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1호] 대전 · 충남문인탐방

한성기 시인의 대표작 「역」이 발표된 것은 1952년이다. 한 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여전히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역」이 새겨진 그의 시비는 대전문화예술센터(구 대전시민회관) 앞에 외롭게 “없는 듯 있는 듯 /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세워져 있다. 시인은 늘 외로웠다. 분단, 실향, 부인과의 사별 등이 그에게 지독한 고독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이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끊임없이 ‘산’이나 ‘바다’로 떠나야만 했고, ‘둑길’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김천 용문산으로, 서해로, 유성의 둑길로 이어지는 그의 외로운 삶의 여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한성기 시인은 1923년 4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 광덕면 장동리 82번지에서 부친 한탁영(韓鐸英)과 모친 이만길(李萬吉) 사이에서 4남 5녀 중 3남으로 출생한다. 그는 한학을 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글씨 공부를 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도 자신처럼 한학이나 글씨를 하며 지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를 가르쳤다. 정평이 큰 도시 함흥시와 흥남시에 인접해 있지만, 그의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였다. 외딴집이었던 그의 집에 종종 호랑이가 출현해 개를 잡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우리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5살 때인가(?) 어머니께서 호랑이가 나타났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찌놈, 찌놈’ 하셨지요. 방문의 작은 유리문으로 내다보았더니, 마당에 큰 호랑이가 있더군요. 그 이튿날 보니, 개 한 마리를 물고 갔더군요. 이것이 가장 어렸을 때 기억이지요.”라고 술회한 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사실과 개 한 마리를 잡아간 사실 모두 시인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향의 지리적 조건은 자연을 사랑하고 시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1937년에 그는 정평소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가족도 함흥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유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우던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더욱 매진한다. 영어나 수학보다도 더 흥미를 느꼈을 정도였다. 시인은 「나의 이력서」에서 “남들이 영어나 수학을 푸는 동안 나는 글씨 공부만을 했다. 그래서 영어나 수학은 겨우 낙제점수를 면했던 것 같다.”라고 언급했으며, 심지어는 일본에 수학여행을 가서도 “어디 구경 한번을 제대로 못 했다. 붓과 먹과 종이를 사서 오기가 바빴다. 그야말로 <광(狂)>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글씨’에 푹 빠진다. 그러나 그가 1940년에 함흥사범학교에 진학한 것을 보면 글씨 공부 외에 다른 과목도 열심히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범학교는 인기가 높아 거의 수재들만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범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한 그는 1942년에 충남 당진군 합덕보통학교로 첫 발령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시인은 충청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 연고도 없는 당진에 혈혈단신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후 당진 합덕중고등학교로 전출하여 서예와 국어를 가르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해방 정국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분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좌우 이념의 골은 점점 깊어져 첨예한 대립 양상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양상은 남북이 분단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증폭과 그에 따른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배가를 수반하게 된다. 이때 그는 혈육애와 향수에 대한 연민으로 인하여 파생된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서를 하게 된다. 오로지 외로움과 향수를 달래기 위한 독서였다.

이렇듯 외로움과 향수에 시달리던 그는 1947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내를 맞이하게 되고 이듬해에 딸까지 얻게 된다. 그리하여 외로움과 향수라는 트라우마를 일정 정도 치유하게 된다. 또한, 그는 1947년에 당진 합덕중학교에서 대전사범학교로 부임하여 초등학교 선생을 배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딸과 함께했던 이 시기가 시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6.25 한국전쟁과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깨지고 만다. 전자는 혈육을 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과 절망감을 가져다주었고, 후자는 분단으로 인한 고독감과 향수를 더 느끼게 했다. 특히 아내의 죽음은 그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공허감을 동시에 수반하였다.

“아내가 시름시름 누웠다. 처음에는 예사 감기거니 했는데 기침소리가 이상해서 진찰을 받았더니 폐가 나쁘다고 했다. 고교시절 폐를 앓는 여자를 사랑했으면 할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조금 당황해졌다. 병세가 기울어가면서 나는 초조했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앞이 캄캄했다.”
처음에는 아내의 증상을 가볍게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시인은 아내가 각혈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하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시인은 당시 이러한 슬프고 막막하고 캄캄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 10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글씨를 버리고 하루아침에 시에 빠져든 것이다. “시(詩)에의 야릇한 매료……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미칠 것 같은 그때 내 정신상황을 나는 한마디로는 말 못한다.”(<앞이 캄캄해서>)라고 그가 술회한 것처럼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시를 쓰는 일만이 그 “구렁”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시인은 믿었던 것이다.

  

  

우연한 순간

  

  

꽃병은 울며 돌아 앉은 너의 모습. 가까이 가
서 그 가녀린 어깨를 툭툭 치고 보면 벌써
너는 굳어버린 하나의 병이 된다.

  

  

꽃병 속에 불어 넣은 것……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들 죽어간 사람으로 굳어버린 속에서 피
어나는 꽃이 아닐까?

  

  

- 「꽃병 <2>」 부분

  

  

시인은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보고 사별한 아내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죽은 아내를 많이 닮은 꽃병을 시인은 건드려 보지만 이미 그 병은 “굳어 버린” 상태였다. 차안(此岸)의 세계에 있는 시적 화자와 피안(彼岸)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아내가 서로 만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굳어버린 꽃병을 꽃이 살아나게 하듯 시를 통해 아내와 만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이처럼 그에게 시 쓰기는 죽은 아내와의 보이지 않은 만남이고 대화였다.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으로 시작된 시 쓰기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일정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유일한 문학잡지였던 『문예』(1952년 5·6월호)에 투고하여 모윤숙 시인에게 초회 추천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 작품이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역」이다.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 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역」 전문

  

  

아득한 선로 위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간이역과 같은 시인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당시 모윤숙은 <시천후평(詩薦後評)>에서 이 시를 “버릴 것을 다 버려버린 간결하고 압축된 이메-지가 좋았다.”고 평하고 있으며, 아울러 천상병, 박양균 시인 등과 더불어 “우리 시단의 새로운 별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였다. 초회부터 호평을 받은 한성기 시인은 이후에도 ‘간결하고 압축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듬해 9월에 2회 추천받게 된 <병후(病後)>에 대해 모윤숙 시인은 “평범하고 단조로웠으나 이미 틀이 잽히기 시작한 안정된 자세를 사주기로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시인은 1955년 4월에 『현대문학』을 통해 박두진 시인에게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박두진 시인은 “조용한 관조에서 오는 나직하나 청순한 조그만 경탄”을 포착하는 안정된 면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감성의 섬세성과 밀도와 온기를 잘 간직하며 발전”시켜 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시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시인은 이후 『현대문학』을 비롯한 문학잡지에 많은 시를 발표하게 된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고독과 막막함, 그리고 그리움 때문에 시작된 시 쓰기가 하나의 생활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사별한 후 다가온 고독감이 재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고 하여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 가지고도 채울 수 없는 공허”를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공허함은 죽은 아내의 빈자리에서 오는 고독과 허무 의식이었고, 민족분단에서 파생된 ‘실향’에서 오는 그리움이었다. 시인은 이러한 고독과 허무 의식, 그리고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술에 의해 망각된 기억들이, 술이 깨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그는 그 현실을 다시 잊기 위해 술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렇듯 술을 가까이 한 연속적인 생활에 의해 건강을 잃게 된 그는 결국 병상에 눕게 된다. 술로 그것들을 치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추풍령 용문산 기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속세를 떠나듯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놀랍게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이곳에 도착한 뒤 숙면을 취하게 된다. 인간 세상에서 얻은 마음의 병은 곧 탈속의 세상에서 치유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추풍령에서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는 기도를 드리고 조석으로 예배에 참석하며 지난 일들을 반성하게 된다. “절름발이 문둥이 폐결핵자(肺結核者)들 / 틈새에 앉아 기도를 드리면서 / 하루 아침엔 몹시 울었다. / 그 울음의 조금은 서러웠고 / 조금은 고마웠다.”(「특별기도」)라고 노래하는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절름발이, 문둥이, 폐결핵 환자들과 함께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나무 밑에서는 기도하고 밤에는 강당에 모여 “참회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몇 년 동안 혹사했던 육체와 정신이 점차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기 시작한다.

1963년 3월에 그는 대전 사범 동문들의 도움으로 첫 시집 『산에서』(배영른사)를 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5년간의 투병생활을 끝내고 하산하게 된다. 몸과 마음을 추스른 그는 생계를 위해 충청북도 영동군 황금면 추풍령리에서 ‘추풍령 문구점’을 차린다. 그러나 평소 교직 생활과 시 쓰는 일밖에 모르던 시인이 운영하는 이 가게는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1965년에는 제9회 충남도 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는다. 그리고 1968년에는 조치원으로 이사하게 된다.

시인은 1969년에 제2 시집 『낙향 이후』(활문사)를 펴낸다. 첫 시집 『산에서』에서 뽑은 시와 개작한 시, 그리고 첫 시집 이후 발표한 신작시를 묶어 발간한 것이다. 이후 조치원 생활을 접고 대전 유성으로 이사하여 ‘로타리 제과점’을 운영하게 된다. 대전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어 다시 제2의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많은 문인을 만나 지역문학에 대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좋은 작품을 쓰고도 중앙의 문단에 의해 홀대받거나 소외된 문인들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재능있는 작가를 문단에 등용시키는 일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중책인 ‘한국문협 충남지부장’을 맡게 된다.

  

  

1972년 세 번째 시집 『실향(失鄕)』(활문사)을 출간한다. 당시 한성기 시인과 친분이 두터운, 그리고 당시 『현대문학』을 주관하던 조연현 평론가가 <서(序)>를 맡았는데, 그는 그곳에서 한성기 시인은 “내가 즐겨 읽는 몇 사람밖에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고 그의 시 중 「둑길」에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

  

  

매년같이 둑길을 걸었다. / 벌써 4년째 // 어떤 때는 먼 산만 바라보며 / 어떤 때는 발 밑만 바라보며 // 당분간 내가 살아가는 / 방법은 이것뿐 // 당분간 내가 살아가는 / 방법은 이 둑길을 걷는 일 뿐 // 처음에는 심심해서 걸었다. / 다음에는 습관이 돼서 걸었다. / 다음부터는 즐거워서 / 걷는 둑길 // 둑길에서 만난 사람은 별로 없었다. / 둑길에서 만난 사람은 / 간혹 낯설은 햇살 // 열심히 둑길을 걸으면 / 나는 사람이 보일 것 같아서 // 열심히 둑길을 걸으면 / 나는 지구의 끝이 보일 것 같아서                   

 -「둑길Ⅶ」 전문

  

  

‘둑길’을 걷게 된 이유가 잘 나와 있는 시이다. “당분간 내가 살아가는 / 방법은 이 둑길을 걷는” 것이라고 밝힌다. 처음에는 “심심해서” 걸었고, 그다음에는 습관이 되어서, 나중에는 “즐거워서” 걸었다. 둑길을 열심히 걸으면 “사람이 보일 것 같아서” 시인은 지속해서 걸은 것이다. 그는 그가 사는 유성에서 진잠 방향으로 “애인” 만나러 가듯 거의 매일 둑길을 걸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 세상”에서 빗겨서서 “서서히 도는 / 둑길”(「둑길Ⅵ」)을 유유히 소요유(逍遙遊)하듯 걸은 것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때문에 시인은 그것을 달래기 위해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자리이동을 해야만 했다.
『실향』이 출간된 지 3년 만인 1975년에 제4시집 『구암리(九岩里)』(고려출판사)를 출간한다. 구암리는 당시 시인이 살던 마을 이름으로, 현재는 유성구 구암동으로 되어 있다. 시골로 내려온 그는 이후에도 줄곧 길을 걷는다. 시인이 <자서>에서 “길을 걷는 일이 즐겁다. (……) 햇살의 범벅, 바람의 범벅, 시골은 내 시의 고향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골 길을 걸으며, 그 길을 햇살과 바람, 나무 등과 “범벅”이 되어 동행했다. 그곳은 그리운 것들이 다 모여 있는 시의 고향이었다. 이 시기 시인은 제12회 한국문학상을 받는 기쁨을 맛본다.

태안에서 2년 정도 머무른 시인은 1978년에 충남 논산군 두마면 신도안(현 계룡시)으로 이사를 하고, 다시 1년 후에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진잠) 168-1로 거주지를 옮긴다. 이때 나온 시집이 다섯 번째로 낸 『늦바람』(활문사)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바람을 통해 길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길’의 의미까지도 읽어내고 있다.

1982년에는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다섯 권의 시집에서 선별한 시와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를 모아 제2 시집과 같은 제목인 『낙향 이후』(현대문학사)를 간행한다. 그리고 이 시기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평론가 조연현을 기리는 제1회 조연현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성기 시인은 1984년 4월 17일 뇌일혈로 타계한 뒤 대전시 동구 직동 대청댐이 내려 보이는 기슭에 안장된다. 그리고 1987년에는 대전연정문화회관(구 대전시민회관) 앞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시인의 아들 한용구 목사가 “아버지는 외로웠다. 그것은 그리움 때문이었다. 고향이 그리웠고 친척이 그리웠다. 사람이 그리워서 길을 걸으셨다. 길을 걷다가 사람을 만나고 물소리를 듣고 자연을 온몸으로 묻혀와 시를 쓰곤 하였다.”라고 술회한 것처럼 시인은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산과 둑길을 걸었으며, 바다를 거닐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대전, 충남지역문학의 발전을 위해 정열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의 호서문학을 이끌었고, 이 지역 문인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한성기 시인은 정훈, 박용래 시인과 더불어 근현대 지역문학의 한 축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둑길의 시인’이라 불리는 한성기 시인이 거닐었던 호젓한 둑길을 소요유하듯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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