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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1호] MBC 50주년 특집 드라마 제작
해외 올 로케이션 촬영은 많이 들어봤지만, 지역 올 로케이션 촬영은 별로 들어본 바가 없다.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도 내용 일부분만 해당 지역에서 촬영한다. 예를 들면 아주 역사적인 장소, 영화 <26년>의 배경이 된 광주광역시 금남로에 있는 옛 광주도청이나, 영화 <변호인>을 촬영한 대전광역시 대흥동에 있는 옛 충남도청 같은 곳 말이다. 그 외 나머지 촬영분은 서울이나 경기도 인근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편집이나 후시 녹음 등 촬영 이후 작업이 대부분 서울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당연히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촬영하는 것이 배우에게도, 스태프에게도 편할 것이다. 또 지역보다 수도권, 특히 서울은 지역과 비교해 촬영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 즉시 해결할 수 있고,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기도 지역보다 수월하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수도권에서 촬영하는 것이 감독입장에서는 훨씬 좋은 장비를 이용해 멋진 그림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대전에서 이런 제약을 넘어서 지역에서도 드라마 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대전 MBC 창사 50주년 특집 드라마 ‘낡은 기억의 잔해’ 모든 촬영이 대전에서 이루어졌다. 60분 분량의 드라마에는 주인공은 물론 조연 대부분도 대전 출신 배우가 맡아 연기했다. 이뿐만 아니라 최초 지역 올 로케이션 촬영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있다.
드라마 <타짜>와 <시티헌터>를 집필한 진헌수 작가가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고, 대전 MBC와 대전에서 활동하는 제작사 I Box Media(이하 아이박스 미디어)가 함께 했다. 시나리오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당선작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아 드라마를 제작했다.
진헌수 연출가
10월 6일, 오후 3시가 넘어 대전 갈마동에 도착했다. 갈마동 주택 사이에 자리한 충청투데이 사옥과 인근 빌라에서 주인공이 자신과 꼭 닮은 도플갱어를 맞닥뜨리는 장면을 촬영하기로 했다. 이날은 총 10회 차 촬영 중 9회 차로 촬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골목에 들어서자 촬영 스태프가 골목 곳곳에 서서 “죄송합니다. 촬영 중입니다.”라고 외치며 자동차와 사람들 출입을 통제한다. 현장에 들어서니 갈마동 한 빌라에서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진헌수 연출 감독은 작은 모니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오케이 신호를 내린다. 그 옆으로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 감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받아 적는다. 잠시 촬영이 멈춘 듯 보이더니 이윽고 드라마 주인공인 배우 한은정이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빌라 촬영은 모두 마무리가 됐는지 촬영 장비를 하나둘 걷어낸다.
한참이 지나도 촬영은 다시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변 스태프에게 물으니 밤 신(scene)이라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현장 스태프들은 거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다.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스태프 중 많은 인원이 현재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충남대, 상명대, 목원대 등 영상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현장에 나와 직접 경험하며 실습하고 있었다.
“사실 많이 힘들어요. 온종일 밖에서 일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 협조 구하는 것, 장소 빌리는 것 전부 우리도 처음이고 그분들도 처음이잖아요.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죠. 그래도 좋아요. 책으로만 배우던 것을 직접 보고, 해 볼 수 있어서 신기해요.”
날이 어두워지자 충청투데이 사옥 앞에 준비된 자동차 주위로 밝은 조명이 비춘다. 그 앞으로 짧은 레일이 깔리고 카메라 감독이 레일 위를 움직이는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잡는다. 자동차 안에 음향을 준비하고 배우 한은정이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도 한참을 조명을 밝혔다 줄였다, 반사판을 이리저리 대보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촬영장 주위로 모였다.
“좋지 그럼, 언제 이런 걸 보겠어. 다 서울에서 하는 것들 아녀. 신기하지. 우리 동네가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근데 저 아가씨는 얼굴이 주먹만 하네. 예쁘기도 예쁘고.”
동네 꼬마들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촬영 스태프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건 뭐냐고, 또 저건 뭐냐고 자꾸만 묻는다. 촬영을 진행 중인 ‘매일 크리닝 세탁소’ 앞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슛 가겠습니다. 통제해주세요.”
“사운드 스픽”
“Take 1, 탁-”
“컷이요.”
“오케이입니다.”
이번에 촬영한 ‘낡은 기억의 잔해’는 진헌수 작가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가 지역에서 감독 데뷔작을 촬영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저도 대전 출신이에요. 그래서 지역 상황을 잘 알죠. 목원대와 건양대 강의를 나가는데 그때마다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영상과 관련한 일을 하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보여주고 싶었어요. 지역에서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을요. 지역에 있는 학생에게 지역에서 무언가 할 기회가 충분히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번 작품은 대전에서 대전 사람이 만든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지역 방송국, 지역 제작사와 지역 출신 감독, 배우 그리고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학생이 함께하고 있다고 아이박스 미디어 정현균 감독이 이야기를 전한다.
“주인공인 한은정 씨도 대전 출신이에요. 조연 오디션도 대전에서 활동하는 연극배우를 중심으로 진행했고요. 카메라 감독이나 조명 감독 등 주요 스태프 몇 분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분들이지만 그 외 인력은 대전에서 영상을 전공하는 학생들로 채웠어요. 지역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현장 경험을 해 볼 기회가 전혀 없어요. 꼭 서울로 가야만 하나요? 지역에서도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으면 해요. 이번 촬영이 작은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10월 초부터 약 2주간 진행된 촬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역에서 촬영은 나무를 심기 위해 흙을 퍼 날라 땅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촬영은 둘째 치고 촬영을 위한 상황을 만드는 일이 더 힘들었다. 아무런 인프라도, 시스템도 갖추고 있지 않으니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작은 것 하나도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스태프들은 매일 아침 일찍 나와 자정 넘어까지 현장에 남았다.
텔레비전에도, 인터넷에도, 신문에도 온통 ‘서울, 서울, 서울….’ 서울이야기뿐이다. 언제부턴가 세련되고, 멋지고, 신 나고, 재미있는 것은 모두 서울에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정말 그럴까?
드라마 ‘낡은 기억의 잔해’는
12월 중 대전 MBC에서 방영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