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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4호] 햄릿이었던 사람들
머리글
마이애미 해변이 그려진 뉴욕 바의 간판은 늘 낯설다. 싸구려 피자집의 기름 냄새가 찬 공기를 타고 흐르고 허름한 술집에는 50대 남자 두세 명이 낮이고 밤이고 취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서민 아파트의 창은 굳게 닫혀있고 아이들은 어른 흉내를 내며 어슬렁댄다. 그리고 거기, 노란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La cours des trois coquins”
번역하자면 ‘세 명의 장난꾸러기들의 마당’ 정도 되겠다. 이런 곳에 극장을 만드니까 관객이 없는 것이라는 사람도, 이런 곳이니까 극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이름을 들으면 피식 웃고 만다. 노란색 건물만큼 유치한 이름인데, 이 세 명의 장난꾸러기들이 연극계에서는 결코 장난스럽지 않은 대가들, 사무엘 베케트, 조르지오 스트렐러, 타되우즈 칸토르다. 이들의 이름을 딴 공연장이 세 개, 연회실, 연습실, 무대장치를 위한 작업실이 있는,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또 확실히 없는 극장. 이곳에서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이라는 도시의 극단들이 작품을 만들고 공연을 한다.
시에서 지원하는 제작비로 여유롭게 만들어지는 공연도 있고, 빈 주머니에 맨몸으로 뛰는 젊은 극단의 공연도 있다. 국내외 유명 연출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시 중심가의 문화의 집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지역 토박이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객석을 채우는 빈민촌의 아이들, 주머니 가벼운 학생, 취업 준비생, 평범한 아주머니, 술 한 잔을 걸친 아저씨가 있다.
전혀 문화적이지 않은 곳에서 유명하지 않은 이런 동네 연극이 만들어지는 것은 ‘모두를 위한 문화’를 추구하는 프랑스 정책 때문일 것이고, 문화산업이 물질적인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삶의 질의 향상, 사회적인 소통을 위한 산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프랑스 극작가는 말했다. 곧 사라질 예술이라고. 그 작가가 1980년대에 사망했으니까 2015년, 오늘까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종말론을 논할 때는 아니지만 프랑스 연극 역시 생산과 소비시대라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 힘겹게 매달려 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
얼마 전에 연극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10대 남자 아이였다. 눈빛, 행동, 말투, 옷차림, 전 세계 불량학생들을 위한 무료 강좌 동영상이라도 돌아다니는 것인지. 어쩌면 저렇게 국경을 초월해서 똑같이 불량할까.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보냈으니까 오긴 왔지만, 싫은 게지. 공연 내내 시끄럽게 떠들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그래도 궁금한 것은 있었나보다.
질문 시간이 되자, 아이가 묻는다.
“배우하면 돈 많이 벌어요?”
배우들이 웃는다. 고개를 젓는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이가 다시 묻는다.
“그럼 그런 일을 왜 해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배우 중 한 명이 그러더라. 옛날 같았으면 모두가 돈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줬을 거라고. 그러나 서른이 넘은 이 배우는 입을 다물었다. 저 아이가 맞는지도 모르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그래서 부모가 늘 조금 더 벌어야하는 삶에 지치지 않고 다른 것을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아이는 다른 것이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일을 왜 하냐는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열정, 꿈, 사람, 이런 말이 무책임한 것은 아닌지.
작품 하나씩 끝낼 때마다 마지막이라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배우를 안다. 이제 그만 농사짓고 살고 싶다더니 손톱이 흙 때로 까맣게 변했다. 컴컴한 극장이 아니라, 햇빛 보고 풀 보고 사니까 살맛난다던 사람이 한 번만 도와달라는 부탁에 못 이긴 척 무대로 돌아왔다. 손바닥만 한 무대에서 날뛰는 게 풀어놓은 짐승이다. 무대를 기억하는 건 머리가 아니라 몸이라는 64세 배우의 연기는 온 몸이 짜릿하게 섹시하다. 연습이 끝나고, 요즘 애들 연극은 연극이 아니라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영락없는 노인네다. 그래도 어깨동무를 하고 헤드락을 걸고 싶어진다.
“영감, 잔소리는 그만하고 맥주나 한 잔 하자고!”
새파랗게 어린 배우가 노인네 등을 떠밀며 말한다. 한국이었으면 엄마, 아빠 소환되어 욕먹을 일이지만, 괜찮다. 여긴 프랑스다. 그것도 연극판이다. 나이, 학벌, 경력 따질 것 없이 모두가 한 때 햄릿이었던 사람들이다.
‘나는 햄릿이었다.’
우리 연극의 첫 대사다. 이 한 마디를 위해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조명 켜진 무대 중앙까지 걸어오는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멀다는 연극쟁이들.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주부 습진 걸린 스물여섯 청춘과 스스로 퇴물이라고 말하는 살찐 무용수, 짐승처럼 섹시한 영감님, 30대 닌텐도 중독자, 석사 출신 난독증 연출가, 쌍둥이를 업고 오는 조명 감독, 외국인을 담당하는 한국인 보조 연출. 누가 봐도 B급 극단이 B급 공연을 위해 달리는 거다.
누군가는 짠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B급의 세계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당연한 공간이고 당연한 사람들이다. 다만 A급을 위해 존재하는 B급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우리 연극이, 그러니까 B급을 위해 B급과 함께 살고 싶은 B급의 방식이라고 해두자. 이 방식이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과정일 뿐이니까. 가능하면 과정을 살고 싶다.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다. 불편과 불안이 아직까지 불행은 아니다. 그래서 다행이다.
다시 ‘세 명의 장난꾸러기들의 마당’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곳의 첫 번째 목적은 창작을 위한 장소다. 공연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시에 속한 극단들이 창작할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창작이 있고, 공간이 있고, 사람이 있고, 그러다보니 연극이 지나치게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경향도 생긴다. 극장에 있는 순간만큼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거다. 비슷한 놈들끼리 모여서 비슷한 거 하다보면 그게 정말 맞는 것 같이 느껴지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과정의 기쁨이 안정된 삶과 바꿀 수 있을 만큼 세포를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문을 열고 나가면 순식간에 무너질지라도.
어쨌든 이곳에 들어서면 사무엘 베케트가 웃고 있는 희귀본 사진이 걸려있다. 이 양반이 잘 웃지를 않아서 웃는 사진이 드물단다. 그 사진을 보며 베케트처럼 심각하고 대단한 연극인이 되리라 다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베케트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는 있다. 고도가 무엇인지 진지한 토론은 아닐지라도 한 번쯤 묻고 생각한다.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창작의 시작이고 과정이니까. 물론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가 싸우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맥주 한 잔에 풀리기도 한다. 그것이 또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얼마 전에 극장 앞에서 그 때 그 소년을 다시 만났다. 불량 청소년만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탓에 모른 척 지나가려고 했건만, 그 녀석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마추어 연극 클럽에 가입했단다.
지금 생각하면 자랑하고 싶어서 아는 척을 한 것인데, 그때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연극? 왜?”
“쿨하니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녀석도 웃는다. 이제 보니 불량한 게 아니라 끼와 흥이 많은 거라고 또 내 멋대로 판단한다.
녀석에게 이번에는 햄릿기계라는 연극을 한다고 말해줬다. 홍보는 보조연출의 몫이기에 거짓말도 했다. 진짜 쿨한 연극이라고.
녀석에게 이번에는 햄릿기계라는 연극을 한다고 말해줬다. 홍보는 보조연출의 몫이기에 거짓말도 했다. 진짜 쿨한 연극이라고.
그 녀석이 묻는다.
“햄릿도 아니고, 햄릿기계는 뭐죠?”
반가웠다. 이번에는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질문이었으니까. 극장에 와서 보고 이야기하자고 약속했다. 열심히 하란다. 제목이 쿨하니까 잘될 것 같다고 했다. 고마웠다. 우린 관객이 하나 생겼고, 그 아이에게는 쿨한 것이 하나 생겼으니까. 그 쿨한 것이 뜨거운 무언가가 되기를 바란다. 살다가 누가 찬물을 끼얹어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뜨거워지기를.
오늘도 찬물을 맞았다.
시에서 예산이 줄어서 제작비 지원을 거의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이쯤 되면 무섭기도 하고 꼭 해야 하나 싶다. 그런데 어쩌나, 이미 시작했는데.
단원들이 말한다.
그냥 하자. 온다고 약속한 관객도 있고. 어쨌든 이번만큼은 그냥 해보자.
그리고 그만두자. 진짜 마지막이다.
거짓말이다.
얼굴에 분칠한 것들의 새빨간, 절절한 거짓말이다. 그러니 믿지는 않지만 속는 척은 해준다. 누가 그러더라. 연극이 결국 속이고 속아주는 놀이라고. 속이는 사람도 속는 사람도 이로웠으면 한다. 욕심이다.
아직 뜨거운 30대의 철없는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