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0호] 오늘을 더 멀리 걷는 사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컸다. 공간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가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그것을 상쇄하기라도 하듯, 큰 성량이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어느 순간에는 공간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를 흘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배재신문사 김현곤 편집국장은 스스로를 ‘내 인생엔 신경 쓰지 않지만, 남의 인생에는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외부로 향한 삶의 방향이 그라는 사람 자체를 규정했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런 김현곤 편집국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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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상북도 봉화 사람이다. 태어나 자랐고 고등학교까지 봉화에서 다녔다. 대학교는 경상도를 벗어난 곳에서 다니고 싶었고 어쩌다 선택한 곳이 배재대학교 정치언론안보학과다.

 

 

자신의 스무 해 인생을 ‘막장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삶은 많은 우연과 선택으로 흘러왔다.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차로 생선 장사, 두부 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학교도 자주 빠졌다.

 

 

가재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어린 그는 빨간 딱지가 의미하는 바를 잘 몰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너희 집 빚쟁이라며?” 하고 말했을 때도 ‘빚쟁이’가 뭘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빚쟁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날, 소주를 많이 마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할 뿐이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던 때였다. 전기가 끊겼고 쌀은 얻어먹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교사와 싸웠던 기억이 있다. 보강 시간에 자고 있다가 ‘엄마 없는 집안 자식은 성격 파탄자다.’라는 말을 들었고 참을 수 없던 그는 교사와 싸우고 수업 중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공교육을 믿을 수 없었고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진학을 결정지어야 할 때, 담임교사가 입학생 한 명이 부족해 폐교 위기에 처한 고등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입학식만 하고 자퇴하려는 마음으로 들어간 그 학교에서 3년을 보내고 졸업까지 했다. 시간이 어찌어찌 흘렀다.

 

 

한 학년 학생이 열다섯 명 정도 되는 고등학교에서 그가 낄 곳은 없었다. 같은 마을에 살며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들 틈에서 적응하는 게 어려웠고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문예창작과 입학을 꿈꿨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뒤늦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한 극작가가 아사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충격을 받았다. 문예창작과가 아닌 정치외교학과로 진로를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국립대 학교 위주로 수시 원서를 넣었는데, 배재대학교 정치언론안보학과에 농어촌 전형으로 합격하게 됐다. 경쟁률이 1:1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탓에 합격자 발표 이후로 ‘방구석 폐인’처럼 지냈다. 그러다 아버지가 백만 원을 던져 줬다. 창업을 해 보라는 뜻이었다. 산지 농산물을 직접 싼 가격에 도시의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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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낯선 도시였다. 일단 아스팔트 깔린 길이 낯설었다. 연탄을 빌리러 가는 길에 고삐 풀린 소를 만나 도망치는 게 자연스러웠던 고향과 차이가 컸다.

 

 

신문사에 지원한 건 지난해 3월이다. 14학번인 그가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내린 결정이었다. 글을 쓰면서 용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입사했는데 선배나 동기가 한 명도 없었다. 기자실에서 혼자 놀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어떠한 비전도 보이지 않았고 마침 진행하던 사업도 꼬여, 중간에 신문사를 나왔다.

 

 

그런데 엉뚱한 시점에 신문사를 살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교내 방송사에서 신문사의 현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는 소식이 마음을 때렸다. 그 와중에 주간 교수가 다시 들어와 신문사를 살리라고 이야기했고 이상하게도 그 말에 따르게 됐다. 그렇게 작년 10월부터 신문 일곱 개를 혼자서 만들었다.

 

 

“부채 의식이 많이 남아 있었나 봐요. 어떻게든 폐간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맨땅에 헤딩이었어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공부하고 터득했죠. 기자 네다섯 명이 함께 만들어도 버거운 분량을 혼자 만들었어요.”

 

 

혼자뿐인 신문사에서 활동하며 성적은 바닥을 찍었다. 밤을 새워 신문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학과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성적표에는 F 학점만 눈에 띄었다. 이 성적으로는 규정상 신문사에서 활동하면 안 되는데, 그가 구성원의 전부인 신문사는 그대로 유지됐다.

 

 

처음에는 용돈을 벌려고 들어간 신문사에서 올해 1학기 동안 무급으로 일했다. 그리고 치열하게 일했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혼자 취재 거리를 찾고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편집권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종강호를 내면서도 갈등이 있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온 어느 날, 학교 카페에 가는 도중에 대자보가 걸린 것을 보았다. 유아교육과 학생들이 군기를 잡았다는 내용 등 교내 부조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관련 사항을 페이스북 페이지에 단일 기사로 작성해 올렸는데, 130주년 개교기념일 무렵이기도 해 학교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또한, 대자보 전문을 게재한 것이 대자보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며 주간 교수가 기사를 내리라고 했다. 고성이 오갈 정도로 대치하다 결국 페이스북에 올린 기사를 내렸고 종강호를 종이 신문으로 발행하고자 한 계획도 취소됐다.

 

 

주간 교수에게 사의 표명 메일을 보냈는데 교수는 사직서를 정식으로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또다시 신문사 생활이 시작됐다. 여름방학이지만 여전히 신문사 일로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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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신문사는 스펙 쌓기도,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도 아니다. 그는 그저 지금, 배재신문사를 살리고 싶은 사람이고 신문사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임기 3년 동안 다시 복학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휴학생 신분으로 신문사에서 활동하다 이제 더 할 수 없을 때 복학할 계획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지향점은 분명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싶다는 것이다. 민노당, 농민회 활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접했던 것들을 이제는 직접 해 나가고 싶다. 배재신문사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정말 살리고 싶다는 애착이 생겼다.

 

 

“학보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인식하고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학우들이 학보사가 왜 필요한지 알 때까지, 힘이 닿는 데까지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고 싶어 전국 학보사를 돌아다니며 기자들을 만났다. 가르쳐 주는 사람,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어 직접 찾아 다녔다. 그 결과 지금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섰지만, 처음 신문을 복간할 때만 해도 기사에 관한 항의성 메일을 받기도 했다. 등록금이 아깝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때 알량했던 기사를 만회하려고 현재 더 열심히 갈 길을 간다.

 

 

힘이 빠질 때도 있다. 대학 신문 구독률이 줄고 만드는 사람과 예산도 줄고 편집권 독립은 안 되는데, 해결책이 없어 푸념할 때도 많았다. 그런 푸념에 염증이 날 무렵, 페이스북 페이지 ‘내가 학보사 힘들다 그랬잖아’를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별생각 없이 만든 것이다. 학교 신문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조 섞인 유머러스한 게시물을 올렸는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반응했다. 현재 ‘좋아요’ 수가 1,500명 가까이 되며 필진은 열세 명이다. 이 페이지가 전국 학보사들이 교류하는 장이 되기도 했는데 현재는 잠시 방향성을 다시 잡는 중이다.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자보 관련 기사로 한창 학교와 마찰을 빚었을 때,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지역지, 중앙지 기자들에게 전화가 왔고 문제 해결을 위해 대학본부가 나섰다.

 

 

현재 배재신문사는 기자를 모집한다. 그리고 김현곤 편집국장은 자신이 마지막 편집국장이 되지 않기 위해 걸어 나간다.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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