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6호] 대전여지도_대전 대덕구 대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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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봄이 왔다. 꽃나무 가지의 꽃맹아리가 깨어날 꽃잎에 옴작거리는 게 보인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우는 새들이 호들갑스럽다. 보이는 건 산비둘기 몇 마리뿐이다. 산비둘기 몇 마리는 울지 않았다. 나무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발걸음 소리에 푸드덕 날아 자리를 옮겼다. 이 움직임도 어쩐지 부산스럽다. 봄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아침에 대덕구 대화동을 걸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걸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조금 걷고 나서 계획을 바꿨다. 무작정 다녀보기로.

    

    

“밥은 먹고 사는 곳이여”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대전산업단지의 모습을 제대로 못 봤을지 모른다. 내비게이션에 ‘대화동 성당’을 찍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나올 때까지,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리려 직진에 직진을 거듭하니, 유턴하는 곳은 나오지 않고 길게 이어진 대전산업단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낯설고 차가운 느낌에 얼른 차를 돌려 대화동 성당으로 향했다.

대화동은 북쪽으로는 읍내동, 유성구 원촌동, 동쪽으로는 중리동, 남쪽으로는 오정동, 서쪽으로는 서구 만년동, 유성구 도룡동과 인접해 있다. 갑천과 유등천에 접해 있는 대화동은 땅이 기름져 벼농사가 잘 되는 곳이라 하여 이름을 ‘대화(大禾)’라 했다고 한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지었던 이곳이 지금은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변했다.

대화동 성당 뒤편부터 걷기 시작했다. 금성백조맨션아파트를 지나 세원풍남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몇 층인지 쉽게 헤아릴 만큼 높지 않은 아파트들이 정겹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를 길로 삼아 천천히 걸었다.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가 꼬리를 염색한 강아지 한 마리와 햇볕을 맞으며 서 있다. 그리고 좀 더 멀찍이 한 할아버지가 경로당 앞 인공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올해 일흔여덟인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대화동에서 살다가 이곳 세원 아파트를 사 입주했다. 할아버지는 이곳을 ‘그냥 서민들은 살만 한’ 동네라고 소개했다.

“아이 뭐, 그냥 잘 살든 못하고 밥은 먹고 사는 곳이여. 여기가 그전에는 시끄러웠던 데여. 양아치들 있었던 동네여. 지금은 다 없어졌지. 점차 발전되고 하니까 없어진 거지. 옛날에는 여기가 빈촌이었거든.”

할아버지가 세원 아파트가 생긴 지 20년쯤 됐다고 말하자 멀리 서 있던 할머니가 큰 소리로 이야기해 온다. “20년이 뭐야. 30년은 됐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부다. 며느리 될 사람이 점심을 사준다고 해, 약속 시각이 되기도 전에 나와 있는 참이었다. 부부는 산업단지가 들어와 ‘공장이 잘 돌아가던’ 때를 떠올린다. 20년 전에는 다방도 잘되고 장사도 잘되고 살기가 괜찮았다.

“20년 전만 해도 괜찮았지. 이제는 안돼야. 구획정리 된다고 하더니 안 되고 있는 거야. 시에서 해야지. 개인은 못 햐. 개인이 돈 있어? 정부에서 해야 되지. 정부에서 안 하면 못 해. 대화동이 보통 크다구?”

할머니가 목줄을 채우고 데리고 있는 강아지는 3년 전부터 키웠다. 아들이 데리고 온 시추다. 처음에는 별로였던 이 강아지에게 지금은 정이 들었다.

“개는 의료보험이 안 되거든. 병원 한 번 가면 7만 원쯤 들어. 수술 한 번 시켰더니 40만 원 들었고.”

할아버지는 피우려던 담배에 불도 채 붙이지 못하고 ‘며느리 될 사람’ 자랑을 이어 했다. 아들 없이도 혼자 와서 점심을 사준다고 말이다. 지난번에는 장어를 사줬다고 했다.

   

   

“바쁘게 살았으니까 지금 안 얻어먹고 사는 거지”

아파트 단지를 지나 더 걸으니 주택단지가 나타난다. 연립주택이 모여 만든 골목에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 벽에 붙은 ‘지붕개량’ 스티커, 이삿짐센터 간판, 대중목욕탕의 굴뚝…. 그네와 시소가 전부인 어린이 놀이터에서는, 잔디 깎는 작업이 한창이다. 잔디 냄새가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오는 걸 보니 겨울이 한참 멀어진 게 실감 난다.

골목을 얼마쯤 걷다 나온 큰길. ‘금남상회’ 간판이 가장 먼저 보인다. 할아버지 몇 명과 할머니 한 명이 상점 앞 작은 평상과 의자에 앉아 있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동네를 바라본다.

무리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이웅산 할아버지는 광복 직후 평안북도에서 내려왔다. 충북 보은과 성남동에서 살다가 30대 초반에 대화동에 들어왔다.

“누구나 어려운 시기였지. 있는 사람은 여기 안 있지. 여기 사람은 공단 덕 많이 봤어. 공장에 다니니까. 공장에 여자들도 많이 다녔어.”

지금은 대화동에 젊은 사람들이 없지만, 산업단지가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많았다. 1969년에서 1973년에 제1 산업단지가, 1975년에서 1979년에 제2 산업단지가 생기며 ‘살려고’ 대화동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 공장에 기대어, 공장에 다니던 사람들에 기대어 모두가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산업단지가 시시해지며 많은 사람이 떠났다.

이웅산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그 옛날 대화동은 ‘산’이었다. ‘날망’의 논밭에는 반공포로들이 자리를 잡았고 대전역 근처, 대전천 근처 철거민들이 대화동으로 들어왔다. 한 집을 나누어 몇 가구가 살았다. 그때 만든 집들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이후 산업단지가 생기며 지금의 동네가 형성됐다. 인구도 늘고 그에 따라 집들도 도로도 생겼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이는 임채영 할아버지다. 금남상회 사장님이어서 ‘회장님’으로 통한다. 1970년대, 막 대전산업단지가 형성될 때쯤 할아버지는 금남상회를 열었다. 지금은 쌀과 담배만 팔지만, 예전에는 잡화까지 팔던 구멍가게였다.

“노느니 하는 거야. 장사가 옛날에 10 됐다고 하면 지금은 1도 안돼야. 70년대에 제일 잘됐었어. 바쁘게 살았으니까 지금 안 얻어먹고 사는 거지. 요즘은 옛날이랑은 달러. 이웃 간 정이 없지. 담배 한 갑도 멋있는 큰 디 가서 사지, 오래된 가게는 안 오지.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이나 올까, 다 큰 디루 가지.”

금남상회 앞에 모인 할아버지들은 바쁘게 살았던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버는 재미, 바쁜 재미 말고는 다른 재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가게 앞에 모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들의 대화 주제는 ‘재개발’로 이어진다.

“재개발한다고 한 지가 근 10년이야. 주민들한테 허가받고 시청 허가받고 그랬는데 경제성이 없다고 공사할 사람이 안 들어와. 언젠가는 재개발해야 하겠지. 인구가 줄어들고 낙후되니까. 없는 사람들은 딴 데로 이사 가야 되겠지. 보상받아서 아파트는 못 사지. 아파트는 관리비도 많이 나오고 힘들지.”

이웅산 할아버지는 ‘재개발’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민 중 누군가는 반기고 누군가는 반기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변해야 할 곳이라고 말이다.

     

    

“3, 4공단 생기기 전에는 최고의 상권이었지”

금남상회를 지나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언덕을 조금 올라 꼭대기에 닿았다. 산업단지를 제외한 대화동 일부가 멀리까지 내려다보인다. 주택의 옥상, 지붕의 다양한 색이 보인다. 간간이 새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걷기 딱 좋은 날이다. 햇살을 따라 언덕에서 내려와 걷다가 대광 이용원 앞에 잠깐 섰다. 대화동에서 오래 자리를 지켰을 것 같은 이용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까만 머리에 깔끔한 복장을 한 이용원 주인이 낯선 방문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대광 이용원의 ‘대광’은 사장님의 이름이다. 안대광 씨는 대화동에 살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25년간 이용원을 운영하며 대화동의 크고 작은 변화를 지켜봤다.

“이 근처 목욕탕 건물 지을 때 같이 들어와 이용원 시작했지. 재개발한다고 해서 왔는데 재개발은 안 되고 있어. 예전에 이 주위에 재건대 수용소가 있었어. 고아들이랑 넝마주이들이 있던 곳이야. 부랑배들 교육시키는 곳이었는데 공단 생기고 철거됐지. IMF 전까지는 경제도 활성화되고 좋았어. 3, 4공단 생기기 전에는 최고의 상권이었지. 3, 4공단 생기고 좋은 회사들이 떠났지.”

5년 전만 해도 잘되던 이용원에 이제는 손님이 없다. 단골손님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새로운 손님은 이용원을 찾지 않는다. 안대광 씨는 큰돈은 벌지 못해도 용돈벌이를 할 겸 이용원을 계속 운영한다고 했다. 이용원 한쪽 벽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포스터가 걸려 있다. 안대광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리를 잘살게 만들어 준’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젊은 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전쟁과 가난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대는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안대광 씨 얼굴에 주름이 깊다.

안대광 씨가 이용원 문밖까지 나와서 배웅한다. 밑으로 쭉 가면 청각장애, 정신지체 학생들이 다니는 원명학교가 있다고 알려준다. 원명학교 쪽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동안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평화에 실체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한갓진 골목과 따스한 날씨. 그동안의 변화와 앞으로 찾아올 변화가 한데 엉켜 ‘온도’로 다가온다. 영상이다. 조금씩, 조금씩 따스해지는 영상이다.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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