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93호] 2015 기획연재 · 기본소득
이는 고용 없는 성장만 지속되는 분배정책의 결과물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부터 최근 유럽의 상황까지 촉발시킨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전 지구적 불안정 노동사회의 확장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비정규직과 알바노동자, 실업자를 더하면 경제활동 인구의 60% 이상이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가계부채가 1천조 원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도 정리해고 등으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정규직과 알바노동자를 포괄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양산, 청장년과 노년을 두루 포함하는 장기 실업, 삶과 노동을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이 사회에서 해법을 찾기란 참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많은 논의와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기본소득’이 대안정책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김조년 한남대학교 교수는 한 신문사 기고에서 ‘기본소득’이란 제도를 아주 심각하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논의하고 도입할 것을 결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했습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어떠한 자산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국가 또는 사회공동체가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입니다. 생활을 충분히 보장하는 수준으로 정기적으로 지급하며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등의 보편 복지와 함께 합니다. 현금 기본소득뿐만 아니라 무상의료나 무상교육, 무상대중교통, 무상정보통신과 같은 현물 및 서비스도 기본소득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2)
이 아이디어는 지구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삶이 불안정한 이들이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생존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면 모두에게 적정한 금액의 현금소득이 매달 지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 모두에게 지급하므로 가족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고 의도적으로 가족을 분리하거나 해체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됩니다. 그 외에도 노동과 연계되어 있는 사회보험과 공공부조와 달리 노동의 여부를 고려하지 않음으로 계층 내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으며 스스로 빈곤층임을 증명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존엄성을 침해 받거나 노동의지를 꺾지 않아도 됩니다. 결과적으로 기본소득 도입으로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품위 있는 생존이 가능해지며, 정치적 선택과 의사결정의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과활> 홍세화 발행인은 주거·환경, 건강, 노후, 일자리의 불안요인을 개별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일거에 하는 데서 기본소득제가 의미 있다고 했습니다.
1) 통계청의 4월 데이터에서 15~29세 청년층 실업자 수는 42만 6000명이다. 여기에 취업 준비생, 구직 포기자 까지 포함하면 100만 명이다.
2)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최광은 저, 박종철출판사
기본소득이 기존의 복지제도와 다른 점은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별복지는 엄밀한 자격 조건과 까다로운 심사에 따라 차별적으로 지급되고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나 근로장려세제가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선별복지 제도에서는 빈곤층임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노동의지를 꺾거나 노동의지가 없음을 오히려 위장해야 합니다. 올해 초 일어난 세 모녀 자살사건이 보여주듯 선별복지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넓히고 만성적인 빈곤 상태를 유지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보장되는 기본 권리이므로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원인을 없애고 가족해체를 막을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20세기에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면 21세기에는 기본소득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 어느 20대 청년의 직업은 시인이다. 자신의 삶을 시로 쓰고 시를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어 읽는다. 새벽까지 편의점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기본소득’이 실행되면서 하고 싶었던 시를 시작했다. ]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Basic Income Korean Network) 금민 운영위원장이 ‘기본소득,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은 신자유주의 불안정 노동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개의 연동된 요구, 삼위일체로 파악된다.’고 한 것은 기본소득 운동이 최저임금의 획기적인 인상, 노동시간의 단축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노동 여부와 무관한 기본소득이 지급될 때 임금노동 형태를 취하지 않는 자발적 활동이 많아질 것이며, 일자리 창출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리하게 강을 파헤치는 등의 환경 파괴를 일삼지 않게 되고, 노동환경이 열악한 저임금 일자리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모두가 더 적게 일하면서 모두가 좋은 일자리를 갖게 되는 방향으로, 인간다운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우리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여름내 땀 흘려 일하는 개미와 기타치고 노래하는 베짱이, 기본소득은 개미와 베짱이 모두에게 지급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고용되어 임금노동을 하는가 아닌가, 또는 일의 결과물이 사회에서 현금으로 교환될 수 있는 ‘노동’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기본소득은 각종 재생산 영역에서 수행되므로 시장에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여러 일, 그림자 노동에 대한 보상을 보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떠맡는 돌봄노동이 대표적입니다. 급속한 기술 혁신 등의 이유로 비자발적 실업자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시대입니다. 게다가 고용 없는 성장, 성장 없는 거품이라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과연 이들에게 돈을 주지 말아야 할까요? 현대 사회에서 돈은 생존권과 직결됩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임금노동을 할 수 없거나, 혹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인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닙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강남훈 대표가 ‘자본주의 안에서 시작하지만 기본소득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향한 운동’이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회가 보유한 재화와 용역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에 대한 대가 역시 사회로부터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저녁이 있는 삶’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저녁뿐 아니라 아침이 있는 삶, 점심이 있는 삶, 쉼이 있는 삶을 만듭니다.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조세종 이사장은 기본소득의 논의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이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 한 것은 기본소득은 사치스러운 삶을 가능케 하는 거액의 소득이 아니라 ‘기본적인’ 소득이라고 전합니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기본적인 생활은 보장되겠지만,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기본소득과 각자 필요한 정도의 노동소득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된다면, 비참하고 비윤리적이고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열악한 임금노동은 노동자로부터 외면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임금 수준과 노동 인권 수준을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 보편적인 노동환경 개선을 불러올 것입니다.
기본소득이 각자 개인에게 지급되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 확대라는 우리 사회의 이상 실현을 위해서입니다.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사회 대안이 등장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신자유주의 모순입니다. 자유방임주의,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 등 지난 100여 년의 주류적 흐름은 나름의 발전 과정을 거쳤지만 끝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남겼습니다. 국가 또는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그랬고,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그랬고, 신자유주의 국가는 더 심했습니다. 억압하는 형태는 다양한데, 대표적으로 노동의 강제적 측면이 그렇습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원하지 않아도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최소한의 기준이 노동이었고,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임금노동만이 가치의 기준인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침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우리가 기본소득을 말하는 것은 고용문제라 했듯이 이런 사회를 극복하는 것이 기본소득의 정신입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안효상 이사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각 악기의 멜로디를 만들고 연주를 다듬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소득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