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1호] Culture & Life

느닷없이 찾아온 ‘자판기 커피숍’

이용원

지나가는 사람 몇몇이 옷깃에 고개를 잔뜩 파묻고 거리에 선 채 음악을 듣는다. 흥겨운 리듬에 몸을 움짓거리며 재치 있는 가사에는 거리낌 없이 크게 웃어제낀다. 그 웃음소리마저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음표에 섞여 흩어져버린다. 그녀석들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다 늦은 저녁이다. 여차 저차 해서 계획했던 버스킹 공연을 못하게 되었고 이대로 들어가자니 도무지 용납이 안 된다며, 이데 앞 테라스를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악기와 앰프, 스피커까지 그 비좁은 테라스에 한짐 풀어 놓고는 목을 가다듬고 악기를 조율한다. 오래전 나온 1집 앨범을 맨 앞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년 전에는 이런 계획하지 않은 일이 불쑥 불쑥 벌어지고는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기획하고 준비해서 일을 한다. 큰 골격을 계획하고 홍보 방안을 모색하고 티켓을 판매하고 찾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목을 쭉 빼는 일이 반복이다. 그러던 차에 이 녀석들이 벌인 ‘일탈’은 묘하게 다가왔다. 빈번하게 오가는 자동차를 피하며 음악을 듣는 내내 까닭모를 흥분이 온몸을 감쌌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성이었다. 무엇보다 북카페 이데 앞 골목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줄 정말 몰랐다. 그동안 무심히 내다 본 골목을 오가는 사람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일 그곳에 서서 감쪽같이 색깔을 바꾸고는, 시치미 뚝 뗀 채 서 있는 단풍나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특정한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거 말이다. 이날 비로소 골목을 지나는 낯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연팀에게 무심하게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고 바삐 걸음을 서두르는 사람이나 발걸음을 늦춘 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며 지나는 사람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아예 들러붙어 함께 그 공간 속에서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나 모두 똑똑히 하나의 개체로 보였다. 이날 공연이 특별한 상황이었다. 삼십 분 남짓 앵콜곡까지 소화하고는 밴드 ‘자판기 커피숍’은 주섬주섬 악기와 장비를 챙겼다. 몇 년 전 그들과 함께 벌였던 이데에서 공연과 옥상에서 공연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바람이 제법 독기를 품었는데도 가슴이 한없이 따뜻했다.

  

  

라면

조지영

별명이 팥이라는 친구는 우스갯 소리로 가끔 그런다. “우리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라고.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집앞까지 바래다 준 유지태에게 이영애는 희대의 명대사 “라면 먹고 갈래?”라는 말로 유지태를 꼬신다. 영화 ‘봄날은 간다’ 이후 실제로 연인들이 라면 먹고 가겠느냐는 말로 이성을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 명대사를 되뇌며 일순간 공감대가 형성된다.
나는 현실에서 라면 먹고 가겠느냐는 말로 남자를 꼬셔본 적은 없다. 하지만 왠지 연인 사이에서 라면은 로맨틱한 요소이다. 늦은 밤에 만난 연인들은 항상 배가 고프다. 아니 남자들이 꼭 배고프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런 남자들의 덫 덕분에 이영애가 그런 명대사를 남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라면은 일요일 늦잠 자고 난 뒤 먹어야 맛있고, 여럿이 모여 힘든 무언가를 해내고 같이 끓여 먹는 것도 맛있으며,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는 소주하고 먹는 라면 국물이 맛있다.

라면에는 여러 가지를 넣을 수 있다. 콩나물, 오징어, 북어채, 새우 등. 그러나 가장 기본 메뉴를 좋아하는 나는 라면에 계란 하나, 그리고 송송 썰어 넣은 파면 제일 좋다.

우선 물을 팔팔 끓인다. 물이 끓으면 후레이크(건조채소스프)를 먼저 넣는다. 나름의 육수라고나 할까. 그 다음 스프를 넣는다. 그리고 면을 넣는다. 좀 끓기 시작하면 면발을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면발이 찬공기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면발이 쫀득쫀득하다고 누군가 그랬다. 나만의 면발 익는 정도를 가늠하는 방법은 젓가락으로 면 한가닥을 잡고 힘을 줬을 때 똑 끊기면 적당히 익은 것이다. 적당히 익었다 싶을 때 계란을 넣고 파를 넣는다. 그리고 불을 끈다. 후루룩 라면은 불기 전에 먹어야 한다.

  

  

신호등에 서서 - 문창동네거리

Illustrator 원나영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