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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4호]대전시민아카데미가소개하는12월의책
‘말’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비록 그 뜻이 잔혹한 것이라 해도, 사전에 올라와 가지런히 풀이된 글자들을 보면, 마치 백자 종지 위에 놓인 말간 홍시를 보듯 단정하면서도 황홀하다. 사전(辭典). 일렬종대의 문장들에서 탈출해 제각기 헤쳐 모인 단어들이 짐짓 서로를 모른 채 시선을 딴 데 두고 모여 있는 곳. 동사를 잃어버린 명사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고, 명사를 구하지 못한 동사들은 갈 바 없이, 시동을 걸어 놓은 채 풀이 죽어 있다. 그러니 형용사와 부사의 뻘쭘함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그지 같은 이 나라를 못 떠나는 이유는 이 지랄 맞은 모국어 때문이다. 모국어. 그냥 ‘국’ 자는 빼 버리고 모어. 어머니의 말. 내 첫말이자 유일한 말, 그 말을 떠나선 내가 나로 살아갈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어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다. 언어란 태생적으로 더럽혀져 있는 것이며, 그 본성 자체가 혼종이다. 그러니 순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말도, 거친 말과 국적 불명의 외래어들로 우리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말도 인정할 수 없다. 모두 헛소리다. 한국어의 우수성도 믿지 않는다. 소설가 김훈이 그랬던가, 우리말로는 법전을 쓸 수 없다고. 은, 는, 이, 가 조사를 빼 버리면 모조리 한자어인 대한민국의 육법전서들. 같은 뜻에서 나는 우리말로 철학을 한다거나 학문을 해야 한다는 말도 헛소리라 생각한다. 빈곤을 자처하는 처사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일본어를 질투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언어는 여기저기서 들어온 모든 말이 잡다하게 섞여 있다. 일본어는 그 잡것들을 내치지 않고 기꺼이 자기 안으로 끌어안는다. “프레즌트(present)”, 영어로는 [preznt] 우리말로는 선물, 일본어로는 프레젠또. 이 얼마나 호쾌한가. 모든 언어의 속지주의. 나는 그런 일본어의 실용성과 개방성이 부럽다.
아직도 표준어의 정의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의 서울말”이라고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니어야 할 것이다. 이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표준어정책 때문에, 아름다운 우리말의 태반은 멸종되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걸 만든 정치인들과 학자들의 업보는 태산처럼 무거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천연기념물처럼 남아 있을 우리말들의 또 하나의 서식지, 내 모어가 잡다하게 번식했을 미지의 땅 북녘, 오래전 거리에서 따라 불렀던 노래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평양만 왜 모옷 가~” 택시요금 5만 원이면 간다는 그곳은 우리가 지구 상에서 가장 가기 어려운 곳 중 하나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이제는 한 50만 원을 준다 해도 나를 거기에 데려다줄 택시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곳에 또 어떤 우리말들이 있을까.
『남녘말 북녘말』은(‘쪽’이 아닌 ‘녘’이라는 단어를 고른 이 어여쁨) 같거나 비슷한 뜻을 가졌으나 달리 표현되는 남녘의 우리말과 북녘의 우리말, 혹은 그 반대의 사례들을 재밌게 짚어 풀어 주는 책이다. 어린이들을 염두에 두고 쉽게 쓴 책이지만, 성인이 읽어도 흥미롭긴 마찬가지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쓰는 “싸가지 없다”는 표현을 (싸가지는 강원과 전남지역에서 쓰는 싹수의 방언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와 있는 우리말이다) 북에서는 어떻게 할까. 바로 “도덕 없다”이다. 이 얼마나 점잖으면서도 재밌는 표현인가.
저자는 현재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사업회’의 책임연구원으로 2006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북한 공동사전을 만들고 있는 현장의 국어학자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여러 차례 북쪽을 방문하거나 제3국에서 북쪽의 사전 집필자들을 만났는데, 이 책의 많은 소재가 북녘 사람을 만나 주고받은 대화 가운데서 나왔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끼리 만나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지금 자신들이 쓰는 말들을 하나하나 꺼내 그 뜻을 알려 주고, 그 쓰임의 차이들을 짚어보는 일들은 생각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일들의 단편과 아직 나오지 않은 남북한 공동사전의 모습을 조금씩 우리에게 알려 준다.
지난 한글날, 몇몇 방송사에서 젊은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주로 쓰는 신조어와 줄임말 등을 소개하며, 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우리말도 혼탁하게 한다는 취지의 보도를 냈다. 그 예라는 게, “방가방가(반갑다는 뜻) / 열공(열심히 공부한다는 )…” 등 십수 년도 더 지난 것들이었는데, 그 무지하고 꼰대 같은 이야기에 어느 청년 단체에서 성명서 비슷한 걸 냈다. 전문을 다 읽어 보진 않았는데, 대충 이런 거였다. “사전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우리에게 물어보라!”
몇 년 전 개봉한 <행복한 사전>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원제 舟を編む; 배를 엮다). 한 출판사의 눈물겨운 일본어사전 편찬기였는데, 거기서 사전편찬부의 직원들은 학생들이 잘 가는 패스트푸드점에 몰래(?) 잠입하여 햄버거를 먹으며 거기서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단어들이 현재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실제 그 결들을 확인하고 사전에 새롭게 올릴 말들도 채집한다.
그 영화에서 천신만고 끝에 만든 사전의 이름이 “대도해(大渡海)”였다. 바다를 건너는 큰 배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처럼 사전은, 말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너기 위해 타는 배와 같다. 그 배는 크면 클수록 좋을 것이다. 우리가 오른 배는 한국어라는 배다. 난 이 배가 그 어느 배보다 거대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어쩌면 한 언어에 있어 아름다움이라는 건 그 언어의 크기에 비례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커야 그 안에서 섬세한 구분이 생기고 그 섬세함으로 세상을 포획해내는 촘촘한 그물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게 원래 옳고 그름, 미와 추 그 모든 게 뒤죽박죽된 채 난해하기 그지없는 곳인데 어찌 곱고 예쁜, 정제된 말로만 그것들을 포획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크기만큼 말의 크기도 커져야 한다.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라고요.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서로의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도 서로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첫걸음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 말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미 우리의 말은 한층 더 커질 것이고, 그 말은 통일을 넘어 이 세계를 건너 알지 못하는, 하지만 지독히도 아름답고 행복할 것만 같은 저 피안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것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은 말했다. “통일, 그것은 더 큰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라고. 나는 그 하나라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더 큰이라는 것에는 무한한 동의와 지지를 보낸다. 우리에겐 더 큰 우리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것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작지만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