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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1호] 보은군특집
보은군청이 자리한 보은읍 주변 말고는 산과 강, 길이 복잡하게 났다. 같은 보은 안에서 움직이는데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니 고속도로가 나온다. 애먼 내비게이션을 탓하며,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고도 구불구불 산 따라 가는 길이 마치 다른 도시에 가는 기분이다. 보은군 장안면에서 고속도로 통행료 1,300원을 내고 회인면으로 갔다. 영험한 기운이 흐르는 ‘사직단’이 놓인 회인면 중앙리, 아마도 그 영험한 기운을 타고 태어났을 오장환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사직골’을 여행했다.
움푹 팬 것처럼 오도카니 놓인 작은 마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마을 사람들은 사직골, 사동마을로 부르던 작은 마을이다.
시인 오장환이 태어나 열 살까지 살았던 이 마을에는 2006년 오장환 시인이 살았던 생가와 그의 이름을 단 ‘오장환 문학관’이 개관했다. 월북 시인으로 낙인찍혀 1988년 전까지는 대한민국 남쪽 어디에서도 그의 시를 함부로 읽지 못했다. 1930년대 정지용 시인에 이어 ‘시단의 새로운 왕’이라는 칭호를 받던 그는 1947년 말 즈음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며, 1951년 생을 마감했다. 34년 동안 두 권의 시집을 내고, 어지러운 나라를 개탄하는 목소리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일제를 찬양하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오장환 시인은 말한다. 참다운 인간으로 참다운 시를 쓰기 위해 사회 면면을 다양한 시각으로 관찰한 그는 ‘신념을 시로 옮기고 시를 행동으로 옮긴 시인’,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시’ 등의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가 태어나 자란 사직골은 현재까지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에 드리는 사단과 곡식의 신인 직(稷)에 드리는 직단을 일컫는 말이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도 의식을 행하곤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에도 ‘사직단은 고을 서쪽에 있다.’라고 회인 사직단에 관해 기록한다.
회인 사직단은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후 방치되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이 사직단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초사흗날이면 마을을 기리는 제를 지낸다.”라고 말한다. 여름에 자란 풀을 아직 손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은 회인 사직단’은 지난 2013년 9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사람의 의지도 대단했다. 문화재 위원 현지조사 때부터 참여해 사직단의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보은군과 관계기관은 사직단 복원 사업을 위해 사직단 터를 매입했다. 영험한 기운이 풍겼을 사직단이 풀로 뒤덮여 있다.
오 부잣집이라고 불리던 오장환 시인의 생가는 입구에서 볼 때 사직단이 있는 언덕을 왼쪽으로 두고 자리한다. 오장환 시인은 아버지 오학근의 두 번째 부인 한학수 여사의 아들이다. 첫째 부인과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으나 아들이 대를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두 번째 부인인 오장환의 어머니를 들인다. 임선빈 오장환 문학관 문화해설사가 오장환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자였지만, 아버지 나이가 꽤 있으셨고 첫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두 누님은 출가한 후였다고 해요. 그래서 보통 생각하는 서자의 설움 같은 것을 겪으셨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으셨겠지요. 1918년 5월에 태어나셨으니까 일제 탄압이 심했던 때였잖아요. 시대적 상황을 보고 많은 고민을 하셨던 것 같아요. 관습을 부정하거나 시대를 개탄하는 시를 많이 쓰셨어요.”
종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일을 안 해도 지내 왔었고 대대손손이 아무런 재주도 물리어 받지는 못하여 종갓집 영감님은 근시안경을 쓰고 눈을 찝찝거리며 먹을 궁리를 한다고 작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하여 살아 나간다.
- 한국대표 명시선 100 『오장환 병든 서울』, 「종가」 부분
퇴락한 유교적 권위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 <종가>에서는 봉건적 인습에 대해 풍자한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종가’라는 낱말만 바꾸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서도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반복되는 역사처럼 오장환 시인의 시 역시 종이 위에 살아 움직인다.
오장환 시인의 작품 중에는 농촌 현실과 농민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많다. 아무래도 고향이 농촌이고,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가 농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큰 논 하나 없는 마을에 학교도 있고, 사직단도 있고, 여러 가지를 보았을 때 추정하는 것이지만, 정말 강한 분들이 살아오셨을 것 같아요. 오장환 선생님도 아마 마을에서 받은 기운이 적지 않았을 테고요. 마을 양쪽으로 큰 고개가 있어서 외지 사람이 많이들 와서 쉬었다 가고, 들락거리는 동네였다고 해요.”
마을 양쪽에 있는 고개는 피반령과 수리티라고 부른다. 수리티는 보은군 수한면과 경계에 있는 큰 고개다. 수리는 높은 산이나 봉우리를 뜻하는 고어로 수리티는 높은 고개를 가리킨다. 피반령이라는 고개 이름에 관해서는 많은 전설이 내려온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보은의 지명』이라는 기록물에서 본 가장 신빙성 있는 전설은 조선 중기 문신 오리 이원익 선생이 경주 목사가 되어 부임 길에 오르던 중 일어난 일이다.
“그때가 음력 6월이었다고 해요. 땀을 뻘뻘 흘리며, 평지를 걸어도 더워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원익 선생이 경주로 가는데 한낮에 고개를 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원익 선생이 서울에서 청주에 도착하니까 경주 호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고 해요. 이 호장이 이원익 선생을 골려줄 마음으로 ‘이 고개를 가마 타고 넘으면 가마꾼이 피곤해 회인에서 3~4일은 유숙해야 한다.’라고 거짓말 한 거죠. 어서 도착해야 하는데, 이게 웬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원익 선생이 내려서 걸어가겠다고 한 거죠. 천천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호장이 히죽히죽 웃는 게 아니겠어요? 호장이 장난친 것을 안 이원익 선생이 ‘내가 걷는데, 너는 마땅히 기어서 넘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을 한 거죠. 피반령이 높지는 않은데, 험하기로 유명한 고개였어요. 고개를 넘어와 보니 호장의 손바닥과 무릎에 피가 철철 흘러서 넘어오는 내내 그 피가 고개에 묻어났다는 거죠. 그래서 고개 이름을 피반령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피반령을 넘고 보은으로 가는 도중 다시 험한 고개에 닿았다. 호장은 이원익 선생에게 또 이 고개를 걸어 넘으라고 하면 닥쳐올 호령이 두려워 수레를 만들도록 했다. 수리티라는 지명은 수레에 선생을 태우고 넘었다고 해서 ‘수리티재’라고 불렸다가 이후 ‘수리티’, ‘차령’ 등으로 불린 것이다. 오장환 시인의 생가에서도 피반령 고개가 보인다. 지금은 고속도로도 함께 보여 묘한 풍경이다. 오장환 시인은 열 살 때까지 회인 공립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회인초등학교가 그곳이다. 학교에 가기 위해 십리 길을 걷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의 생가에서 5~10분 정도만 걸어가면 학교가 나온다. 오장환 문학관에는 오장환 시인에 관한 기억을 증언한 말도 많다. 오장환 시인과 한동네에서 자라 함께 학교를 다닌 최영성 노인은 1917년 태어나 2004년 생을 마감했다. 그는 오장환 시인을 혼자 집에서 놀기 좋아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염성 있고 진실하며, 정직한 사람이었다고도 말한다.
오장환문학관과 생가
회인초등학교 앞 돌담길도 오장환 문학관에 들러 함께 보면 좋은 풍경이다. 『꿈과 희망, 뿌리 깊은 나무 회인교육 백 년사』를 살피면, 학교에서 하는 큰 행사마다 비가 오는 것을 두고 전해 내려온 전설이 있다. 회인초등학교 양복숙 동문은 학교 안에 있던 연못에 용이 되어 승천하려는 이무기가 살았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던 이무기가 때가 되어 용이 되려던 찰나에 학교를 지키던 ‘용인 아저씨’가 용의 꼬리를 잘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용은 승천하지 못했고, 용의 저주로 소풍 갈 때마다 비가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학교마다 하나씩 있을 법한 전설이다. 오장환 시인이 아이들을 위해 지은 동시에는 고향을 추억하며 지은 시도 많다.
누나야, 편지를 쓴다.
뜨락에 살구나무 올라
갔더니
웃수머리 둥구나무
조-그마하게 보였다.
누나가 타고 간 붉은 가마는
둥구나무 샅으로 돌아 갔지.
누나야, 노-랗게 익은
살구도 따먹지 않고
한나절 그리워했다.
- 오장환 시인의 「편지」 전문, 1936년 9월 8일 조선일보 발표
“이 시에서 나오는 ‘웃수머리’가 이 근방의 지명이에요. 누나가 웃수머리 쪽으로 시집을 가던 날을 떠올리며 쓴 동시죠. 위에 숲이 많이 있다고 해서 ‘웃수머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전해요. 당시 ‘살구’는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간식이었거든요. 그 살구도 따 먹지 않고 그리워했다는 표현에서 절절한 그리움이 전달되는 거죠.”
시집 두 권으로 문단의 대환영을 받은 시인, 사회를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과 관찰력, 약자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면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30여 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조국의 분단까지 겪었던 시인은 1947년 10월에서 48년 2월 사이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6.25 한국전쟁 중 그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김광균 시인은 그가 이북에서 지낸 시간을 “끔찍했다.”라고 추억했다고 말한다. 이후 1951년 세상을 떠난 그는 한국문학의 중요한 역사였지만, 남과 북 어디에서도 기록되지 못했다. 이후 1988년 6월, 월북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로 연구와 출판이 허용된다. 89년 <오장환 전집 1, 2>가 출판되고 1996년 제1회 오장환 문학제가 보은군에서 열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장환 문학관과 생가는 2005년 생가복원 및 문학관 건립이 시작되어 2006년 개관했다.
눈물은 바닷물처럼 짜구나
바다는 누가 울은 눈물인가
- 오장환 시인의 「바다」 전문, 1936년 10월 14일 조선일보 발표
마음에서부터 서러움이 복받치고, 애간장이 끊어질 때 우는 눈물이 가장 짜다고 한다. 또르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아닌 얼굴을 거칠게 휘감는 눈물, 삶의 애환이 마음을 휘저을 때 흐르는 눈물이 짠 맛이 더 강한 것이다. 시인은 마음이 찢어지는 울음을 쏟아낸 뒤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시대를 이야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시인,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짧은 생을 살아낸 시인, 그 시인의 시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느냐고.
오장환문학관 입구에 놓인 오장환 시인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