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2호] 프롤로그_일리아 갤러리 강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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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산등성이와 나뭇잎이 어우러진 한 폭의 산수화는 멀리서 보면 커다란 산과 곡선을 이루는 강으로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풍경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흩어지고 ‘더미(dummy)’가 보인다. 더미는 영어 단어로는 의류 제작·전시용 인체 모형을 뜻하며, 우리 말로는 한곳에 모인 큰 덩어리를 의미한다.

   

   
‘더미’로 세상에 점을 찍다

한지에 만년필로 그린 더미가 모여 한 폭의 산수화를 완성했다. 강혁 작가는 더미라는 소재로 다양한 세계를 만든다. 반질반질한 나무로 만든 목각 인형을 보다가 문득 현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가 같은 얼굴로 살아가는 듯한 사람들이 이목구비 없는 더미 인형의 얼굴처럼 보였다. 만년필로 그린 더미는 작은 크기에 앙증맞은 모습이다. 더미가 모여 만든 세상은 자꾸 머리를 어지럽힌다. 더미의 완성이 ‘자연’일 때에는 자연을 갉아 먹는 현대인의 모습인 듯싶어서 그렇고, ‘현실의 일부’일 때에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그렇다. 작가의 캔버스 위에 ‘더미(dummy)’는 커다란 산과 강이 되기도 하고, 회색 도시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한지 위에 풍경을 그린 작품은 ‘더미 산수화’, 도시의 모습을 담은 작품은 ‘더미 랜드’라고 부른다.

“만년필을 쓸 때 종이를 긁는 느낌이 나요. 만년필로 세상을 긁는다고 생각하면서 작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종이에 스케치하듯 생각나는 것을 담았어요. 그게 ‘더미 랜드’죠. 학위를 따기 위해 죽도록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린 그림, 직장에서 볼 수 있는 똑같은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을 하나씩 표현했어요. 대부분 더미가 같은 표정에 같은 몸짓을 하는데, 그 와중에 간혹 다른 몸짓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더미가 있어요. 진짜 세상에서도 간혹 그렇게 튀는 사람이 있잖아요. 더미로 얼굴을 표현할 수는 없으니까 움직임으로 표현한 거예요.”

종이에 하나씩 그리던 더미를 한지로 옮긴 것은 2011년 말 뉴욕 여행을 할 때였다. 여행하며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이 마치 사람처럼 느껴졌다. 안간힘을 써도 결국은 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지는 나뭇잎의 모습이 덧없는 인간의 인생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돌아와 더미로 나무, 산, 흐르는 강을 표현했어요. 그렇게 ‘더미 산수화’를 완성했죠. 멀리서 보면 하나의 풍경화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은 더미가 그 풍경을 이루고 있어요. 현대인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이루지만, 결국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작품에 많은 이야기를 담았어요. 자연과 인간 세계에 관한 제 생각이 하나둘 담겨 있죠.”

     

    

‘일리아’ 앞에 채워질 명사는 무엇이든 관계없다

서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다지던 작가는 지난 3월 두 동생이 사는 대전으로 내려왔다. 작업실로 사용하려고 찾은 공간은 점점 그 사용 범위가 넓어졌다.

공간의 첫 전시는 강혁 작가 본인의 개인전이었다. 더미 산수화, 더미 랜드 등 자신의 작품을 걸어 놓고 지인들을 초대했다. 공간을 소개하고 작은 공연을 함께 즐겼는데, 반응이 좋았다. 하나둘, 이곳에서 전시하고싶다는 문의가 들어왔다. 강 작가의 작업실은 점점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장소’가 되었다.

강 작가가 공간에 붙인 이름은 ‘일리아’였다. 불어로 ‘~이다’라는 뜻을 품은 공간의 이름 앞에는 어떤 낱말이 와도 설명이 가능하다. 음악이다, 미술이다, 사람이다 등 강혁 작가는 일리아라는 공간에 많은 낱말을 품고 싶다.

전시의 시작은 재즈, 국악, 클래식 등 콘서트를 함께 한다. 처음엔 몇 사람이 모여 즐기는 정도였던 행사가 시간이 지날수록 서 있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모였다. 공간이 사람으로 채워지니 강 작가도 뿌듯함이 더했다. 지역에 이런 공간이 많이 생길수록 문화예술로 변화하는 도시를 꿈꾸는 일이 허황된 게 아니라는 가능성을 보았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겠더라고요. 몇 달 새, 일리아를 함께 해보고 싶다는 스태프가 여덟 명이 되었어요. 일리아가 이런 친구들을 계속 모을 거점이 되었으면 해요.”

작가는 이제 도시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로 본다. 일리아라는 공간에 찍은 점은 다른 ‘점’이 있는 곳으로 뻗어 나갈 수 있다. 수많은 점이 모이면 더 견고한 ‘면’을 만들 수 있다. 도시라는 캔버스에 예술로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무궁무진하다.

“일리아에 뜻을 품은 예술가가 더 많이 모였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뭔가 시작할 때 힘이 되어줄 만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요. 물론 저 역시 계속 전시하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야겠죠. 20대 때는 나 자신의 내면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요. 30대가 되니까 어떤 걸 계속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20대 때 품었던 큰 꿈들은 이제 많이 사라졌어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것 같아요. 그래서 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워줄 사람을 모으는 중이에요. 나 혼자 할 수 없는 건 함께 하면 되잖아요. 많은 예술가와 함께 재미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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