 벤치 두 곳,대흥동성당 버스정류장 한 곳, 총 세 곳에 월간 토마토 9월호와 함께 소설, 수필, 시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두세 권 놓았다. 북카페 이데에서 책을 고르고 혹여 비에 젖을세라 지퍼백에 1차로 책을 넣은 뒤 예쁜 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 앞에는 ‘책바구니 사용법’이라고 곰살 맞은 멘트도 몇 줄 적었다.
9월 4일 목요일, 드디어 바구니가 세상 밖으로 나갔다. 바구니를 벤치에 가져다 놓으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괜히 설레기도 했다. 사무실과 가까우니 자주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상했던 모습은 이랬다. 볕 좋은 가을 날,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바구니에서 책을 꺼내 읽고, 몇몇 사람은 자기 책을 가져다 놓기도 한다. 바구니엔 책이 넘치고, 책 읽는 사람도 벤치에 가득하다. 토마토 10월호에 책바구니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기사로 실어 더 많은 사람이 관심 갖게 되는 그런 상상.
행복한 상상만 했나보다. 바구니를 내놓은 당일 점심 먹으러 가면서, 졸린 오후 산책 겸, 퇴근길에 또 한 번. 세 번 정도 바구니를 확인했다. 혹시 누군가 책을 읽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바구니와 책은 그날을 끝으로 다시 볼 수 없었다. 하루 밤이 지났을 뿐인데. 바구니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 벤치 두 곳 중 한 곳은 바구니와 책이 통째로 없어졌고, 다른 한 곳은 바구니에 책 대신 쓰레기가 가득했다. 버스정류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연히, 도난을 염려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책을 가져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단 하루 만에 바구니가 통째로 사라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텅 빈 벤치를 확인하고 돌아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그.럴.수.가.있.지.”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실망감이 컸지만 이대로 그만두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두 번째 책바구니를 준비했다. ‘가져가지 말아주세요.’에 빨간 줄을 그었다. 부디, 제발, 단 이틀이라도 좋으니 바구니에 관심 두는 누군가를 만나길 바랐다. 9월 11일 두 번째 책바구니가 거리로 나갔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구니는 또 사라졌다.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치웠을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이 가져갔을 것이다.’와 같은 수많은 추측을 했다. 새벽에 몰래 지켜보자는 둥 블랙박스 설치한 차를 주차해 놓자는 둥 나름의 해결방안을 마련했지만 세 번째 바구니는 거리로 나가지 못했다.
사실 아주 미미한 반응이 있긴 했다. 토마토를 아는 지인으로부터 벤치에 놓인 월간 토마토를 촬영한 사진 한 장을 전송받았다. ‘벤치에 토마토 잡지가 있더라.’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뿐이었다.
광주 ‘책 읽는 벤치’에서도 책을 도난당하는 일은 물론, 누군가 책에 불을 지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우리가 만든 책과 바구니가 불에 타버렸다면 속상함을 넘어 분노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통째로 없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책이 싫어 혹은 바구니가 싫어 불을 지르고, 가져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낯설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누군가에게는 아니꼬워 보였을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다면 자꾸 내보이고, 부딪히게 해 익숙하게 만들면 된다. 대신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적응하는 동안 발생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책바구니 프로젝트가 끝나고 대전평생학습관을 지날 때마다 벤치에 앉아 쉬는 이들을 유심히 보곤 했다. 할아버지, 유모차를 잠시 세워두고 쉬는 엄마, 재잘거리는 여중생들, 사랑스러운 연인 등 많은 이가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득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책바구니를 다시 한 번 거리로 내보낼 계획입니다. 월간 토마토와 함께 책바구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싶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월간 토마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함께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