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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9호] 아홉 번 중 한 번은 현충원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보훈둘레길
국립대전현충원의 둘레를 잇는 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보다 먼저, 유성구 갑동에 있는 현충원을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라고 여기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아는 사람이 잠들어 있는 곳, 가끔 지날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던 그곳에 ‘걸으러’ 갔다.
무거운 마음으로 둘레길을 걸었고 종종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8.2km의 길은 구간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발걸음을 이끌었다.
보훈둘레길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쪽빛, 보라길 7구간으로 구성된다. 현충원 정문으로 들어가 만남의장소에서 빨강길이 시작된다. 언뜻 봐서는 그저 현충원을 두르고 있는, 길 없이 빼곡한 숲으로 보이는데 일단 길 위에 올라서면, 이것이 친절한 둘레길의 초입임을 알게 된다.
빨강길은 아직 도심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않은 길이다. 멀리로는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숲에 몇 발짝 들여놓았다고 새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빨강길은 전체 구간 중 가장 완만한 산책로다. 기차 안에 구성한 호국철도기념관도 길 옆에서 만나 볼 수 있다. 1.2km의 빨강길이 끝나면 주황길이 시작된다. 주황길부터는 뒷동산을 오른다는 느낌으로 올라야 한다. 연못과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제법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물이라도 한 통 챙겨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샘터가 나온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한숨 돌리면 1.2km의 주황길이 끝나고 1.4km 노랑길이 이어진다. 노랑길은 순환코스로, 숲 위쪽과 아래쪽 중 하나를 택해 초록길 시작점까지 갈 수 있다. 어느 길을 택해도 대나무숲 속을 걸을 수 있다.
초록길은 전체 구간 중 가장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개울 길을 지나 한쪽으로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온갖 식물을, 한쪽으로는 묘역을 두고 쭉 걸어 들어가면 다시 숲길이 시작된다. 새소리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도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새도 눈에 띈다. 이제는 자동차 소리는 들리지조차 않고 숲의 소리와 냄새가 더 가깝다. 봄 대신 먼저 온 듯한 더위도 숲 속에는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한다. 둘레길 대부분의 구간이 숲길로 이어져 그늘 속에서 걸을 수 있다.
초록길을 한참 지나자 한 아주머니가 오열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 이름을 울부짖으며 잘 있었냐고 묻는 목소리가 숲까지 울려 퍼진다. 발걸음을 멈추고 목놓아 우는 아주머니를 바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국립대전현충원은 2007년 빨강길을 시작으로, 2009년에는 주황길, 2011년에는 쪽빛길, 2015년에는 파랑길, 초록길, 보라길을 차례로 조성했다. 전체 둘레길이 완성된 건 보라길 조성이 끝난 작년 11월이다. 전체 구간이 이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둘레길을 걷는 사람을 제법 많이 만났다. 이들도 가끔 처연한 울음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생사의 갈림에서 세상 모두를 잃은 듯한 심정을 앞에 두고 좋은 길을 찾아 걷는 마음이 편치 않다. 한편으로는 다시는 이 길에 걸으러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직접 보지 않아도 존재하는 어떤 죽음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숲 너머의 묘역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잇는다.
1km의 파랑길에는 현충원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맞은편의 빈계산, 도덕봉, 갑하산, 두리봉, 신성봉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숲을 따라 1.2km의 쪽빛길과 1km의 보라길이 이어진다.
보훈둘레길의 장점은 개인이 자유롭게 코스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현충원에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길을 살짝 벗어나 현충원으로 내려와도 된다. 그리고 다시 둘레길로 들어갈 수 있다. 보라길로 둘레길 코스를 마치는 대신, 쪽빛길에서 현충원으로 내려와 야생화공원에 들러도 된다.
1985년, 국립대전현충원이 준공된 때다. 대전의 한쪽 끝을 30년 넘게 지킨 현충원은 30주년을 맞은 작년, 둘레길을 완성했다. 보훈둘레길 걷기는 대전을 ‘다르게’, ‘즐기는’ 한 방법이다. 그동안 잘 몰랐던 도시, 삶의 한 면을 직접 걸으며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