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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1호] 게릴라 가드닝 관찰 보고서
1.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 날, 가을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일정을 바꿔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징후가 좋았다.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은 땅은 활동을 펼치기가 한결 수월하다. 가을비로 계획이 미뤄지면서 다시 한 번 준비사항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주요 물품 구입은 낙타가 진행하고 작전 완료 표지판은 청개구리와 지렁이가 준비하기로 했다.
2014년 10월 22일, 오전까지 비가 쏟아지다 오후에 개일 것이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비교적 아침 일찍부터 비구름은 물러났다. 급하게 화원을 찾아 국화꽃을 찾았다. 지금 이 시기에 심을 수 있는 다년생 식물로는 국화가 적당하다. 사실, 그것말고 아는 식물도 별로 없었다. 더구나 이 늦가을에. 한 파레트에 국화꽃 20포기가 담겼다. 낙타는 국화꽃이 얼마나 필요할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파레트와 세 파레트 사이에서 고민할 때 화원 아주머니는 세 파레트를 강력하게 권했다. 정확한 면적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역시, 선수다. 오전에 서두르면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 낙타는 마음이 급했다.
2.
낙타는 무당벌레에게 작전 완료 표지판을 준비해줄 것을 지시했다. 본부에 도착한 낙타는 도구를 차에 실어둔 채 옥상에 뛰어 올라갔다. 표지판 제작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실, 전날 준비했으나 작전명을 착각한 나머지 실수를 저질러 다시 제작해야 할 상황이었다. 글자를 파 나무 판때기에 붙여놓은 뒤 래커스프레이를 분사했다. 가을비를 뒤따라온 바람이 옥상 전체를 휘감았다. 넓게 퍼지는, 신경을 자극하는 래커스프레이 냄새가 코끝을 후비고 들어왔다. 거부감 강한 그 냄새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전날 작업에서 ‘살살 뿌리기’ 기법을 선보이며 청개구리와 지렁이의 입에서 탄성을 불러일으켰던 낙타였다. 그런데 이날 옥상 작업에서 낙타는 실수를 저질렀다. 래커스프레이가 바뀐 탓이다. 래커스프레이 종류마다 분사량과 점도가 제각각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준비한 나무도 없고 시간은 더더욱 없다는 사실이 낙타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2층 본부로 뛰어들며 독거미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래커스프레이는 실패했다. 어여 두꺼운 매직을 찾도록 하여라. 빨리 찾으란 말이다. 빨리.”
이번 작전 실무 준비작업에서 빠져있던 독거미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머리라도 두드려 맞은 것처럼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페인트로 만들어 작전지역에 들고 가겠습니다.”
“아니, 매직을 찾아내랬더니 무슨 딴소리여? 어여 매직을 찾으란 말이다.”
독거미가 대안을 마련해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낙타는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첫 작전에 긴장한 탓인지 평정심을 잃고 흥분했다.
“어여 청개구리랑 지렁이 데리고 출동하세요. 작전 완료 표지판은 저와 무당벌레가 만들어서 바로 가져갈게요.”
꽃밭을 만들기 전 공터 모습
삽질하는 낙타
꽃을 심는 독거미와 청개구리
꽃을 공급하는 지렁이
3.
독거미는 살짝 낯빛을 흐리며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채 휘휘 내저었다. 낙타는 운전석 문을 쾅 닫은 후 지렁이와 청개구리에게 어서 차에 오를 것을 요구했다. 작전 지역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은 고요했다. 첫 작전이 주는 긴장탓이 아니라 이번 작전을 지휘한 낙타 눈치를 살피느라 그랬다. 출발하고 1분쯤 후 현장에 도착해 국화 파레트와 삽, 모종삽, 장갑, 쓰레기 봉투 등을 내려 놓았다.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작전을 진행하려 했는데 길가에 내려 놓은 국화 파레트가 지나는 이들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가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건넨다.
“구청에서 오셨어요?”
그렇지, 이런 일은 구청에서 예산을 세워 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급기야, 현장 주변을 우연히 찾았던 모 방송국 관계자마저 찾아와 카메라를 들이댔다. 낙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순진한 청개구리가 모든 사항을 소상히 누설해버렸다. 낙타는 청개구리를 무섭게 째려보며 나즈막히 지청구를 준 후 최대한 단호한 표정으로 ‘촬영에 응할 수 없음’을 거듭 밝혔다. 게릴라 작전에서 보안은 핵심이다. 누구인지 눈치 챌 새도 없이 재빠르게 일을 끝내고 다시 민중 속으로 들어가 반격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청개구리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무척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4.
손바닥 보다 조금 넓은 지저분한 공터를 바꾸는데 국화 60포기면 충분했다. 삽으로 흙을 파들어가자 묵직한 냄새가 훅 끼쳐 올랐다. 20cm 정도 표층 아래 콘크리트와 유리병이 많이 묻혀 있어 낙타는 삽질이 편하지 않았다.
“지금 포크레인을 부르면 오려나?”
지렁이와 청개구리는 답이 없다. 전날까지 내린 비로 푹 젖어버린 쓰레기를 그러모아 봉투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략적인 식재 사이즈를 결정한 후 흙을 뒤집고 있을 때 독거미와 무당벌레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작업 완료 표지판은 없었다.
페인트 통이 아무리해도 열리지 않아요!”
낙타는 말이 없다. 불과 10여분 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 것이 머쓱해서다. 두 명이 더 합류한 후 작업에는 탄력이 붙었다. 모종삽으로 자리를 만들며 국화를 심어 나갔다. 무당벌레 작업하는 모양새가 낙타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당벌레야. 너 요 앞 가게에서 매직을 사들고 가서 본부를 지키는 베짱이와 함께 작업 완료 표지판 작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동료를 버리고 간다는 느낌때문인지 무당벌레는 망설였지만 등 떠밀려 자전거를 탄 채 홀연히 떠났다. 작업은 더 탄력이 붙었다. 나름 국화꽃 색깔을 조화롭게 배합하며 쓰레기로 가득찼던 공간을 꽃밭으로 바꾸어 나갔다.
“아이고, 이 동네에 원룸이 많이 들어오면서 아주 쓰레기때문에 난리여.”
“젊은 사람들이 고생이 많네.”
물끄러미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이 한 마디씩 말을 건넨다. 이날 작전 현장은 대전여자중학교 남서쪽 울타리 끝 삼각형 모양의 공터다. 주민이 무분별하게 내다놓은 쓰레기때문에 어수선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었다. 공터 맞은편에는 어린이집도 있다. 우리 첫 번째 게릴라 가드닝 프로젝트 ‘사소한 꽃밭’을 진행하기에 더 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적당한 시간에 맞춰 무당벌레가 표지판을 들고왔다. 제작과정에서 못 박는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한 할아버지가 나타나 망치질 몇 번에 못을 박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삽으로 표지판까지 박아 넣은 후 어린이집 맞은편에 있는 가게에서 물을 떠다가 촉촉하게 물을 주었다. 그렇게 사소한 꽃밭 1호가 태어났다.
‘찬바람이 불어 프로젝트를 당장 이어 진행할 수는 없겠지만 내년 봄, 계속 이어가야겠다. 함께 할 대원을 추가로 모집하고 좀 더 은밀하게 진행해 보아야겠다. 이번 첫 번째 작전에서 드러난 문제를 최대한 보완하는 것도 과제다.’
낙타는 생각했다.
본부에 들어와 테라스 의자에 앉은 독거미, 무당벌레, 청개구리, 지렁이 표정에는 뿌듯함이 어렸다. 작전 수행 전, 가득했던 긴장감은 꽃밭에 함께 묻어두고 온 모양이다. 본부를 지킨 베짱이는 이들에게 음료를 건넸다.
5.
‘게릴라’는 무척 익숙하다. 어렸을 때 전쟁영화를 많이 보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유독 전쟁 영화를 많이 방영했다. 그 시대에 왜 그랬는지 대략 알 것도 같다. ‘게릴라’와 비슷한 용어인 유격대나 빨치산 역시 익숙하기는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모든 어휘에서 증오와 잔인한 살상 등 부정적 감성이 먼저 떠오르지 않고 숭고함과 희생, 생사를 넘는 전우애 등 긍정월적 감성이 돋는다. 이것 역시 미디어 탓이다. 게릴라, 유격대, 빨치산 모두 정규군에 속하지 않으며 소규모 전투를 위주로 한다. 치고 빠지는 전략을 주로 사용한다. 군사, 전쟁 용어인 ‘게릴라’가 ‘가드닝’이라는 말과 붙어 ‘게릴라 가드닝’을 만든다. ‘국화와 칼’만큼이나 ‘게릴라와 가드닝’은 생경하며, 해서는 안 될 이종교배를 저지르고 시치미 뚝 뗀 채 딴전 피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게릴라 가드닝은 미국에서 시작했다. 한 예술가의 시도였다. 역시 예술가 상상력은 남다르다. 이후 이 세상을 바꿔나가며 지구종말의 위험을 막아낼 이도 그들이다. ‘리즈 크리스티’는 그 예술가 이름이다. 뉴욕시에 있던 한 지저분한 공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연하지. 그는 동료를 모아 한밤중에 계획을 실행했다. 행동하는 예술가는 동료와 함께 공터를 치우고 꽃밭을 만들었다. 다음날 이 변화를 눈치 챈 시민은 환호했다. 문제는 이곳이 사유지였다는 점이다. 토지 소유주와 법정 분쟁을 일으켰다. 사유지를 무단 점용했다는 취지였고 리즈 씨는 곧바로 맞소송을 벌였다. 개인 소유 토지라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인근 주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 법정 다툼은 무척 오래 진행되었고 결국,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이며 뉴욕시가 매입해 공원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 최초의 게릴라 가드닝이 펼쳐진 것은 1970년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다.
이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일이 펼쳐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도시에서 진행중이다. 게릴라 운동답게 익명성을 확보한 자원봉사자가 자발적으로 결합해 계획한 공간에서 작업을 진행한 후 빠져버리는 형태다. 참여하는 사람 각자가 이 운동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바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6.
콘크리트로 뒤덮힌 척박한 도시 공간에 식물을 심어 보여준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기도 하고 도시 미관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토지’에 관한 소유 개념을 진지하게 다시 고찰해 보는 계기다. 아니면, 게릴라 가드닝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 유쾌한 ‘즐길거리’로 이해할 수 있다. ‘사소한 꽃밭 1호’ 현장에 나타난 한 언론사는 ‘도시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꽃밭 대신 농작물을 활용한다면 도시 농업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차장 한 면을 확보한 후 그곳에 꽃밭은 조성하는 것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예술 행위에 가깝다. 보도 블록과 블록 사이에 그 작은 틈에 뿌리를 내린 식물 주변으로 작은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지 못하도록 한 프록젝트도 있었다. 이것 역시 생명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며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넨다.
이 모든 행위를 통틀어 게릴라 가드닝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대전 중구 대흥동에서 벌인 ‘게릴라 가드닝’에 관해 낙타는 이렇게 말한다.
“사소한 꽃밭을 만든 그곳도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인식하죠.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텐데.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몇 개월 전에 벤치 몇 곳에 책을 가져다 준 행위와 의도는 비슷하죠. 하루이틀도 안 되어서 다 없어졌지만, 이번에 조성한 꽃밭에 꽃도 며칠 사이에 다 없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어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늘 익숙하게 여겼던 것을 다시 생각하기가 우리가 벌인 이번 프로젝트 주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