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1호] 대중가요역사

1990년대가 그전과 달랐던 건 본격적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사회 전면에 표출됐다는 점이다. 90년대 등장한 신세대는 X세대로 불리며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소비주체로 등장한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유복했고, 정치와 이데올로기보다는 물질을 중시하고 실제화했다. X세대가 문화 시장에서 구매력을 갖게 된 건 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 컸다. 올림픽 개최는 자본주의의 성숙을 의미했고, 소비 사회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X세대는 혈연과 국가보다는 “나”라는 자기 자신에 집중했고, 덕분에 부모 세대와 갈등을 겪게 된다.

1992년 1월, 뉴키즈온더블록 내한공연에서 터진 여학생 압사 사건은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비극적인 계기였다. 언론은 X세대를 머리가 빈 오렌지족, 부모 돈만 받아 쓰는 야타족이라 비하했고,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매도한다. X세대는 이에 대한 전면전을 준비한다. 그 중심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있었다.

  

  

1992년 봄, 서태지와 아이들은 연예 프로그램이었던 〈TV 특종 연예〉를 통해 데뷔한다. 지금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서태지와 아이들 또한 가혹한 심사평과 낮은 점수를 받으며 뉴키즈온더블록을 따라 하는 철없는 X세대로 그려진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성세대의 오판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한국말로도 랩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며, 한국의 모든 곳을 그들의 노래로 도배한다. 92년 내내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가 울렸고, 고교 자퇴인 서태지는 또 다른 성공신화의 모범으로 추켜세워진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조용필과 이전의 모든 가요 어법을 전복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문법을 새롭게 쓴다. 바로 랩으로 상징되는 댄스와 힙합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는 주류였던 발라드를 시장에서 밀어낸 후,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으로 잼, 노이즈, 룰라, 듀스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해 주류에 댄스 음악을 안착시킨다. 이중 이현도와 김성재가 결성한 듀스는 주목해야 한다. 당시 댄스 그룹들이 듣기 좋은 선율과 랩을 적절히 섞어 유행을 좇았지만, 듀스는 이들과는 달랐다. 듀스의 「굴레를 벗어나」는 무게 있는 가사와 흑인 그것의 음악을 선보이며 한국 힙합의 기원을 개척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는 당대 X세대에게 지지를 받았고, X세대는 이들의 무기였던 랩을 자신의 언어와 문화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해체 이후 한국 힙합은 자의식을 잃은 채 춤추고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비록 주류에서 활동했지만, 문법은 비주류인 록과 힙합이 결합한 댄스였다. TV에 출연했지만, 잠적 은둔과 재등장을 일삼으며 마모되기보다는 자의식을 가진 작가의 길을 걷는다. 기성세대와 문화 충돌을 일으키던 X세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자신의 대표자로 삼았고 열띤 지지를 표한다. 여기에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다른 축에서 신해철과 공일오비가 선전했다. 신해철(과 그의 그룹 넥스트)은 산울림 이후 가사 쓰기의 새로운 전범을 세우며 자기 고백을 통해 컬트층을 양산했고, 다양한 장르 실험과 X세대의 사랑을 묘사한 공일오비는 당대 10대의 감수성을 대변하며 TV에 출연하지 않고도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누린다.

언론과 기성세대는 처음에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랩 댄스를 무시했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부터 우려를 표하기 시작한다. 기성세대에게 X세대의 귀걸이, 레게 머리, 질질 끌리는 청바지, 저속한 노래와 위험한 춤은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세대 간 갈등의 발단은 93년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이었다. 『2집』의 타이틀곡 「하여가」는 손쉽게 차트 최상위에 오르지만, KBS는 이들의 레게 머리를 문제 삼아 방송 출현을 금지한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레게 파마를 풀지만 굴복은 아니었다. 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교실 이데아」가 담긴 『3집』을 발표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 2집에서 댄스 음악으로 대중성을 확보한 후, 『3집』에서는 얼터너티브 록을 수용하며 로커로써의 면모를 보인다. 통일을 노래한 「발해를 꿈꾸며」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생각 없는 X세대가 아니란 걸 보여준 선언가였다. 무엇보다 압권은 「교실 이데아」였다. 강렬한 랩과 스레쉬 메탈을 결합한 「교실 이데아」는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이었고, 야유였다. 비주류의 문법을 택했음에도 「교실 이데아」는 전국의 10대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문화 대통령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수여한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3집』 테이프를 뒤집어 돌리며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는 사탄설을 부각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이 위험하고, 불건전하다는 인식을 전파한다. 정점은 바로 95년 「시대유감」사건이었다.

  

  

1995년까지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 현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을 통해 음반의 구성과 가사를 심의했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판매 금지, 방송 불가 등의 이유를 담아 창작자의 사고를 지배했다. 95년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에 실린 「시대유감」 또한 공윤의 사전심의를 받아 가사를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서태지는 「시대유감」의 가사를 삭제한 채 연주곡으로 대응하며 공윤의 결정에 불편함을 드러낸다. 이들의 싸움에 새롭게 등장한 게 바로 소비 주체인 팬덤이었다. 90년대 팬덤은 80년대 팬덤과 달랐다. 80년대 팬덤이 단순히 공개 방송 참여, 팬레터로 자신의 스타를 소비했다면, 90년대 팬덤은 소비를 넘어 제도권에 저항한다.

90년대 팬덤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PC 통신이었다. 90년대 초반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은 방송과 신문이 장악한 언론의 획일성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인터넷 통신은 쌍방향 소통을 불렀고, 더 나아가 의견을 나누고, 개진하여 의제를 선점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 터진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사전심의는 팬들의 공분을 불렀고, 정태춘이 20년 가까이 홀로 싸워온 음반사전심의제도를 폐지하게 한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를 선언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한 시간은 짧았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제대로 된 담론을 잉태했고, 온갖 논쟁과 가십거리를 넘어 음악 산업 전체를 바꿔놓는다. 이들이 중요한 이유는 작가주의 시대에서 상업주의 시대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서태지 이전의 대중음악이 자기 어법을 무기 삼아 보편적인 예술성을 지향했다면, 서태지 이후의 음악 산업은 오로지 기획 상품을 통한 이윤창출의 도구로 음악을 변형시킨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대형음반제작사는 음악 산업을 철저하게 자본 논리로 전환했고, 지금도 무수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아류작을 재생산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아이돌 산업의 표준 모델이 되고 만 것이다.

  

  

90년대는 문화 권력으로 불린 서태지와 아이들과 더불어 작가주의를 지향한 뮤지션들 또한 지지를 받았고 어덜리 컴포넌트가 꽃을 피운 시대이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도 상업적으로 윤택했고, 한국 음반 산업의 절정기를 이뤘다. 뮤지션들이 존경한 윤상, 새로운 록을 시도했던 강산에, 한국 모던 포크를 이끈 김광석과 안치환,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걸은 이상은과 장필순 그리고 이소라, 한국 펑크의 시작을 알린 삐삐밴드는 눈여겨볼 만한 작가들이다.     


염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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