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3호] 김운하와 함께하는 책거리

인생은 수많은 기다림들로 이루어진다. 미래라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시간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미래가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은 어떤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들에 대한 기다림 때문이리라. 우리를 설레게 하는 많은 기다림들 중에서도 나는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를 작가와 책을 기다리는 것만큼 더 아름다운 기다림도 별로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애틋한 사랑을 기다리듯, 작가들과 책들을 기다리기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의 태반은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 속에서 발견한 낯선 작가와 책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읽은 책들이다. 특히 어떤 한 작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작가가 영향을 받았거나 사랑했던 작가들과 책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진다. 스스로 ‘애서가’ 라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독서편력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의 태반은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 속에서 발견한 낯선 작가와 책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읽은 책들이다. 특히 어떤 한 작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작가가 영향을 받았거나 사랑했던 작가들과 책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진다. 스스로 ‘애서가’ 라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독서편력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계속 존재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 에 대해 필연적이진 않지만 가장 정당한 명제를 발견한다.

그것이 사랑이건 책이건, 또 다른 무엇이건 간에 예기치 못한 경이로움과 전율을 안겨줄 어떤 낯선 대상을 어느 미래엔가 반드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다림의 설렘’ 만으로도 삶은 한번 살아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런 인식을 갖게 된 후부터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삶의 의미와 무의미> 문제에 관해 더는 고뇌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가끔씩 ‘더 이상 읽고 싶은 책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들때마다 다시 허무감에 사로잡힌다는 함정은 있다.)

다행히 최근에도 나는 새로운 기다림의 대상을 발견했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 리가 공동으로 지은『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책 속에서다. 저자인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미국 철학계의 거장으로 하이데거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국내엔 아직 번역되지 않은『컴퓨터가 여전히 할 수 없는 것』- 누군가가 이 책을 번역해서 국내 독자들도 만날 수 있기를! - 이라는 인공지능 비판서로 더 유명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인공지능 문제에 관심이 많은 탓에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그가 쓴 책이 나오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구입해서 읽었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2013년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이었다. 그 책은  이야기가 풍부하고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이 시대가 직면한 가치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한 훌륭한 책이었다.

바로 그 책에서 또 한 명의 기다림의 대상이 될 낯선 작가를 발견했다. 저자가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였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정신일 것” 이라고 소개한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트 월러스(David Foster Wallace)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당대의 미국 문학계에서 탁월한 문학 천재로 칭송받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2008년 목을 매 자살했다. 작가로선 한창 나이인 46세였다.

월러스는 책의 한 장에 걸쳐 작가와 작품의 내용에 관해 소개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미국 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대표작『끝없는 농담』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탓에 그에 관해서 처음 들어본 것이다. 미국에서 그토록 유명한 작품인데도 여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그 작품이 일반 독자들이 즐겁게 읽기엔 너무 뻑뻑한 전위 문학에 속하는 까닭일 것이다.

나는 그 소설가가 너무 궁금했고, 그의 작품을 당장 읽어보고 싶어 위키피디아에 들어가 그에 관한 자료도 찾아보고, 아마존에도 들어가 그의 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이럴 때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다. 영어에 능통하면 영어판을 찾아 읽는 것이다. 아니면 그 책이 번역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작가와 책을 기억하면서. 물론, 나는 당연히 후자 쪽이다. 지금 당장 그 영어책을 읽어야만 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 신기하게도, 기다리면 언젠가는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방식의 기다림으로 지금까지 많은 작가와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다.

  

  

최근 십년 간에 최초로 번역되어 나온 걸작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많은 설레는 기다림이 있었다. 보르헤스를 읽으며 G.K. 체스터튼과 토마스 드 퀸시와 로버트 버튼을 알았고, 기다렸고, 그리고 결국 만났다. 나는 로렌스 스턴의『트리스트럼 샌디』와 헨리 필딩의『톰 존스』를 기다렸고 너무 오래 전에 절판되어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져버린 프랑소와 라블레의『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길 기다렸다. 빌리에 드 릴아당의『미래의 이브』와 헤르만 브로흐의『몽유병자들』과 구닥다리 세계문학전집의 조악한 번역본밖에 없던『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이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출간되길 기다렸다. (오! 나는 그 조악한 번역본이라도 행여 만날까 봐 얼마나 헌책방의 먼지쌓인 서가들 사이를 자주 헤매고 다녔던가!)

무엇보다 그 유명한 맬컴 라우리의『화산아래서』와 로베르토 무질의 소설『특성없는 남자』가 번역되어 출간되는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페트로니우스의『사티리콘』과 루크레티우스의『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번역되어 나오는 날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가! 루이스 캐럴의 걸작 환상소설 『실비와 브루노』에 이어『스나크 사냥』도 지난 2013년에 드디어 번역되어 나왔다.

가장 최근엔 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의 위대한 거장 토머스 핀천의 대표작『중력의 무지개』도 긴 기다림 끝에 두 개의 목침 같은 두께와 자그만치 9만 9천 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나타났다. 2012년 겨울이었다. 워낙 대중성이 없는 작품이기에 초판 700부밖에 찍지 않았다는 설명만으로 9만 9천 원이란 책값이 정당화 될 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감격과 흥분으로 그 책을 가슴에 안았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설사 그 책을 중고로 내다 판다고 해도 십년 후엔 그 책을 정가의 두 배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러니 초판이 절판되기 전에 독자들은 서둘러 장만해 놓길.)

또 반갑게도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그 유명한 책『불안의 서』도 2012년엔 축약본으로 나오더니 2014년엔 완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독서와 미술에 관해 쓴 수필들을 모은 귀한 책『프루스트의 독서』나 샤를 보들레르의 예술관을 보여주는 미술 비평문들을 모은『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같은 특별한 책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긴 설렘과 기다림 끝에, 나는 결국 이들을 만나고 말았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책들 거의 대부분이 최근 10여년 사이에 비로소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 책들이 모두 서구 문학사에서 일급 고전으로 대우받는 저작들이라는 걸 감안하면 21세기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동안 한국의 출판문화계가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슬프고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토록 때늦게라도 그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저 감개무량할 뿐이다. 아니, 이 책들을 만나게 해 준 번역가와 출판사를 향해 진심으로 수십번 큰 절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이 작가들 모두 내가 읽은 책들에서 발견하고 알게 된 작가들이다. 지금도 내 머리 속에는 번역되길 간절히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는 작가들과 책들의 목록이 가득하다. 플리니우스의『자연사』라든가,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걸작인 샤토 브리앙의『무덤 저 편의 회상』과 이태리 소설가 카를로 에밀리오 가다의『메룰라나 가의 무서운 혼란』과『토성의 고리』라는 아주 독특하고 경이로운 소설을 쓴 W.G. 제발트가 알려준 의사 출신의 17세기 영국 작가 토머스 브라운의『유골단지Hydriotaphia』를 비롯한 그의 저작들 등등, 목록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내 노트를 찾아보니 최소한 백여 권에 이른다. 그리고 내가 아직 모르는 작가들과 책까지 포함하면 그 목록은 평생을 다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설레임을 이어갈만큼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끝없는 기다림의 목록이 세월과 함께 계속해서 가속도가 붙어서 줄어들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십여년 간 줄어든 목록들을 생각하면, 21세기를 사는 우리 독자들은 얼마나 행복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또 그저 ‘위기’ 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시절에 직면하고 있는 출판계 사정도 떠올려본다. 그럼에도 소신있는 출판사들은 마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괴물에 맞서 싸우는 용사처럼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꾸준히 좋은 책들을 내주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한 사람의 독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독자가 될 때에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혹은 누군가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읽고 있는 한 권의 책 속에서 호기심과 독서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키는 낯선 작가와 책을 만나게 되는 내밀하고 행복한 특권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 책을 내 품에 안게 될 거라는 설레이는 기다림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에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나는 마법 같은 만남, 설렘을 주는 기다림, 그것은 오직 독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이다.

  

  

나의 삶 또한 이 설레는 기다림과 함께 계속된다.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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