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4호] 빈 들판에 서다



 
 
 
들판에 서 고개를 들다
들판을 꿈꿨다. 경기도 평택, 평범한 옛 어르신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해야 할 것들, 마땅히 그래야 할 것들, 포기해야 할 것들 사이에서 방황했다. 예술, 연극이란 요원한 것이었다. 
연극과 관련된 기억이라면 두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국민학생 시절, 시장에서 봤던 여성국극 그리고 처음 올랐던 연극 무대다. 오일장에서 약장수들이 약을 팔면서 막간을 이용해 여성국극을 올렸는데,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배우들을 막연하게나마 동경했던 것 같다. 그리고 5학년이던 해 어버이 날 열었던 학예회 연극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다. <검사와 여선생>에서 재판장 역을 맡고 싶었지만, 돌아온 역할은 순사였다. 
“여주인공이 범죄 행위에 연루되는 그날 밤에 순찰을 하는 순사 역할이었어요. ‘여태까지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한 마디짜리 대사였어요. 재판장 역은 억울하게도 하지 못했어요. 그때만 해도 치맛바람이 있던 때여서, 저보다 연기를 못하는 친구가 그 역할을 맡게 됐어요. 평생 살면서 억울했던 일 중 하나예요.”
두 기억을 제외하면 연극을 접한 적이 없다. 평택에는 연극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유치벽 대표가 관심을 가졌던 건 소설이다. 대학 입시 재수를 하며 지냈던 서울 하숙집 옆방에 시를 쓰는 친구가 살았다. 함께 술을 마시고 친구는 시를, 유치벽 대표는 소설을 끄적이며 1년을 보냈다. 처음 느끼는 해방감에, 공부가 아닌 하고 싶은 다른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연극을 떠올렸다.
대전 숭전대학에 입학해 학과 공부 대신 연극 동아리 활동에 전념했다. 축제 때만 모여서 연극을 하던 선배들이 숭맥 극회를 결성해 활동 거점을 만들었고 유치벽 대표가 초대회장을 맡았다. 학교를 벗어나 바깥 무대에도 나가 극단 갈채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대전에 연극계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기기 전이라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배우를 했던 때였다. 극단 갈채 단원으로 처음 올린 연극은 <이수일과 심순애>다. 이수일의 친구인 백낙관 역할을 맡았다. 1977년이었다.

 
나를 찾는 진짜 게임
장남으로서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드러내는 일에는 영 서툴렀었다. 어머니가 명절 빔이라도 사 준다고 하면 ‘내 것은 사지 말고 동생들이나 사 줘요.’라고 말하는 게 당연했고 부모님은 ‘역시 우리 장남은 달라.’라는 칭찬을 자랑으로 했다. 
연극 배우로 무대에 서는 것은 숨겨 놓았던 욕구, 욕망을 표출하는 한 수단이었다. 연극은 단순한 동아리 활동이 아니었고 취미 생활이 아니었다. 이를 알게 된 부모님의 걱정이 만만치 않았고 유치벽 대표 또한 연극이 쉽지 않은 길임을 알았기에 선택의 갈림길에 오래 서 있었다. 
“제대 말년쯤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연극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남들처럼 전공 살려서 직장을 구해 살아야 하는 건가 하고요. 그런데 <바람과 라이온>이라는 영화를 보고 결정했죠.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신은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고 있냐.’라는 질문에 주인공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가기 때문에 나는 제법 행복하다.’라고 한 대사가 마음에 꽂혔어요.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1983년에 제대해 이듬해부터는 아예 바깥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도 그만두었다. 자신의 욕구, 욕망에 충실한 날들이 시작됐다.
“연극은 가짜 게임이에요. 꿈과 비슷한데 꿈보다 편하죠. 꿈속에서는 내가 나지만, 연극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마스크를 쓰고 연기하니까요. 처음 연극 시작할 때는 분장하는 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어요. 나를 숨기고 연기하는 게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내가 연기하는 게 나 자신이란 걸 알게 됐죠. 내 안에 선한 면, 경건한 면, 추한 면이 전부 있는데 어떤 역할을 맡을 때마다 그 잠재된 면을 꺼내는 거죠. 숨겨진 욕망과 욕구의 그림자를 끄집어내 양지에서 달래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짜인데 가짜가 아니에요.”
연극이 시작되기 전, 설레는 느낌은 자유였다. 무대에서는 자유로웠다. 조명이 솜털로 다가와 모공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느낌, 소름 끼칠 정도의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과 소통하고 관객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느낌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순간, 그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지점이었다. 

51%의 행복, 49%의 무엇
1985년부터는 극단 앙상블에서 활동했다. 연극배우의 삶은 건강한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여러 욕망, 욕구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그 삶을 쉽게 지속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기대 속, 장남 트라우마를 떨칠 수 없었고 점점 평택 집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명절 때면 연극 하는 사람들과 낚시 일정을 잡았다. 집에 올라간들, 안 좋은 소리만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유치벽 대표는 달팽이 집 하나를 꿈꿨다. 자신의 몸 하나 편히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다면 연극 이외에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달팽이 집 하나 갖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나는 정말 치열하게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데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힘들었죠. 당시 극단에서 달세를 내 줘서 여인숙에서 살 때였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밤에 돈을 주우러 거리에 나왔어요. 대흥동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결국 못 주웠네. 그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 관통했어요. 그래도 51%의 행복이 늘 있었고 동지들이 있었으니까 지낼 수 있었어요. 내가 택한 길이 쉽지 않다는 건 처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연극이 나에게 51%의 행복을 주지 않는다면 떠나리라고 생각했었죠. 떠나지 않은 건 연극이 항상 51%의 행복은 담보해 줬기 때문이에요.”
연출도 시작했다. 유치벽 대표는 당시에 임영웅 연출가(산울림극단 대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상한다. 서울의 연출가와 지역 연극인들을 매칭해 작업하는 사업을 함께하면서, 유치벽 대표는 임영웅 연출가가 작품을 분석하고 배우와 소통하는 것에 놀랐다. 제법 오랜 시간 연극배우를 하면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배우가 세 발짝 걸어간 다음 멈추고, 어디서 턴 할지, 시선은 어디에 둘지, 꼼꼼하게 분석하는 거예요. 그분의 연출 방법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때는 그렇게 꼼꼼하게 작품을 분석하는 데 놀랐고 많은 것을 배웠어요. 연출이 무엇인지 알게 됐죠. 그리고 그때부터 선배들에 대한 불신이 커졌어요. 젊은 애들 가슴에 배반의 싹이 싹튼 거예요.”
처음 연출한 작품은 <아일랜드>, 1986년에 극단 앙상블에서 올린 작품이다. 무대에서 연기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 줬지만, 연출은 달랐다. 박수를 받기보다는 비난을 받는 일이 연출이었다. 작품을 해석하고 전체를 제어하는 연출은 쉽지 않았고 쉽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생 끝에 무대에 올린 <아일랜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 배우는 하지 않고 연출을 맡았다. 치열했던 시절이었다. 대전에 극단이 몇 개 없던 때, 극단 대표끼리의 카르텔이 있었다. 한 극단에서 연기하던 배우가 다른 극단에 들어가고 싶어 하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치벽 대표와 몇 동료는 당시 극단 대표들의 연극과 극단 운영 방식 등에 동의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따로 나와 1991년에 극단 금강을 차렸다. 
선배들은 ‘쟤들 얼마 못 가.’라는 질시의 눈으로 극단 금강을 바라보았다. 몇 개월도 못 버티고 끝날 거라고 했다. 돈 한 푼도 없이 만든 극단이었다. 연습실도 운 좋게 누가 그냥 빌려준 곳을 얻어 제작비도 없이, ‘그냥’ 연극 했던 시절이었다. 유치벽 대표는 극단 금강에서 상임 연출로 10여 년간 연출 생활을 이어 갔다.
당시 극단 금강은 연극인이 가장 주목하는 극단이었다. 부자유하고 억압된 것이 많았던 그 시절, 극단 금강은 작품으로 사회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따사로움을 찾아가는 길
시간은 흐르고 극단 금강 동인들의 생각이 자연스레 서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 극단 금강을 나갔고 유치벽 대표도 극단을 나와서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 연출을 원하는 극단은 없었다. 극단들이 연출료를 주고 객원 연출을 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극단 대표들이 연출 겸 배우였다. 유치벽 대표에게 들어오는 연출 의뢰는 없었고 가끔 배우 섭외가 들어왔다. 그렇게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 극단 빈들을 만들었다. ‘빈들’은 빈 들판을 뜻했다. 무언가를 채워나갈 빈 들판을 그의 무대로 생각했다. 극단 빈들에서 그가 추구하는 연극은, 예전의 것과 달랐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이 느껴졌다.
“나이 든다는 건 호흡이 달라지는 거예요. 빠른 템포의 연극은 배우로도 할 수 없고 연출로도 할 수 없어요. 느끼는 점이 달라져요. 젊었을 때는 주제 의식이 강하고 갈등이 짙은 작품에 끌렸다면 지금은 평범한 것들이 와 닿죠. 나이 들수록 평범한 대사의 힘을 알게 돼요. 어르신의 탄식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삶이 농축돼 있는지 아는 배우들은 평범한 대사를 하기 시작해요. 
극단 빈들은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삶이 팍팍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리고 아픔 속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다. 최근에 올린 <늙은 부부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 있다. 
부인인 정현주 배우와 함께 부부 역할을 한 <늙은 부부 이야기>는 유치벽 대표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다. 현재 신장 투석을 받고 있는 그가, 투석을 받으며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본 것이다.
“처음에 투석해야 한다고 했을 때 먼저 떠오른 게 연극이에요. 작년에 투석하기 바로 전에 <배꽃동산>을 하면서 아픈 상태에서 연극이 가능한지 봤고 올해 <아파트 놀이터에서 생긴 일>을 하면서 투석하면서도 연극을 할 수 있는지 봤고 이번 가을에 <늙은 부부 이야기>를 하면서는 한 시간 20분을 한숨도 쉬지 않고 연극 하는 게 가능한지 봤죠. 해 본 결과 가능하더라고요. 다행이었어요.” 
정현주 배우는 유치벽 대표가 신장 투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을 걱정했을 뿐, 큰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에게 연극이, 무대가 지니는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늙은 부부 이야기>는 달랐다. 한 시간이 넘게 긴 호흡으로 극을 이끌어야 했다. 부부는, 열하루만 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오른 무대였다.
“<늙은 부부 이야기> 해 보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면 앞으로는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역을 맡는다고 했죠. 그것도 안 되면 연출만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열하루 동안 무대에 서면서 괜찮았어요. 물론 조심해야 하고 견뎌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항상 최악을 대비해 연습해요. 가장 안 좋은 날을 대비하는 거죠. 물론 그날그날의 영감으로 하는 연극이 좋은 연극이죠. 그런데 그게 안 될 때는 연습의 힘으로 기계적으로라도 해 줘야 상대방이 자연스레 영감을 갖고 할 수 있어요.”
죽을 때까지 연극 하는 게 꿈이다. 무대에 꼭 올리고 싶은 작품도 있다. <황금 연못>과 <노인과 바다>다. <노인과 바다>는 젊은 시절, 힘들 때마다 읽었던 소설이다. 몇 달간 한 마리도 잡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바다를 대면하고 꿈을 꾸는 노인. 유치벽 대표는 노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노인 역할로 온전히 한 시간 10분, 20분을 버틸 수 있을지는 생각해 봐야죠. 어려울 것 같으면 방법을 찾아 봐야죠. 내가 노인을 맡고 헤밍웨이를 등장시켜서 다른 사람이 맡는 거예요. 둘의 치열한 삶을 보여 주는 데 포인트를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올해 대전연극협회장 임기를 마치고 나면, 내년부터는 제2의 연극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온갖 부조리함과 끔찍함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것이다. 따사로움을 발견할 것이다. 51%의 행복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글 사진 성수진(ssj2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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