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1호] 취백정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9호)

취백정에 오르는 길에 제일 먼저 마중나온 것은 ‘샤사삭’거리는 대바람 소리였다. 대나무와 감나무가 만든 짧은 터널 너머로 보이는 ‘취백정’의 모습은 고즈넉하다.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풍경이다. 저리로 넘어 가기 전, 손발과 얼굴을 씻고 옷을 추스려 정갈하게 만든 후 불손한 생각마저 모두 떨치고 나서야 발을 뗄 수 있을 것만 같다. 취백정 정문과 아랫집 사이 경계를 이루는 돌담은 반듯하고 나뭇잎 그림자가 모노륨처럼 깔렸다. 무심히 지나가면 안이 보이지 않지만 작정하고 붙어서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딱 그 높이 담장 너머로 취백정 안을 살핀다. 세월에 트기 시작한 나무 기둥과 마룻바닥이 세월을 말해준다. 생뚱맞게 놓아 둔 붉은 색깔 소화기가 자칫 놓쳐버릴 수 있는 현실감을 붙들어 준다. 그마저 없었다면 넋놓고 바라보다 300년 전 어느 순간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다.

취백정(翠白亭)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다. 대전광역시 미호동 188번지에 있다. 벌말이라는 마을이고 주민이 장판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둔덕 위다. 그 학문이 뛰어나 송준길, 송시열과 함께 3송(三宋)으로 불리는 제월당 송규렴이 1701년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후 아들 송상기가 다시 지었다는 설명이 있는데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1961년과 1969년 공적자금으로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한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있었다. 취백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이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송규렴은 대덕구 읍내동에서 태어나 송준길에게 공부하고 효종 5년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당파 갈등에 평탄하지 않은 관직 생활을 보냈으나 대사헌, 대사간,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80세 때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당시 돈령부는 왕의 친족과 외척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던 부서로 지돈령부사는 정2품 관직인 지사다. 취백정에 본래 정조 어필로 사호각(四皓閣)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사호(四皓)는 상산사호(商山四皓)에서 온 말로 본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무 소장은 이 상산사호가 지혜로운 네 노인의 집단지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한다(한국일보 2014. 9. 28).

상산사호에서 호(皓)는 희다는 뜻도 있지만 백발, 혹은 노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진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상산로에 들어간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 네 노인을 일컫는다. 이들은 천하에 소문난 현자였다. 이에 연유해 사호각이라는 현판을 내렸다면 송규렴을 이들 상산사호에 버금가는 현자로 존경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같은 미호동 벌말 취백정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이는 미호서원 부속 건물로 취백정을 설명한다. 1718년 송규렴을 기리기 위해 지은 미호서원이 취백정보다 뒤에 지었는데, 부속 건물이라 설명한 것이 좀 이상했다. 건립 선, 후에 상관없이 하나는 송규렴을 기리는 서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니 서원 쪽에 더 무게감이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는 있겠다. 하나 더, 문화재청은 취백정 건물 안에 송규렴이 지은 미호신사(渼湖新舍) 상량문이 걸려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취백정, 미호서원, 미호신사. 이것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미호서원은 훼철되어 사라지고 서원터에 취백정만 남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서원 터가 취백정을 포괄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취백정에서 미호서원터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300m 정도 떨어졌다. 그러다 인터넷 매체인 굿모닝충청에서 김정곤 전통예절 및 향토사학연구가가 쓴 글을 접했다. 이 글을 통해 김정곤 씨는 취백정에 얽힌 세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취백정 본래 이름은 미호서원이라는 얘기였다. 현재 불리는 취백정은 송규렴의 증손자인 송재희의 아호로 그가 이 현판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송재희 호는 사호각이다.

김정곤 씨는 조선왕조실록(영조48·1772)에 임금이 기로과 출신 4인이 승원에 있다하여 어필로 ‘사호각’ 석자를 내렸다는 기록과 이 어필을 승정원에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정조가 쓴 사호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재희의 호가 사호각이었던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도 나온다. 다만 이 자료에는 송재희가 임금으로부터 직접 호를 받은 것으로 설명한다.

“용모가 기이하고 컸으며 담소하는 것을 즐겁고 편안히 여겼다. 정신은 물과 달처럼 맑아 연하와 같은 기상이 표연하게 세속을 벗어난 모양이 있었으므로 임금으로부터 ‘사호각’이라는 호를 받았다.”

명쾌하지는 않으나 ‘취백정’과 ‘사호각’ 모두 송규렴이 아닌 그의 증손자 송재희와 관련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사호각’ 어필 또한 김정곤 씨 주장대로 정조가 아닌 영조가 쓴 것일 확률이 높다. 여기서부터 다양한 추정이 가능하다. 승정원에 걸려 있었다는 어필 현판 ‘사호각’은 송재희와의 관련성 때문에 이곳 취백정에 얽혀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해결하고 추정을 분명한 근거에 맞춰 고증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취백정은 300여 년 전 그 자리에서 모양은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쉼없이 흐르는 금강물줄기를 바라본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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