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1호] 제 1회 목원의 소리 『첫 번째 선물』

제 1회 목원의 소리, 『첫 번째 선물』 음악회가 열리던 2014년 9월 29일은 일교차가 큰 날이었다.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한낮의 더위, 그리고 늦은 밤과 새벽의 한기가 교차하는 그런 날 말이다. 계절이 바뀔 때 사람은 마음을 다치기 쉬워서 이를테면 예방접종 같은 것을 맞아둘 필요가 있다. 지난 계절의 피로와 다가올 계절의 먹먹함 사이에서 머무는 마음은 내게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몇 편의 시 청탁과 몇 편의 산문 청탁, 그리고 시 창작 수업은 내게 어떤 관성 같은 것을 주었는데 대개 일상의 관성이 그렇듯이 나는, 나도 모르는 피로감을 내 안에 쌓아놓고 있었다. 자신의 피로감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 소진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나간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병이 아닐까, 음악회가 있는 목원대학교로 가면서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나는 일상의 관성을 끊어줄, 어떤 계기가 필요했다.

목원의 소리는 목원대학교 음대 졸업생과 대학원생들이 기획한 음악회다. 문화예술공간 일리아 공연기획자이자 피아니스트 강영이가 설계한 공연이었다. 올해 첫 번째로 열리는 행사. 음악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열심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는 7시 30분보다 조금 일찍 목원대학교 콘서트홀에 도착했는데, 마침,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 악기를 조율하고 서로 호흡을 맞추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과 흥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글쟁이의 악덕이라면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 도입해서 상상해보는 것일 텐데, 사실, 글쓰기는, 저 리허설의 순간이 더 어렵다. 쓰는 것이 순간의 일이라면, 그것을 쓰기 위한 리허설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을 때 글을 쓸 수 있도록 내 몸과 정신의 감각을 최적화시켜야 한다. 글쓰기를 어떤 은유로 사용한다면 글쟁이의 일상은 글쓰는 일을 위한 리허설 그 자체일 테다. 리허설이 한창인 모습에서 어쩌면 나는, 나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른다.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감각하는 일. 그것이 어쩌면 예술의 본체일지 모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의 리허설을 긴장해서 보고 있었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열고 있었다. 음악을 듣기 위한 최적의 상태로. 조금씩.

음악회는 총 여덟 팀의 공연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 짧은 인상만을 기록해둬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그들을 분석하는 글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한 어떤 시간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첫 번째 무대는 ‘재즈올로지’ 팀이 열어주었다. 비교적 귀에 익은 「Sing Sing Sing(Benny Goodman)」과 「Four Brothers(Jimmy Giuffre)」, 두 곡이었는데, 오프닝으로 제격이었다. 리더 원현조의 콘트라베이스는 여유로움이 있었고 드럼 이준형은 묵직했고 피아노 장세연은 섬세했다. 보컬 김다혜의 스캣 창법이 인상적이었는데, 스캣 창법이 본디 그러하듯, 자유로운 발성이 이 계절과 닮아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자유분방함이야말로 재즈의 본령일 텐데, 절제된 자유라고 말하면 될까, 충분히 자유로운 만큼 충분히 절제되어 있는 무대가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무대는 ‘MUTO String Quartet’ 팀이 이어받았다.
A. P. Borodin의 「String Quartet No.21 mov」. 슬픈 선율이었다. 재즈올로지 팀이 지난 여름을 회상하고 있다면 뮤토콰르텟은 아직 오지 않은, 오고 있는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첼로. ‘MUTO’는 라틴어로 ‘변화하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내멋대로 해석한다면, 이 팀의 공연은 죽을 계절과 태어날 계절을 동시에 기억하려는 어떤 안간힘으로 들렸다. 어떤 슬픔으로 충만한 현악기들의 어울림. 마음 속 깊은 위로를 받았다고, 슬픔은 슬픔으로 이기는 것이라고, 이 팀을 다시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다.

여섯 번째 무대는 장원이 이어받았다. 음악회 중 유일한 국악이었는데 지원석의 다향(多香)이라는 곡이었다. ‘재즈올로지’의 피아노 장세연과 협연으로 이루어진 이 무대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대금과 피아노라는 서로 이질적인 악기가 만났을 때 악기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이전의 사람일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악기가 다른 악기에 얹어질 때, 그 악기는 더 이상 그 악기만으로 존재할 수 없겠다. 이것이야말로 음악의 은유고 인생의 은유, 그리고 사랑의 은유 아니던가. 잠연하게 콘서트홀에 퍼지는 두 악기의 음률은 ‘화합’이니 ‘화해’니 같은 어려운 주제를 악기로 ‘실천’하고 있었다. 여운이 오래 남는 무대였다.

마지막 무대는 ‘칸트리네앙상블’의 네 명의 피아노 연주자(리더 강영이, 변은정, 길희주, 김현주)가 맡아주었다. 피아노 두 대를 이어붙인, 2 Piano 8 Hands. 두 대의 피아노와 여덟 개의 손은 C. Saint - Saens의 「Danse macabre Op. 40」를 연주했는데 ‘죽음의 무도’라는 곡명이 암시하듯 어떤 비극성이 연주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4명의 연주자의 호흡이 중요해보였는데, 특히, 리더 강영이의 역할이 돋보인 무대였다. 비극을 같이 연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장엄해질까, 따위의 생각이 스쳐지났다. 비극을 같이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이 삶에 대한 메타포다. 우리는 어떤 슬픔을 같이 통과할 수 있으며 이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같이’ 나눌 수 있다. 이들의 연주를 듣고 ‘보는’ 동안, 이토록 사소한, 그래서 잊고 살았던 ‘같이’라는 가치가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다만 고맙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피로감은 비로소 마지막 무대를 통과하면서 해소되고 있었다.

연주회가 끝난 시각은 밤 아홉 시였다. 조용히 밖으로 나갔고, 나는 내 안에서 흐르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다만 그 힘의 느낌은 ‘다른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만 말해야 할 것 같다. ‘목원의 소리’ 연주회에 가기 전과 후, 내 몸에는 분명 다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들의 선물이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이어진다면 좋겠다. 선물은 주고받는 것이다. 주고받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음악회의 이름이 왜 『첫 번째 선물』인지 이제야 알겠다. 너무나 큰 것을 받았다. 너무나 큰 것을 받은 그 힘으로 나는 쓴다. 당신들에게, 이 가을을 열어줘서 고맙다고 단지 쓸 수 있을 뿐이다.

  

  

『목숨』, 『아라리』, 『식물의 밤』 등의 시집을 펴낸 박진성 시인의 기고문입니다.

  

  


글 사진 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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