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00호] '중앙동 주민특공대'와 '사직2동 이통장'
원도심은 신도심과 대조하는 용어로 ‘예전에 부흥했던 도시’를 말한다. 발길이 뜸한 그곳에는 적막한 고요만 흐른다. 그곳에 남은 사람은 화려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지금을 어떻게든 바꿔보려 시도했다. 대전과 마찬가지로 청주에서도 ‘원도심’을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에 많은 정책이 쏟아졌다. 충북 청주의 원도심은 청주 중심을 흐르는 무심천과 가까운 상당구 중앙동, 흥덕구 사직동 등이다. 청주시 또한 ‘원도심’을 살리기 위해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여러 시도 끝에 청주시 중앙동과 사직2동은 도시재생 우수사례로 꼽혔다. 많은 지자체에서 ‘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청주를 방문했다. ‘주민과 함께’, ‘주민참여형’이라는 낱말이 청주시가 ‘우수사례’로 꼽힌 가장 큰 이유였다.
도시대학으로 변화한 주민
상당구 중앙동은 옛 청주역, 1960년 개관한 중앙극장을 중심으로 한때는 청주 시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던 거리였다. 들락거리던 사람도 많고, 거주하는 사람도 많았다. 청주시 인구가 30만 명일 때 4만 명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러다 점점 조용해졌다. 2003년엔 중앙극장도 문을 닫았다. 가까운 성안동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영향이 컸다. 시장에 오는 사람은 점점 뜸해졌다. 도심 외곽에 들어선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렸다. 거주하는 사람도 하나씩 떠났다. 사람의 손길과 발걸음이 떠난 중앙동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장 보러 오는 사람은 줄고, 시장 주변엔 색싯집, 카바레 등 유흥업소만 남았다. 그마저도 빛바랜 화려함이었다. 눅눅한 유흥업소는 거리를 한층 더 가라앉게 했다. 시장을 나오면 늘어선 긴 상점가는 곳곳에 정리되지 않은 빈 점포가 가득했다. 많은 사람이 빠져나갔다. 청주시 인구 70만 명인 지금 중앙동엔 6천 명이 거주한다. 주민자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인 권순택 위원장은 도시재생 이전의 중앙동을 ‘슬럼가’라고 표현했다.
권 위원장은 중앙동에 3대째 사는 토박이다. 속절없이 변하는 시간 앞에서 한순간 무너지는 삶의 터전이 안타까웠다. 답답한 마음으로 고민하고 고민했다. 비슷한 생각이 있는 사람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명확한 해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도시대학을 만났다.
“충북대학교에 개설한 도시대학에 주민 10여 명이 참여했어요. 도시재생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역 주민을 모아 7~8주 과정으로 도시재생 관련 강의를 들었어요. 많은 것을 느꼈죠. 점점 폐허가 되는 중앙동을 보면서 답답함이 가득했어요. 항상 이곳에 관한 생각은 가득한데,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도시대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이런 것을 하면 되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도시대학 출신들은 중앙동 도시재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강의는 도시가 더는 ‘개발’만을 향해서는 안 되며, ‘재생’을 접목해야 하는 이유부터 도시재생에 주민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 주민과 관의 협업에 관한 교육과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권 위원장과 함께한 사람들은 내가 사는 ‘중앙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하나씩 변화를 시도했다.
청소년 광장, 차 없는 거리 소나무길 등 도심에서 사람이 주가 되는 공간을 하나씩 만들었다. 주민이 모였고, 관과 학계가 참여해 중앙동의 겉모습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주민 여섯 명이 8천만 원을 모아 도시재생신탁업무센터(이하 신탁업무센터)를 만들었다. 신탁업무센터는 빈 점포에 문화예술단체가 들어올 때 건물주와 협의를 통해 저렴한 임대료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문화예술단체는 거리 활성화에 도움이 될 단체여야 한다. 신탁업무센터의 도움으로 소나무길엔 실용음악학원, 소극장 등이 들어왔으며, 연습장, 공연장 등이 입주를 협의 중이다.
“2011년에 차 없는 거리 소나무길을 만들고 나니까 그곳을 활용할 필요가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소나무길 프리마켓 황다혜 대표님을 만나 뵙고, 이곳에서 해주십사하고 요청했죠. 그렇게 프리마켓이 열리니까 아무래도 이게 지속하려면 공간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몇몇 주민과 건물 하나를 얻고, 리모델링할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해서 소나무길 프리마켓 본부로 빌려드렸죠. 그렇게 하니까 마켓이 계속 열리고, 찾는 분도 늘었죠. 상인이나 주민의 힘으로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시에서 문화예술로 활동하는 단체가 이 거리에서 뭔가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신탁업무센터에서 문화예술단체가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들어올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죠.”
차 없는 거리 조성은 2006년부터 39억 원을 들여 1, 2차로 나누어 진행했다. 2010년 3월, 옛 중앙극장 자리에 70억 원을 들여 청소년 광장을 만들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국비 15억, 시비 15억 원을 투입해 차 없는 거리에 소나무 열다섯 그루를 심었다. 그곳을 소나무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길을 조성하면서 주민 대상으로 도시대학을 진행했다. 주민은 도시재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내가 사는 지역이 잘 돼야 나에게도 좋은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관과 함께 고민해 여러 방안을 마련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소나무길 프리마켓을 연다. 현재는 옛 청주역이 있던 자리에 2015년까지 87억 원을 들여 그때 모습을 그대로 재현할 것이다. 그 공간 역시 문화 예술 관련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거리환경조성사업으로 몇 개 골목의 도로가 다시 깔릴 예정이고, 고 김수근 건축가의 유작인 학천탕을 활용해 문화예술창조허브센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청주에서 유명한 목욕탕인 학천탕은 현재 매입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 매입한다면, 문화예술인 레지던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어두운 도심은 그렇게 변화를 시도했다.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소나무길의 한 점포에서는 “주차장이나 만들지 쓸데없는 것을 자꾸 만들어서 결사반대”라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권순택 씨는 “그래서 도시재생에 주민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참여가 꼭 필요한 부분이 그거예요. 반대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어요. 도시재생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주민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대부분이 거기서 포기하고 말죠.”
하드웨어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개발에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중앙동은 그런 면에서 대전의 대흥동과 많이 닮아 있었다.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젊은이가 가득한 성안동은 대전 중구 은행동 같았다. 중앙동 역시 대흥동처럼 커다란 그릇은 보였지만, 그곳에 어떤 내용물이 담겨 있는지 아직은 보이는 것이 많지 않았다. 중앙동의 변화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학천탕 건물을 살피러 갔다가 매개공간 이드를 만났다. 학천탕 바로 앞에 자리한 이곳은 전시공간이자 작가들의 레지던시 공간으로 쓴다. 건물 지하 1층, 1·3·5층이 매개공간 이드가 사용하는 공간이다. 지하 1층은 창고로 쓰이고, 1층은 갤러리, 3·5층은 작가의 레지던시 공간이다. 신진작가 발굴, 전시, 레지던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매개공간 이드의 조지현 대표 역시 중앙동에 3대째 뿌리를 내린 토박이다. 지난해에는 ‘중앙동 콜라보레이션’과 같이 입주 작가와 중앙동 주민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매개공간 이드 www.artspaceid.com
어디선가누군가에무슨일이생기면틀림없이나타난다
‘이 통장’
사직2동은 중앙동과는 다른 모습이다. 상가가 죽 늘어선 상업지구인 중앙동과 달리 사직2동은 골목골목 주택이 늘어선 주거지역이다. 재개발·재건축 예정구역이라 주민의 목소리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묘한 갈등도 있다. 그곳에 지난 2011년 이종현 디렉터가 자리 잡았다. 비어있던 화교소학교에 ‘653 예술상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6년도에 캐나다 이민 가려고 했거든요. 그냥 도망이었죠. 그때 서울에 있는 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때마다 교수들한테 선물하고 나면 강사비가 남아 있질 않은 거예요. 웃기잖아요. 작품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사느니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떠나려 했는데, 잘 안 됐어요.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어요. 한국에서 내가 나로 살 길이 없는 거예요. 매일 술만 마셨죠. 그러다 정신 차리고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어요. 아직 우리나라도 못 본 곳이 많더라고요. 그때 마흔인가 그랬어요. 힘들었죠. 그래서 일단 자전거에서 안 내린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무조건 내리지 말자고 마음먹으면 가게 된다니까요. 거리에서 자기도 하고, 어디 민박도 하고, 그러다 내장산에 갔는데…. 아 이 얘기하면 사람들이 진짜 아무도 안 믿거든요? 근데 진짜 들었어요.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데, ‘네가 하고 싶은 것 해라.’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그렇게 여행 마치고, 거리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안’만 고집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예술 하는 사람들이 재미있는 게 유학은 가면서 밖은 안 나가려고 해요. 그냥 그런 생각 다 버리고, 나는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종현 디렉터는 그때부터 ‘밖’에서 미술을 들여다보았다. 버리고 나니 보이는 것이 많았다. 예술 안보다 밖에서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프로젝트로 지역에서 일을 진행했지만, 대부분 단기로 끝나는 일이었다. “지원금 받으려고 하는 짓”은 예술가에게도 지역주민에게도 소모적인 일이었다. 진짜 지역, 마을에 들어가서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사직2동 화교소학교에 자리 잡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 축제만 일곱 번을 했어요. 축제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에요. 그냥 영화 틀어서 주민들 모시고, 같이 맛있는 것 먹고. 그런 거죠. 주민센터에서 하는 사업을 하나씩 함께 하기도 했어요. 벽화 그리고, 우체통 의자 만들고, 이런 것들 있잖아요. 공공 근로 하는 거죠. 주민센터에서는 공공근로라고 표현하더라고요. 공공근로에 ‘기술’ 부분이 따로 있어요. 그러면서 여기 사는 분들이랑 친해지고, 주민센터랑 안면 트고 지내는 거죠. 근데 모든 분이 제가 하는 일을 마땅해하시는 건 아니에요. 제가 하는 일 대부분이 재개발이랑은 거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재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마뜩찮아 하시죠.”
예술가도 주민도 소비하지 않는 일을 찾고 싶었다. 마을 사람 몇과 이종현 디렉터가 3,600만 원을 출자해 두부를 만들어 파는 (주)양달말 마을 기업을 만들었다. 마을 기업에 참여한 사직2동 주민 역시 ‘도시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마을에 들어온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내가 사는 동네를 가꾸기 위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레지던시 참여 작가들과는 주민과 함께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어린이 문화탐험 별똥대, 거리 꼭두 프로젝트, 주민100분영화제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또 국제교류프로그램을 위해 작가 워크숍 등을 진행해 작가 역량을 키우는 작업도 함께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해온 작업이 매년 연간보고서로 엮였다.
동네 사람을 읽어야 나도 동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민자서전 만드는 일도 시작했다. 처음엔 꺼렸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의 이야기로 동네 역사를 알 수도 있었다. 오래된 동네는 그렇게 하나씩 기록으로 남았다.
“서로 아주 사이가 좋은 집이 있는데, 보기만 해도 치를 떠는 집이 있더라고요. 그게 참 재미있어요. 오래 사신 토박이 중에 동네 사람 모두가 싫어하는 분이 한 분 계세요. 그분이 70년대 여기에서 일수를 놓으셨던 거예요. 지금은 이제 자리 좀 잡았으니까 아저씨가 봉사활동을 나가시는데, 봉사를 다른 동네로 나가세요. 그런 관계 하나하나가 참 재미있어요.”
현구 목공소, 콩 할머니, 자전거 할아버지, 가죽 신발 아저씨, 환희 이용원 등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만난 열여덟 명의 주민 이야기가 <사직2동 주민자서전>에 담겼다. 열여덟 명 중에는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쓴 사람도 있고, 마을에 터를 잡은 예술가에게 하나씩 인생사를 털어놓은 이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모여 <사직2동 주민자서전>이 조금씩 두꺼워졌다. 2014년이 지나면 사직2동 주민 몇을 더해 더 두꺼워질 것이다. “뭐, 대단한 인생사도 아닌데….”라며 손사래 치던 사람도 하나둘, 넋두리처럼 지나온 세월을 풀었다. 그렇게 주민의 곁에 있다 보니 ‘통장님’이라는 직함도 얻었다. 사직2동 13통 통장으로 마을 일을 돌보기도 한다.
“예술을 버려야 예술을 알 수 있어요. 가끔 여기 오는 친구들한테 우리는 예술상회 수행공동체라고 이야기해요. 이제는 예술가들이 자기 작업만 고집해서는 먹고 살지 못해요. 예술을 떠나야 예술을 볼 수 있어요. 이제 작가들도 공동체를 이뤄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10년은 해야죠. 처음 저 여기 자리 잡을 때 도와주시던 분들이랑 10년 살기로 약속했거든요. 약속 지켜야죠. 10년 지나면, 도시 한가운데에 논을 만들고 싶어요. 도시에 밭은 있는데, 논은 없잖아요. 거기 논 가꾸면서 살고 싶어요.”
사직2동은 중앙동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큰 변화는 없었다. 어떤 날 예술가가 들어와 마을 일을 돌보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과 다름없는 생활로 오늘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도 그 예술가를 동네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화교소학교 바로 앞에 있는 이층집에서는 어느 날 화교소학교 한편에 꽃을 심었다. “우리 집 2층에서 보니 여기가 우리 앞마당 같아서”라는 이유였다. 한 할머니는 운동장 한편에 콩을 심었고, 마을 사람이 와 차 한 잔 마시고 수다 떨다 가기도 했다. “예술가가 밖으로 나와야 한다.”라는 이종현 디렉터의 이야기는 그가 가는 길을 조금씩 따라다니다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를 보니 재생은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 같았다. 관계 속에서 피어난 재생이 조금씩 사람을 바꾸고, 마을을 물들인다.
“이곳도 혼자 사는 노인이 많으세요. 자폐를 앓는 분도 계시고요. 나중에는 이분들 생일을 챙겨드리려고요. 제가 통장이니까 알 수 있잖아요. 뭐. 특별한 것 있나요? 그냥 케이크 하나 놓고, 막걸리 한 잔 마시면 되잖아요. 그것만 있으면 한나절 놀 수 있어요. 그렇게 하루 보내는 거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