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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4호] 김운하와 함께하는 책거리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어느 글에선가 ‘실낱 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라고 썼다. 어느 날 서재에서 책을 읽다 멈추고 멍하니 서가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보르헤스의 바로 그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나는 그런 종류의 상상을 잠깐 해 본적이 있었다.
프랑소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읽을 땐 팡타그뤼엘이 생 빅토르 도서관에서 보았다는 그 엽기발랄한 책들이 실재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고,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네모 선장의 그 멋드러진 서재에 있는 모든 책들의 목록이 궁금했고, 돈키호테의 서재에 있던 책들의 목록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 허구적인 소설 작품 속에 나오는 서재요, 책들이지만, 만일 보르헤스의 말처럼 실낱 같은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이 실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지금 서점에만 가도 읽고 싶고 사고 싶은 책들이 지천으로 있는데 웬 엉뚱한 상상이냐 하겠지만, 한 번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자 나도 모르게 두뇌가 상상력을 작동시켜 제멋대로 상상속의 도서관을 만들어내고 마는 것이다.
나는 혼자 싱거운 웃음을 짓고는 턱을 괴고 앉아 그동안 내 상상의 서재 혹은 도서관에 비치될 모든 책들에 관해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만일 내가 상상하기만 해도 짠! 하고 그 상상의 책들이 내 서재에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먼저 찾게 되지 않을까?
●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책들
● 장차 쓰일 세상의 모든 책들
● 돈키호테와 미셸 드 몽테뉴, 파우스트, 그리고 『해저 2만리』의 주인공 네모 선장의 서재에 있던 모든 책들
● 타락 천사들의 애독서들
● 변비와 설사의 관계에 관해 쓰인 모든 책들
● 헌책방에 비싸게 책을 팔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책들
● 고양이가 가축이 되기로 결심한 수수께끼에 관한 책들
●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에서 싸우다 죽은 모든 장수와 병사들의 회고록
● 사랑에 절대적으로 성공하는 비밀에 관한 모든 책들
●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이들의 회고록
● 실패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 관한 책
그렇게 내 상상의 도서관 장서 목록은 끝없이 이어졌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나는 내친김에 또 다른 책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 목록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록이다.
즉 그것은 초기의 원고들이 편집되어 그 원고들이 사라졌거나 또는 작가가 쓰다가 실패했거나, 원고를 잃어버렸거나, 불태워버렸거나, 계획이나 구상 단계에서 작가가 죽거나 실행하지 못한 책들의 리스트였는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게 그 모든 것이 떠올랐다. 이 책들은 모두 내가 상상 속에서 읽고 싶었던 책들이었고, 또 만약 쓰였거나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더라면 모두 인류 문화와 장서가들의 서재를 한층 더 풍부하게 해 주었을 책들이다.
● 진시황이 불태워버린 모든 책들
● 불타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책들
● 사라진 신약성경 복음서들의 최초 원고들로 만든 책
● 위진남북조 시대에 곽상이 편집하기 전에 떠돌던 여러 판본의 『장자』들
● 15세기 전 세계를 항해했던 정화제독이 썼지만 어리석은 중국 관리들이 불태워버린 정화제독의 『여행기』. 만일 이 여행기가 남아 있었더라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을 능가하는 환상적이고 진귀한 여행기가 되었을 것이다.
● 가난에 시달리던 허먼 멜빌이 어느 여행용 궤짝 제작자에 게 원고를 1 파운드당 10센트에 팔아버린 사라진 작품 『십자섬』 혹은 『거북 사냥꾼』
● 괴테가 쓰려고 했던 어느 호랑이의 전기
● 플로베르가 초안만 쓴 채 완성하지 못한 단편 『돈 주앙의 밤』
●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상단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던 『어느 죄인의 생애』
● 샤를 보들레르가 구상만 하다 시작하지 못한 동화들과 어릿광대극. 그리고 벨기에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쓰려고 했던 『가련한 벨기에』
● 워즈워드가 쓰려고 했던 방대한 시집 『은둔자』
●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 메리 셸리가 쓰고자 했지만 출판사들의 무관심으로 결국 쓰지 못했던 여러 책들 스탈 부인 전기,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애, 멕시코와 페루의 정복에 관한 책, 지구의 상고사와 고대 문명사 등등
● 제임스 조이스가 출판사와 벌인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화가 난 나머지 불태워 버린 『영웅 스티븐』
● 토마스 만이 불태워버린 방대한 양의 일기들
● 헤밍웨이의 아내 해들리가 프랑스 리옹 기차역에서 도둑질 당한 여행가방에 든 원고들의 제목을 모르는 책들
● 『인 콜드 블러드』를 쓴 미국의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가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를 넘어서려는 야심으로 1968년 랜덤 하우스와 거액의 선인세를 받고 쓰기로 했지만 1984 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소설 『응답 받은 기도』
한창 넋을 잃고 상상 속의 도서관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려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고양이 까뮈가 내 발치 아래에 앉아 나를 빤히 올려보고 있다.
“네가 내 즐거운 상상을 망쳤구나! 이 놈의 고양이!”
나는 고양이를 번쩍 안아 내 접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고양이는 몸을 꼬더니 금세 쌔근쌔근 아기처럼 잠이 들고 만다.
나는 다시 상상 속의 도서관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한번 끊어져버린 상상의 실은 좀체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 내가 제시한 이 목록에 또 다른 목록을 더 첨가하고자 한다면 이 목록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상상했던 것처럼, 만일 천국이 도서관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책들이 그 천국의 도서관에는 분명 실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우선 천국에 먼저 들어가야 할텐데, 이런, 나는 이미 거기서부터 탈락이 예정되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옥엔 어떤 도서관이 있을까? 아니, 지옥에도 도서관이란 게 있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