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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4호] '대창 이용원' 이종완 이발사
나무 전신주는 처마를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검은 칠은 세월에 흘러 내리고 씻겼지만 온몸으로 빨아들인 먹색은 화선지 위에 엷은 묵빛마냥 은은하다. 볕이 잘 닿지 않는 둥근 전신주 한쪽 면에는 녹색 이끼가 피어 올랐다. 가게 출입구는 북향이다. 본래 가게는 남향으로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곳에 이발소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골목길 맞은편, 출입구가 남향이었던 건물에 세를 얻어 이발소를 개업했다.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지금 이발소 자리 건물을 사들였다. 북향인 그곳은 미용실에 세를 주었다. 그곳에서 받은 월세로 이발소가 내야 할 세를 내면 결국 똑같다는 계산이 나와서다. 그런데, 계산이 어긋났다. 이발소 월세가 훨씬 빠른 속도로 올랐다. 북향이지만 이발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 299-142번지, 지금 자리다.
간판은 이가 맞지 않은 채 마감이 벌어졌다. 하얀색 플라스틱 간판 재질은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가 막 나온듯한 낯선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이 건물과 영 어울리지 않지만 제자리인 양 앉았다. 안방 한구석에 주억거리며 앉아 있는 작은 할머니처럼 말이다. 짙은 파랑과 짙은 붉은색으로 표시한 상호도 눈에 잘 띄기는 하는데 아슬아슬한 비례를 유지한다. 유리 출입문에 붙인 가게 이름과 전화번호는 글자와 숫자에 한껏 모양을 내고 비스듬히 누이는 효과도 연출하면서 정성을 들였지만, 정확하게 제자리에 붙지 않은 자유분방함을 보인다.
가게 오른쪽 이발소 사인물은 붙들고 있는 앵글에 기운이 빠졌는지 살짝 누웠어도 신나게 잘 돌아간다. 모든 ‘아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섬세함 대신에 여기저기 보이는 빈틈이 묘한 이완감을 준다. 이 모든 것은 세월의 힘이다.
‘대창 이용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짧은 소파 옆, 연탄난로 곁에 이종완 이발사가 앉아 있다. 목 매듭 부분을 넓게 한, 옅은 하늘색 넥타이를 단정하게 맸다. 이발소에 출근하면 여름이건 겨울이건 늘 그렇게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다. 소파 앞, 낡은 타이어 세 개와 유리 한 장을 이용해 만든 테이블에 펼쳐 놓은 신문지 위에는 빨대가 꽂힌 빈 요구르트병 열네 개가 흐트러뜨린 피라미드 모양으로 가지런히 서 있다. 오늘 이발소를 찾은 사람이 최소한 열네 명 이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발을 끝마치고 겉옷을 챙겨 입은 손님에게 이종완 씨는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건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지금도 하루에 열 명에서 열다섯 명씩은 꾸준히 대창 이용원을 찾는다. 주말에는 스무 명이 훌쩍 넘기도 한다. 나이 일흔여덟에 용돈벌이는 넉넉하게 하는 셈이다. 옛날 어른들이 ‘기술을 배워야 한다.’라고 그렇게 강조한 이유가 다 있다.
“사실, 내가 환갑 때까지만 이발소를 하고 그만두려고 그랬어. 근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까, 너무 젊은 거야. 기차 탈 때도 경로우대로 표를 사려면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나 친구도 그만두면 무얼 할 거냐고! 계속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그런데 마침 이 동네 개발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개발이 일어나 집이 헐릴 때까지만 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 했네. 그때는 이렇게 오래걸릴지 몰랐거든. 지금이야 개발이 언제 될는지 알 수가 없어. 도로를 널찍하게 낸다고 바로 옆집은 조만간 뜯을 것 같던데.”
그리 넓지 않은 이발소 안에서 자로 잰듯 정확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이런저런 도구를 챙겨 손님 머리를 만지는 이종완 씨는 지금도 허리가 꼿꼿하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60대라고 해도 쉽게 믿을 만큼 정정하다.
이종완 씨 고향은 조치원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신안동에서 1937년에 태어났다. 9남매 중 네 번째다. 호적에는 1939년생으로 올랐지만, 그 시대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장질부사나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뜰까 걱정스러워 한 2년 두고 보아서 그렇다. 광복하던 해 들어간 국민학교에서는 공부도 곧잘 했다. 담임이 ‘공부만 계속해도 출세하겠다.’라고 격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은 이종완 씨가 계속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육이오가 났어. 인민군이 내려와서 한 3개월 머물렀는데, 맨날 저녁이면 불러 모으는 거야. 소년병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모아놓고 김일성 찬양하는 노래만 주구장창 가르쳤다니까. 국민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맨 그런 노래였어.”
그리고 다음해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다. 480명 모집하는 시험에 48등으로 합격했다. 상위 10%였다. 위로 형들과 누나가 이미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 힘들었지만, 넷째 이종완 씨도 학교를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교복과 교모, 가방도 사주었다. 그러나 이종완 씨가 중학생이었던 것은 불과 한 달 남짓이다.
“한 2주 지나고 나서 월요일 아침 조회를 하는데, 입학금을 못낸 학생을 전부 앞으로 불러내는 거야. 480명 중에 150명이 앞으로 나오더라고. 그렇게 망신을 주는 거지. 그리고 매주 아침 조회 때마다 불러내는데, 마지막에는 대략 20명 정도 남더라고. 교문을 잠가 아예 못 들어오게 하는 거야. 그러니 어떡해 그냥 집에 있어야지.”
당시 입학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내야 할 입학금이 만약 10만 원이었다면 보결로 입학하는 학생이 내야 할 돈은 50만 원이었다고 한다.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학교 입장에서는 재정도 녹록지 않은데 보결 학생을 많이 받을 수록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다. 유예기간 동안 독촉 후 그래도 입학금을 못내는 학생은 가차없이 교문 밖으로 쫓아냈다.
“전쟁통에 입학금을 어떻게라도 융통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신 모양이여. 그러니 교복도 사 주었겠지. 다들 어려운 세상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집에서 조금 쉬면서 농사일도 거들었다. 아버지는, 대전에 살던 아저씨뻘 되는 친척 소개로 이종완 씨를 철공소에 보낸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기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 무렵, 겨울에 시작한 철공소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겨울은 그냥도 추웠는데 쇠붙이까지 만져야 하니, 더 추웠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철을 만지는 일이어서 더 거칠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그 힘든 이름을 가진 공구를 찾아오라고 할 때 제대로 가져다 주지 못하면 기술자가 들고 있던 쇠붙이로 쥐어터지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쇠붙이를 만지며 일하다보니 온몸이 지저분했다. 집을 떠나 타향에서 생활하며 제대로 씻지도 옷가지를 잘 빨아입지도 못하는 환경에서 그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열다섯 살 소년이 감내하기에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판단은 빨랐다. 한달 남짓으로 철공소 생활은 막을 내렸다.
다음에 찾은 기술이 ‘이발’이다. 친척 아저씨가 살던 신안동에 ‘신안 이발소’였다. 그곳에는 기술자 세 명에 면도사 한 명이 있었다. 청소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머리 감기는 것부터 배웠다. 2년 정도 그곳에 머물며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옮긴 곳이 원동에 있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청이발소’였던가? 아무튼 그곳에 갔지. 거기서 이발 기술을 완벽하게 배울 수 있었어. 이발 기술을 다 배우는 데까지 대략 5년 걸렸어. 그리고는 바로 군대에 갔지.”
육군훈련소에서 통신병과를 받았다. 훈련을 모두 마치고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마침 대전에 있던 통신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원동에 있던 이발소를 자주 찾아왔던 단골 중사였다. 그이가 그곳에서 하는 일이 장병을 부대에 배치하는 일이었다. 여차여차 해서 육군본부에 발령을 받았다. 다른 지역보다는 비교적 편한 곳이었다. 군생활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제대할 즈음인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제대가 한달반이나 늦어진 것을 빼면 말이다. 덕분에 군생활을 37개월이나 했다.
제대하고 삼성동에 있던 미영이발소에 취직했다. 그리고 1964년에 결혼하면서 일하던 미영이발소를 인수했다. 그곳에서 얼마 안 있다가 소제동 지금 자리 건너편에 ‘대창 이용원’을 개업했다. 가게 이름은 주변 사람이 아이 이름 짓기를 청할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있었던 아버지가 지었다. 큰 대(大)자에 창성할 창(昌)자를 썼다. 대창 이용원을 개업할 당시 소제동은 중구 대흥동, 선화동과 함께 대전에서 제법 괜찮은 동네로 꼽혔다. 이종완 씨는 세 번째로 좋은 동네였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철도청 소유지였고 그들의 관사가 마을을 이루었는데, 나름 직급이 있는 고위직이 모여 살던 곳이었단다. 집을 옹종맞게 짓지 않아 터가 널찍하니 시원했다.
“그러다 철도청이 토지와 주택을 불하했지. 시세보다 거의 1/3은 싼 가격으로 넘긴 거야. 그리고 남은 땅도 민간에 매각하면서 관사와 관사 사이에 일반 주택이 끼어들기 시작했어. 동네가 복잡해지기 시작한 거지.”
소제동 대창 이발소에는 손님이 늘 넘쳐났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가 호황기였다. 그 조그만 대창 이발소에 하루 150명에서 많게는 200명까지 손님이 들었다. 당시 직원만 다섯 명이었다. 화장실도 교대로 가야 하고, 신간 만화책과 텔레비전을 갖춘 안채 방에서는 넋놓고 기다리다가 정작 이발도 못한 채 그냥 돌아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당시에 주변 대전상고나 동아공고, 계룡공고 등에 다니는 학생이 전부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갔다고. 버스 노선이 지금처럼 잘 정비되어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많이 걸어다녔지. 회사원도 당연히 많이 다니고. 상술이라고 해야할까?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귀하고 만화책도 귀할 때잖아. 신간 만화를 잘 구비해 놓으면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통학 열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에 만화책이나 텔레비전 보고 싶어서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았지.”
열다섯 살에서 일흔여덟 살까지, 60년 넘게 이발 가위와 빗을 잡으며 돈도 적잖게 벌었다. 어지간한 직장생활 한 사람보다 훨씬 나았다. 이발소가 한창 바쁠 때 가게에 나와 청소도 하고 머리도 감겨주었던 아내 송기철(74) 씨 사이에 삼남매를 두었고 돈이 없어 가르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면 이종완 씨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발이 적성에는 맞는 것 같다.”
이발소 한쪽에는 흰색 타일로 마감한 세면대는 1960년대 중반, 가게문을 열었던 그때 그 모습이다. 세면대 옆에는 큰 전기밥솥이 있다. 그곳에는 찬밥대신 온수가 따뜻하게 담겨 있다.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온수통이다. 이날 머리숱이 그리 많지 않은 40년 단골이 동구 가양동에서 이곳까지 어김없이 찾아왔다. 유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저 멀리 신탄진에서까지 단골손님이 찾아 온다. 이종완 씨가 은퇴하지 못하는 큰 이유중 하나다.
“나에게 머리를 깎겠다고 그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 둘 수가 있겠어.”
온수통에 수건을 담가 꼭 짜서, 머리카락을 덮어 물기를 먹인 후 이발을 시작한다. 전기 이발기로 머리 끝을 다듬은 후 본격적으로 가위질을 시작한다.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법 긴 시간이 흐른다. 손 면도기로 주변 잔털을 제거하고 나서야 이발이 끝난다. 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한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털어낸 후 금세 옷을 갈아 입고 염색약을 개어 온다. 염색을 다 했는가 싶었는데 이발 의자를 뒤로 완전히 젖힌 후 안면에 따뜻한 수건을 덮어 놓고, 면도 거품을 준비한다. 연탄난로 연통에 면도거품 솔을 문질러대더니 면도할 곳에 잘 펴서 바른다. 면도칼을 들고 안면부 면도를 시작한다. 손길은 세심하면서 거침없다. 40년 동안 만져 온 얼굴의 굴곡을 따라가는 손끝이 눈을 감아도 문제 없을 듯 익숙하다. 면도까지 마치고 나서야 40년 단골은 이발 의자에서 내려와 세면대로 향한다. 주둥이 부분에 까만 염색약이 물들어버린 파란색 플라스틱 물조리개에 따뜻한 물을 담아 머리에 적당히 부으며 머리감기를 시작한다. 이발기술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웠던 머리감기기가 이발 과정에서는 제일 끝이다. 세면기에 따뜻한 물을 담아 40년 단골이 직접 세수할 수 있도록 한 후 새 수건 한 장을 꺼내 연탄난로 연통에 감싸 따뜻하게 뎁힌다. 이발사는 연통에 뎁힌 수건을 40년 단골에게 건넨다. 한 시간 남짓 걸린 이 모든 과정 중에 둘 사이에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대화는 한 마디도 없었다. 40년 단골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이발 의자에 앉았고 모든 과정이 끝난 후 난로 곁으로 걸어와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을 뿐이다. 40년 단골은 옷을 챙겨 입고 이종완 씨가 건넨 요구르트를 마셨다. 40년 단골은 다 마신 요구르트 병을 짧은 소파 앞, 응접 테이블에 펼쳐놓은 신문 위에 내려놓는다. 이제 빈 요구르트병은 열다섯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