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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9호] 거대한 도시정원으로 들어가다
아직 많은 종류의 꽃이 피지는 않은 4월 초, 순천만국가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설렜다. 어떤 식물들을 보게 될까,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정원’이라고 하면 마당이 딸린 집 한편에 제법 큰 나무 몇 그루와 그보다 작은 식물들, 꽃이 있는 곳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만큼 정원에 관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넓은 터에 조성한 정원을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다.
순천만국가정원에 들어서니 먼저, 화단에 심은 작은 부용화들이 눈에 띄었다. 짙은 빨강과 그보다 조금 옅은 분홍, 노란색의 꽃송이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 부용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이라고 팻말이 알려 준다. 순천만국가정원에 기대하는 것도 이 꽃말과 비슷했다.
입구 근처에서 주혜숙 해설사를 만났다. 넓은 정원을 해설사와 함께 다니며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정원을 돌아봤다. 처음 둘러본 곳은 한국 정원이다. 창덕궁의 부용지, 부용정의 특징을 재구성한 궁궐 정원, 선비를 위한 군자의 정원, 서민의 정원인 소망의 정원을 차례로 볼 수 있다. 정원 하나하나가 그리 크지 않은 크기로 정감이 간다.
한국 정원을 지나 순천만국가정원 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데크에 섰다. 주혜숙 해설사가 순천만국가정원에 관한 설명을 이어간다. 그중 입구 근처의 300년 된 모과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 모과나무는 순천만국가정원의 랜드마크 같은 나무인데, 한 마을에 있던 나무를 정원 조성 담당 공무원이 보고, 소유자인 할머니를 설득해 정원에 가져다 놓았다는 이야기다. 몇 번의 방문에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할머니가, 자신이 아파 쓰러져 있을 때 마침 방문한 공무원에게 업혀 병원에 가 목숨을 건져, 나무를 선뜻 내어 놓았다는 내용이다. 어느 정도의 사실과 과장이 섞였을 것 같은 이 이야기의 골자는 ‘민과 관이 함께 노력해 정원을 만들었다.’일 것이다. 그것도 ‘정성스럽게’.
순천만국가정원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순천만이라는 자원을 지녔지만, 그 가치를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시와 시민이, 가치를 함께 발견하고 만들어 간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방치되고 있던 순천만을 되살리기 위해 민관학이 많은 노력을 해, 2003년에는 순천만이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2006년에는 람사르 협약에 등록됐다. 그만큼 순천만은 원래의 모습처럼 경관이 아름답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곳이 되었다. 순천만국가정원도 순천만 보전과 관련이 있다. 도심과 순천만 사이에 있어 그 존재 자체로 에코벨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로써 도심의 팽창이 억제되며 순천만 보전에도 한 역할을 하게 된다.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시 전체가 하나가 되어 만든 행사다. 이제는 무엇보다 ‘자연’이 중요하다는 것에 시민이 동의했고 시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 또 그에 따른 부수적 효과를 기대하며 치렀다. 그리고 당시 박람회장을 2014년, 순천만정원으로 영구개장했고 2015년에는 우리나라의 제1호 국가정원이 되었다.
주혜숙 해설사를 비롯해 이날 만난 순천 사람들은 모두, 순천만국가정원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그 도시 속에서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 정원에서 빠져나와 순천만WWT습지를 건넜다. 습지를 유유자적 헤엄쳐 다니는 백조들의 움직임은, 관람객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유려했고 우아했다. 습지 건너 순천만국제습지센터 앞에는 홍학이 있다. 특별한 우리를 해 놓지 않았는데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은 없다고 한다. 센터 한쪽 옆에는 야생동물원이 있다. 여러 종류의 야생 동물을 볼 수 있는 작은 동물원이다.
이제 동천을 건너 순천만국가정원의 동쪽으로 향한다. 동천은 ‘꿈의다리’로 건넌다. 이 다리는 강익중 작가가 디자인한 것으로, 알록달록한 타일에 글을 써 붙인 모습이 눈길을 끈다. 내부에는 16개 나라 어린이들의 그림 14만 점이 전시돼 있다. 꿈의다리는 순천만국가정원 동쪽과 서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미술 전시장의 역할을 한다. 또, 일본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차경’을 설치해 내부에서 동천 풍경을 볼 수 있게 했다. 차경이란,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말 그대로 바깥의 경치를 그림처럼 볼 수 있는 창과 같은 것이다. 동그란 차경 너머 동천 풍경을 마음 속에 끌어안으며 걸음을 옮긴다.
숨김과 드러냄의 미학이 녹아 있는 중국 정원을 지나 맞이한 프랑스 정원은 확 트인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케 한다. 이후부터는 관람차를 타고 정원을 둘러본다.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빠른 관람차를 타고 독일, 네덜란드,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영국, 태국 등 나라의 정원을 둘러봤다. 가만히 앉아 볼 수 있어 편했지만, 그만큼 재미는 덜했다. 보고 싶은 만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없고 그저 보여 주는 대로 볼 수밖에 없었다. 순천만국가정원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순천호수정원의 상징 구조물도 둘러볼 수 없었다.
순천만국가정원을 걸어서 반나절에 보기는 어렵다. 천천히 보고 느끼려면 종일 이곳에 머물러도 모자랄 듯하다. 둘러보기 전에 얼마나 길게 머물 건지, 어디를 중점적으로 보고 싶은지 정하는 것이 좋다.
순천만국가정원에서 남쪽으로 5.8km 정도 가면 순천만습지가 있다. 그곳까지 스카이큐브(무인궤도형 소형경전철)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순천만국가정원 내부의 정원역에서 순천만습지 쪽 문학관역까지는 12분이 걸린다. 동천을 따라 이어진 고가 레일 위에서 멀어지는 순천만국가정원을, 꿈의다리를 바라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문학관역에 내리면 그동안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먼저, 넓은 갈대밭이 한 번에 시선을 압도한다. 도심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순천이란 도시에 들어와서도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다. 엷어서 없다시피한 갯내음을 실은 바닷바람이 멀리서부터 불어 온다. 15분쯤 걸으니 탐사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에 도착한다.
원래 이곳 근처는 식당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오리농장이 있었다. 습지 보전을 명목으로 시와 시민운동가 등이 분위기를 형성하며 식당가와 농장을 처음 내보내려 했을 때는 반발이 심했다. 갈대밭에 휘발유로 불을 지르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철새들이 밥 먹여 주냐.’라는 이유였다. 법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한계는 있고 장사는 잘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좋아할 식당 주인들은 없었다. 결국, 모두를 설득해 현재는 주변에 남은 식당은 없다. 이들은 ‘미래 세대를 지키는 일’에 동참했다.
순천만습지를 안내해 준 강나루 해설사는 이 과정을 소개하며,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유의해야 할 점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곳 일대에서 식당을 운영하다 보상금으로 다른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이 어떠한 가치, 사업을 목적으로 민을 설득해야 할 때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대신, 하던 것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순천만을 둘러볼 수 있는 생태체험선에 탔다. 배 난간에 기대니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린다. 그렇게 탁 트인 풍경을 얼마만큼 바라보았을까, 갯벌 위에 갈매기떼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뭘 그렇게 바쁘게 다니느냐며 빠르게 움직이는 배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저들의 움직임에 뒤섞여 그 속에서 잠시 끼룩끼룩 울고 싶었다. 그만큼 마음을 울리는,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다시 뭍으로 돌아와 갈대밭 사이로 이리저리 난 데크 위를 걸었다. 해가 지고 쌀쌀한 바람에도 갈대밭은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처럼 암울한 무언가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김승옥이 소설에서 묘사한 무진은 순천이 모델이라고 한다.
하루 동안 느낀 순천은 ‘도시가 아닙니다. 정원입니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자연을 바탕으로 잘 닦아 놓은, 깨끗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는 도시였다. 거대한 정원을 그린 그림 한 점을 오랫동안 바라본 것 같은 기억이 이제는 순천에서의 하루를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