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9호] 내가 '편애'할 수밖에 없는 대전 원도심 산책길

연고 하나 없는 대전에 터를 잡은 지도 만 2년. 취재하고 글쓰는 일을 하며 내 고향에서보다 더 많은 곳을 다녔지만, 지금껏 내 마음에 남는 단 하나의 장소는 원도심이다.

무엇보다 내가 살고, 나의 일터가 있는 곳이어서 그렇고, 대전의 속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어서 그렇다.
원도심을 여행한다고 하면 근대건축물, 문화예술공간, 맛집 탐방 등 여러 주제가 떠오른다.

이번에는 그런 주제들은 잠시 접어두고 지난 2년을 반추하며 내가 좋아한 길들을 여행자의 기분으로 다시 걸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

홀로 혹은 누군가와 함께 이 길들을 걸으며 하나의 시절을 완성하고, 흘려보냈다. 이 길들은 봄밤에 걸으면 더 좋다는 게 팁이라면 팁이다. 물론 여름밤에도 좋다.

                    


                            

연애하기 좋겠네, 대흥동 은행나무길

“연애하기 좋겠네.” 언젠가 막내동생을 보러 대전에 온 언니는 이 길을 걸으며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다. 은행나무길은 대흥동성당에서 중구보건소까지 이어진 중교로 중간쯤에 사이로 난 길이다. 은행나무가 길 양옆에 죽 늘어섰기에 그리 이름 붙었다. 갤러리, 개성있는 카페, 오래된 음식점 등이 길을 채우고, 보은방앗간, 충남상회와 같은 옛 상점이 이 길의 상징처럼 자리한다. 비교적 낮은 건물들 덕분에 이 길의 운치는 배가 된다. 


대전에 살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이 길이다. 집을 구하러 다니다 낯선 타향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 엄습했을 때, 이 길을 걸으면서 ‘이런 곳이라면 살아 봐도 괜찮겠다.’라고 생각했다. 때는 여름이라 푸르른 은행나무잎들이 탐스럽게 흔들렸고, 낮고 개성있는 상점들이 무척 정겹게 느껴졌다. 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이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금자리를 정했다. 

                        

+ 처음 이사 올 땐 아스팔트 차도를 걷어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계절이 바뀌는 동안 길 전체가 보도블럭으로 바뀌어 한층 길이 예뻐졌다. 시간이 흐르며 자주 가던 카페가 문을 닫고, 새로운 상점이 문을 열기도 했지만, 이곳의 운치는 여전하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지만, 자분자분 걷다 보면 꽤 낭만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길 사이사이로도 한적한 카페나 작은 펍 등이 있어 한가롭게 쉬어가기에 좋다.  [ 대전 중구 대흥로 121번길 일대 ]


                 

                       

내가 좋아하는 길이야, 선화동 옛 충남도청 뒷길

이곳은 말 그대로 옛 충남도청 뒷쪽으로 난 길로, 중앙로 79번길에 해당한다. 옛 충남도청사 옆으로 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죽 걸어가면 이 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처음 걷게 된 건 동네 주민인 회사선배 J 덕분이었다. 대전에서 맞은 첫번째 겨울, 무료하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J 선배의 안내로 북적이는 중앙로를 비껴나 앞서 말한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늘 옛 충남도청사의 정면만 보았던 나는 그 뒷길의 고즈넉한 정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길이야.” J 선배는 베테랑(?) 대흥동 주민답게 길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를 일러주었다. 그리고 둘은 그 길에서 호젓하게 불 밝힌 카페에 들어가 수다를 나눴다. 이후 봄이 오고 여름이 되는 동안, 처음 만난 이와 이 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다 친구가 되기도 했다.

                 

+ 옛 충남도청 뒷길은 널따란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가 그림처럼 멋스럽다. 겨울엔 앙상한 대로 파리한 멋이 있고, 여름에는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길을 푸르게 밝힌다. 이 길을 포함해 한 블록 더 올라간 뒷길에는 1920년대~50년대에 지은 가옥, 영화에 나올 법한 계단 길, 옛스런 상점 등 정겨운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어 걷는 재미가 있다. 꽤 넓은 도로이지만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주민이 종종 눈에 띈다. 그 또한 풍경을 만든다.  
[ 대전 중구 중앙로 79번길 일대 ]


                   

                      

한 시절이 흘러감을 실감하던 장소, 관사촌~테미공원

“벚꽃 필 때 테미공원에서 맥주 한 캔 하면 최곤데!” 2015년 봄을 앞둔 겨울의 끝 무렵,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회사 선배들은 테미공원을 꼭 가 봐야 한다고 했다. 집에서 고작 10분 거리이지만, 봄이 되어도 막상 갈  기회가 나질 않았다. 4월의 문턱에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폭풍을 예고하는 듯 이상하리만치 공기가 후끈하고 바람이 휙휙 불던 저녁, 함께 퇴근하던 동료 H와 급작스레 테미공원 행을 결정했다.

대전에서 처음 맞는 봄, 처음 오른 테미공원은 소문대로 참 예뻤다. 고개를 들면 하늘 가득 못다 핀 벚꽃이 팝콘처럼 수놓였고, 그 모습은 흡사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수도산을 따라 빙 둘러 난 길을 빙글빙글 걷다 아무 벤치에 자리잡고 앉았다. 봄밤 벚꽃 아래서였을까. 맥주 한 캔을 안주 삼아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때 문득 ‘우리가 한 시절을 나누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새삼 들었다. 

              


+ 테미공원은 보문산 줄기인 해발 108m 수도산에 조성한 공원이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뤄져 있고, 곳곳에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벤치나 평상도 부족하지 않게 마련돼 있어 쉬거나 얘기를 나누기도 좋다. 산책길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빙 둘러가며 이어져 있어, 돌고도는 길을 따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혼자여도 좋지만 좋은 벗이나 연인과 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4월 초중순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장관이고, 5월에는 이팝꽃 향이 진하게 풍긴다. 테미공원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난 돌길을 따라 걸으면 발 아래로 질박한 동네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테미공원을 오르거나 내려오는 길, 가까운 곳에 있는 관사촌 길을 곁들여 둘러보아도 좋다.
[ 대전 중구 보문로 199번길 37-36 ]


글 사진 엄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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