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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1호] 미술이야기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은 서로 대척 지점에 서 있는가, 아니면 서로 상보적 관계인가에 관한 물음과 답변은 세 진영의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이 된 지 꽤 오래다. 아주 먼 중세시대부터 근대 시기에 이르기까지 이 영역에 대한 구분이 그리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또 우주를 비롯한 인간영역에 관한 탐구에 과학의 힘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부터 나머지 철학과 예술의 영역은 신비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다. 아마도 오랜 관습처럼 과학은 비판적 이성을, 예술은 감성을, 철학은 진리의 정립을 대변하는 영역으로 고착됐다. 과학은 이성의 영역으로 비판적 이성, 합리성, 논리성 등을 이에 반해 예술은 표현의 영역으로 비이성, 비논리, 경험-체험적으로 말이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와 예술가, 철학자가 이러한 경계에서 서로 자기의 영역만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진행형의 과학과 예술의 융합, 인문학, 철학과의 융합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부정적 견해가 도출되는 것도 어찌 보면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는다. 앞서 제기했듯이 과학만이 세계-진리를 탐구하고 경험세계를 증명한다거나 예술만이 세계-현상 너머의 비가시적 세계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그래서 과학은 현실 세계이고 예술은 현실 너머라는 이 신화적 가설을 우리는 왜 아직도 신봉하고 있을까?
과학과 예술, 철학은 시대적 요청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 필요 때문에 발생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이다. 단지 보이는 방식 또는 우리 세계를 열어 보이는 방식의 다름과 차이에 의해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인식과 관습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어져 온 고전적 예술론, 예술은 세계의 모방이자 재현이라는 틀에 구속되어 있다. 플라톤은 예술을 이데아의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여 부정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을 통해 배움과 즐거움을 얻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하며 긍정했다. 이런 점에서 모방이란 실재의 충실한 복사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인식과정까지 포함하는 재현성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으로서의 예술론은 20세기의 리얼리즘에까지 이어졌고, 현재에도 예술을 이러한 재현과 모방의 틀에서만 파악하려는 태도가 있다(비록 서양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오늘 우리의 고민도 이러한 기원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태도가 고유한 영역, 정체성과 순수성을 강조하게 되고, 융합할 수 있음보다 없음에 치우쳐 타 학제의 특성을 수용하여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제한시켜왔다. 특히, 과학, 철학과 달리 이미지 사유를 시도하는 혹은 제시하는 예술을 재현과 모방이란 이해의 틀 속에 국한할 경우 대상-세계에 대한 재현 또는 개인의 사적 세계에 대한 표현으로만 한정하게 되고 의무와 책임 같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한다. 과학과 철학, 예술의 순환적 사유가 열어준 세계가 인류 문화사의 흐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상기해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철학, 예술적 사유에 대한 갈림길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는 질 들뢰즈의 책 한 권을 예술학도에게 추천하며 간단히 그 중심내용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 경험이긴 하나 젊은 예술가의 고민해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철학이, 과학이,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이 저서에서 예술과 철학은 과학과 더불어 사유의 다른 양상들이며, 이들은 “두뇌가 카오스에 잠겨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들, 세 개의 구도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예술을 감각 존재로 정의하며 기존에 취급되어 온 고전적 예술 방식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가름할 수 있는데 첫째 예술은 그것을 만들어낸 주체의 반영으로 취급하는 것과, 둘째 예술을 지시대상, 즉 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두 문제는 예술을 재현으로 보는 방식으로 한데 엮여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재현으로서의 예술론과 단절을 시도하며, 예술이 어떤 주체 혹은 대상과 관련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주체의 세계-표상 능력이 아닌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신체의 감각, 타자와 관계 맺는 사건을 통해 발생하는 감각을 강조한다. 그리고 들뢰즈에게 예술로 사유한다는 것은 카오스와 대결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의 구도를 설정하는 것이고 카오스로 침잠하여 카오스로부터 하나의 구도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유의 양상이 바로 철학, 과학, 예술이다. 그러므로 예술을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개념의 도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카오스로부터 구도를 끌어내는, 카오스와 대결하는 철학과는 다른 방법론을 보여주는 사유로 이해해야 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개념을 통해 혹은 기능이나 감각을 통해 사유한다는 것이며, 또 이 사유 가운데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든가 충실하다고 혹은 완벽하거나 종합적인 ‘사유’라고 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란 다양한 진리에 대한 숙고나 성찰로부터 출현한다. 다양한 진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일된 개념적 공간을 마련하는 데 있다. 과학 역시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주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혁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진리를 직시하게 하고 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 철학과 예술은 이 과학이 열어 보여준 세계를 긍정하며 그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철학적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철학과 예술이 과학이 열어놓은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은 이 두 영역이 그동안 모든 과정을 새로이 숙고해야 하는 엄청난 시련과 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우리 시대의 철학은 이러한 응전의 태도에서 한발 물러서 있으며 예술 또한 철학의 입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고, 그동안 직감과 관조의 태도에서 비롯된 모든 인식은 비밀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확연한 사건으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명료함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철학과 예술에 있어 개념의 재설정을 초래하고, 사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는 예술작품에 있어 구상적인 것들, 반복적이고 전통지향적인 습관을 몸으로부터 지워낼 수 있게 하며 결과적으로 예술은 스스로 그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현재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은 기교를 탈피하고 구상적인 것, 재현적인 것들과 단절하는 방식을 열어주고 또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반화된 개념을 재정립하거나 확인하는 것을 사유라고 오인해왔다. 예술작품에서도 무엇과 닮음 혹은 완성된 본을 따르는 재현이란 방식은 어떤 사조나 이념, 이데올로기, 패러다임에 종속되어 추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을 통한 사유란 이러한 틀들을 낱낱이 풀어헤쳐 가면서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는 창발성을 중심으로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감각을 사유의 실마리로 삼아 시작하는 것이며, 전통적 개념을 풀어 헤치고 각각의 함수들이 가진 특성을 발견하며 그것을 감각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