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96호] 기억의 바다_팽목항에서
`
마을은 벌써 새카만 밤이다. 오후 여덟 시, 도시의 한밤중에는 볼 수 없는 어둠이 마을을 뒤덮었다. 마을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어서 붙었다는 이 마을의 이름은 팽목마을이다. 배 끊기는 시간이 되면 많은 게 멈춘다. 밤이면 보이는 빛이라곤 하늘에 뜬 별빛뿐이었다. 지난해 4월 16일 이후 많은 게 변했다. 그중 하나가 밤에도 땅에 내려와 앉는 노란 불빛이다. 저 멀리 항구에서 ‘이곳’임을 알리는 노란 리본이 빛을 낸다.
그 항구의 이름은 ‘진도항’이었다. 2~3년 전에 가까운 항구 몇 개를 합해 ‘진도항’으로 묶었다. 팽목항이라는 이름은 2~3년 전부터 쓰지 않는 이름이었다. 요새는 개명한 이름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팽목항’으로 부른다.
새까만 바다 위 항구를 오랜 시간 서성였다. 주저앉았다가 일어섰다가, 그렇게 그곳에 머물렀다. 저기 멀리서 가깝게 오다가 멀어지는 한 남자의 발걸음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저기….”하고 말을 붙였다. 그 사람이 입은 옷에는 ‘POLICE’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지난 1월 이후 팽목 마을 안에는 또 다른 마을이 들어앉았다. 마을 입구를 지나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시민단체에서 파견된 이들, 그들을 돕기 위해 진도를 찾은 사람들, 분향소 등이 군락을 이루어 마을 한곳에 또 다른 마을을 만들었다. 그곳을 지키기 위해 경찰도 머물렀다. 낮과 밤, 교대해가며 팽목마을을 순찰한다. 컴컴한 밤에 항구를 서성이는 여자를 보니 ‘혹시’나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싶어 불안함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오늘 밤, 머물 자리를 찾자 그가 알려준, 항구 앞 ‘민박’이라고 붙은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서 소주 한 잔을 들이켜던 아저씨는 “조도 가게?”라며 밝은 웃음을 보였다. 세월호 때문에 왔다고 하니 비었던 술잔에 말없이 소주를 채웠다. 입가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난 다른 주민에게 아저씨의 씁쓸한 웃음의 원인을 찾았다.
“예년까지는 주말에도 버스가 몇 대씩 들어오던 동네였어요. 여기서 조도로 들어가기 전에 한바탕 놀다 가는 거지. 그런 관광객들이 지금은 없어졌죠. 눈치가 보이니까 여기서 놀기가 애매한 거야. 배 운영하는 선사들도 죽을 지경이야.”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야 민박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왔던 길을 되돌아 마을로 갔다. 여전히 컴컴한 마을에서 방 하나를 구했다. 그 민박집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30여 가구 남짓 산다는 작은 마을인데 항구 앞에 하나, 마을에 둘이나 민박집이 있었다.
아침 여섯 시, 눈을 떴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주인장은 새벽같이 일어나 멀리 나가야 하는 뱃사람들이 근처 민박집에 많이 묵는다고 했다.
“뱃사람들 받으면 다른 손님 받기가 민망스럽더라고. 담배냄새도 많이 나고, 치우기도 힘들고. 그래서 지금은 많이 받지 않는데…. 요즘은 손님이 많이 없어~”
일어나지지 않는 몸을 뒹굴다 보니 점점 해가 밝았다. 여섯 시 반 즈음 몸을 일으켜 씻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 일곱 시, 어둠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마을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마을의 하루는 일찌감치 시작한 듯 보였다. 분주히 움직이는 마을 사람, 항구로 나가는 차가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밤 고요함과는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 팽목항 분향소’가 보였다. 항구로 가는 길이었다. 아직,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분향소 근처에 숙소로 보이는 컨테이너 집과 화장실 등이 보였다. 그곳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을 알리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이 생활하고 있었다. 멀리서, 두 마리의 진돗개와 산책하며 아침을 맞이하는 한 여자를 보았다.
항구에서 다시, 밤에 보지 못한 것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고창석,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아직 찾지 못한 실종자의 얼굴과 이름이 이곳저곳에 남았다. 100m 남짓 되는 긴 항구에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림과 글씨, 리본, 그들이 좋아했을 만한 물건이 촘촘히 놓였다. 그리고 지난밤부터 귓가에 머물며 떠나지 않았던 풍경소리가 다시 들렸다. 파도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힘없이 울리는 풍경소리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 도저히 분향소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에서 왔어요? 아이고…. 저는 보령에서 왔어요. 아니…. 그냥 애기 아빠랑….”
우리 엄마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것 같은, 등산복 차림의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과 함께 여행 중이다. 와봐야 할 것 같아서, 곳곳을 다니다 팽목항에 왔다. 조심해서 가라는 말을 덧붙이며, 자리를 떠났다. 부부 말고도 두 차례 더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목포에서 왔다는 30대 남자는 일 때문에 배 탈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항구를 눈에 담는다. “참, 깝깝하죠.”라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배를 타러 떠났다. 부산에서 왔다는 50대 남자는 ‘기억의 벽’을 찬찬히 훑었다. “팽목항이 어떻는고 보고 싶어서 왔따꼬.”라던 그는 오랫동안 선장을 원망했다. 분향소로 가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 들어가기가 어쩐지 망설여졌다. 이제야 왔다는 것도, 무엇 하나 한 게 없다는 사실도, 마음을 자꾸 괴롭혔다. 오전 아홉 시였다.
괜히 둘러본다는 핑계로 서성이니 벌써 열 시였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분향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난해 11월, 실종자 수색 작업은 중단되었다. 세월호 범정부사고 대책본부도 해체되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는 지난 1월 14일 오후 4시 16분에 분향소 문을 열었다. 실종자들과 가장 가까운 곳, 아직도 찾지 못한 아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분향소를 지키기 위해, 유가족이 된 사람들과 아직 실종자 가족인 사람들이 이곳을 지킨다. 현재 다섯 명 정도와 경찰들, 몇몇 시민단체 관계자가 이곳에서 상주한다.
빽빽하게 빈틈없이 걸린 사진 때문에 머리가 혼미했다. 순간적으로 향을 먼저 피워야 할지 절을 먼저 해야 할지, 묵념해야 할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멈칫멈칫 사진 앞에서 꾸물대자 뒤에 서 있던, 찬민 학생 아버지가 향을 먼저 피우고, 묵념이나 절을 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흐릿한 눈으로 눈앞을 부옇게, 일부러 아무것도 보지 않고, 첫 번째 분향을 마쳤다.
“걔들 이름은 ‘팽’이랑 ‘목’이에요.”
주변만 빙빙 돌다가 분향소에 있던 엄마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을 보았다. 또 다시 주변을 빙빙 돌다가 아침에 만났던 진돗개 두 마리가 묶여 있는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아 있는 나를 찬민 아버지가 보았다. 팽이와 목이는 두 달 전, 진도 농민회에서 ‘이곳에서 키워보는 게 어떻겠냐’라며 데리고 온 강아지들이었다. 낯가림이라고는 없는 팽이는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마구 달려들어 애교를 부렸다. 목이는 다가가자마자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로 주변을 빙빙 돌다가 팽이와 목이 곁에 다섯 번째쯤 왔을 때, 목이가 제 배를 내주었다. 찬민 아빠도, 다른 유가족들도 팽이와 목이에게 정을 주었다.
“일이 있으면 하루나 이틀, 내려갔다가 계속 여기 있었어요. 유족회에서 반별로 1박2일로 교대해서 내려오고, 상주하는 분은 다섯 명 정도…. 찬민이를 보내고 나서도 계속 왔어요. 애를 마지막으로 본 데가 여기였어요. 애한테 죄를 많이 진 것 같아요. 안산 올라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고요. 글쎄요. 애랑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우리 애가 있던 곳이잖아요.”
찬민 아버지는 안산보다는 이곳이 마음이 편하다. 이 마을에 아예 자리를 잡을까도 생각하고 있다. 유가족 중 몇이 그런 생각으로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그곳 팽목마을이 그에게는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잊지 않고 와주는 것만으로도 크게 감사합니다.”
이제야 찾아서 너무 죄송하다고 보자마자 고개를 숙인 내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다시 분향소에 들어갔다. 과일과 과자 등 먹을 것이 사진 앞에 놓여 있었다.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의 자리에는 사진 대신 글씨가 쓰여 있었다.
‘엄마를 찾아야 아들 가슴에 여한이 없지’, ‘현철아 엄마 아빠는 숨 쉬는 것도 미안해’
하나씩 얼굴에 눈을 맞추고 들여다봤다. 너무 많았다. 정수는 왼쪽 위 가장 처음에 있는 아이였다. 휴지를 건네주던 정수 삼촌이 커피를 타주었다. 삼촌은 정수가 고등학교 1학년인 줄 알았다. 단원고등학교가 아니라 선부고등학교에 다니는 줄 알았다. 당연히 뉴스도 우리 조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데다 4월 16일, 휴대전화기를 집에 두고 출장을 갔다. 연락에 연락을 타고, 겨우 4월 17일이 되어서야 정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에 나오던 그 아이 중 한 명이 정수였다니. 부랴부랴 진도체육관으로 갔다. 아수라장이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삼촌은 형님과 함께 그곳에 계속 있었다. 시신이 나올 때마다 꼭 가서 보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바다에서 나오는 시신의 얼굴이 많이 달랐다. 상대적으로 모공이 크고, 화장품을 바르지 않은 남자아이들의 얼굴이 더 빨리, 망가져 있었다. 정수를 보고 놀라지 않기 위해서, 정수가 어떤 모습으로 나와도 좋은 얼굴로 맞이해주고 싶어서, 삼촌은 바다에서 시신이 나올 때마다 확인했다. 지금까지 총 아흔 구의 시신을 눈으로 보았다.
사고 18일째인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팽목항을 방문했다. 삼촌은 그녀를 피해 바지선 근무를 나갔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바지선으로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VIP가 온다’는 소리에 잠수사들은 예행연습을 하고, 바지선을 청소하고, 부산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삼촌은 그게 보기 싫어 바다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 정수의 시신을 찾았다. 삼촌이 바라보던 바다 쪽에서 시신이 올라왔다. 정수인 것 같았다. 잠수사들이 투입되었다. 정수일지 아닐지,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정수여도 아니어도 마음이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수인 것 같다고 말했다. 확실하냐고 되묻는 형에게 확실하지 않지만, 정수인 것 같다고 되풀이했다.
“247번째로 정수가 나왔어요. 19일 만에 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250번이 넘어가면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 때였어요. 정수가 나오고, 안산에 돌아가 장례를 치렀는데 도저히 생활을 못 하겠더라고요. 매일 술을 마시고, 팽목항에 왔어요. 제가 자꾸 이러는 데다가 마침 세월호 참사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힘을 보태야 한다니까 형님이 제게 부모들 대신에 얼마간 힘 좀 보태달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의 ‘팽목항’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외면했던,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실은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진실을 통렬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부모들이 평범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회의 문제를 외면할 때 결국 화살이 돌아오는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침묵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터득한 이 성찰 이후 부모들은 우리의 가장 밑바닥인 ‘영혼의 중심’이 되었다.”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금요일엔 돌아오렴』여는 글 중
아침보다는 많은 사람이 팽목항을 찾았다. 타일에 쓰인 글씨를 소리내 읽기도 하고, 실종자 한 명 한 명을 눈에 담기도 했다. 나는 다시, 진도를 벗어났다. 1950년 산내학살사건,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95년 삼풍백화점 사건, 2003년 대구 지하철 사건,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 등 이름만 들어도 그 참담함이 느껴지는 사건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야 했다. 아직도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어떤 엄마의 곁에, 우리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