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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0호] 선생님 숙제했어요
저에게는 두 가지 숙제가 주어졌답니다. 하나는 들꽃과 이야기하기이고요. 또 하나는 해 질 녘 하늘 바라보기예요. 제가 고른 숙제이지만 참 낭만적이고 로맨틱하지 않겠어요? 오랜만에 느낌 충만한 낭만 소녀 흉내 좀 내 보았답니다. 두 가지 숙제 모두 추석 연휴를 이용해 여유롭게, 느긋하게 했어요.
우리 할머니 집은 전통 한옥이에요. 집 앞마당에 잔디와 함께 꽃과 나무가 꽤 많답니다. 추석 당일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마당을 산책하다 문득 방학숙제가 생각났습니다. 마당에 핀 꽃 중 제일 예쁜 하얀 꽃을 골라 마주 보고 앉았어요.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참 오랜만이더라고요. 이렇게 꽃과 풀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매일 수많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하는데 그 몇 분 동안은 정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함께 있던 동생은 별걸 다 한다고 구시렁거리며 꽃과 마주하고 있는 제 모습을 예쁘게 사진 찍어 주었고요. 아 자리를 빌려 동생에게 한마디 할게요. 아한! 고마워. 너뿐이야. 호호호.
즐거운 추석 연휴를 보내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어요. 처음에는 제 속도를 내며 잘 달리던 버스가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엉금엉금 거북이가 되는 거예요. 책을 읽다 얼마나 차가 막히나 보려고 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글쎄!! 해가 정말 아름답게 지고 있는 거예요. 정말 예뻤어요. 고속버스 창이 크고 넓잖아요. 창 가득 빨갛게 물든 구름이, 그 아래 파란 산이, 산 아래 시골 마을이 보였습니다. 사실 해 질 녁 하늘을 바라볼 때 방학숙제 생각은 눈곱만큼도 나지 않았어요. 그 풍경에 빠져 그냥 한없이 바라봤어요. 우연히 만난 선물 같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사진은…. 못 찍었어요. 정말 멋졌는데, 보여드리지 못해 정말 아쉽네요. 대신 대전에서 본 두 번째로 예쁜 해 질 녘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선생님! 참 오랜만이었어요. 늘 바쁘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오랜만에 조용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어요.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