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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0호] 마음대로 낭만 버스킹
첫 버스킹은 단골 미용실에서였다. 전역 후 머리를 기르면서 자주 가던 미용실이었다. 그 당시엔 항상 등 뒤에 기타를 메고 다녔다. 그날도 기타를 메고 미용실을 찾았다. 기타를 쳐다보던 팀장 누나가 노래 한 번 해 보라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제가 원래 빼는 성격이 아니에요. 알겠다며 자신 있게 기타를 꺼내기는 했는데 막상 노래를 부르려니 너무 떨리는 거예요. 중학교 수학여행 때 전교생 앞에서 춤을 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렇게 떨리진 않았을 거예요. 그때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하나 밖에 없었어요.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죠.”
수도 없이 잡았던 코드였다. 손이 다 까지도록 치고 목이 쉬도록 불렀던 노래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손가락이 떨렸고 목은 잔뜩 긴장했다. G 코드를 잡고 기타 줄을 튕겼다.
“노래를 부르니까 점차 주변 사물이, 사람이 사라졌어요. 노래와 저만 남았죠. 그런데 정말 웃겼던 건 제가 듣는 제 노래와 연주가 너무 지루한 거예요. 왜 이러나 싶었어요. 일단 끝까지 불러보자 마음먹었죠.”
그렇게 겨우 연주를 이어나가던 그는 마지막 스트로크를 하고 곡을 마쳤다. 그제야 열 명이 넘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박수를 치고 있었다. 머리를 깎던 고등학생,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던 실습생, 팀장 누나, 파마를 하던 아주머니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며 박수를 쳤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따로 떨어져 살았고 어머니 손에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성격과 행동이 닮았던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군대에 있을 때 들었던 「CREEP」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일병 때 경계를 서면서 몰래 라디오를 들었는데 이 노래가 나왔어요. 벼락을 맞은 것 같았죠. 휴가 나와서 바로 기타를 사서 무작정 치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휴가가 지나갔어요. 기타는 방 한구석에 모셔 놓고 복귀했죠. 다음에 휴가 나와서 방에 가봤는데 기타가 없는 거예요. 엄마가 내다 버리셨더라고요. 옛날에 아빠가 기타를 치셨거든요.”
곧바로 기타를 다시 샀다. 그대로 부대에 들고 가서 전역할 때까지 기타를 쳤다. 전역하고 나서도 기타는 항상 손에 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 해에 오디션을 봤다.
“어디로 봤는지는 말 안 할래요(웃음). 붙었어요. 스물세 살 때였죠.”
붙고 나니 두려웠다.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음악이란 길이 불안하고 위태로워보였다. 어느새 가장이 된 그에게 ‘생업’이라는 현실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시간 끌지 않았다. 바로 방향키를 돌려 취업을 선택했다. 3년간 통신망을 유지·보수하는 일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였다. 기타는 내려놓았다.
“올해 초에 진잠에서 버스킹하는 밴드를 봤어요. 기술이 화려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가슴을 울리더라고요. 목소리 하나로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날 집에 가서 제가 칠 수 있는 곡을 하나씩 다 쳐봤어요.”
줄이 조금 늘어졌지만 기타 소리는 괜찮았다. 음악을 생업으로 삼을 순 없어도 취미로 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퇴근하고 나서 커버곡을 연습했다. 신 나고 즐거웠다. 그리고 기분이 내키는 날이면 기타를 들고 서대전 공원에 나갔다.
“얼마 전에 서대전 공원에 나가서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불렀어요. 한 곡, 한 곡 부르고 있는데 여자 한 분이 가만히 서서 노래를 듣는 거예요. 감미로운 곡으로 세 곡 정도를 더 불렀는데 끝까지 듣고 서 계시더라고요. 목소리가 참 좋았대요. 낭만 있죠?”
그에게 노래를 청했다. 기타 소리가 카페를 채웠다. 요즘 음원 차트에서 ‘핫한’ 노래였다.
“음악은 제게 링거예요. 가끔 너무 고된 날이 있잖아요. 그런 날에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의 음악을 들으면, 환자의 열이 내리듯이 피로가 확 사라져요. 버스킹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요. 내 목소리, 내 기타로요.”
그의 노래엔 오디션에서 있을 법한 절실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의 공기는 이완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나긋나긋 편안하고 낙천적이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낭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