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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4호] 중앙시장 한복집
대전천을 가로지르는 여러 다리 중 은행교를 건너 중앙시장에 들어섰다. 태전마트를 지나, 헌책방 거리도 지나니 하나둘 주단 가게가 모습을 드러낸다. 작년 새로 지은 청소년문화센터를 마주하고 ‘장미’, ‘수림’, ‘송원’ 이름도 화려한 주단 가게가 줄줄이 서 있다. 바짝 붙은 건물마다 곱디고운 자태로 윤나는 한복을 입은 마네킹이 쇼윈도 너머 모습을 드러낸다. 마네킹 뒤로 비단과 명주, 한복 옷감이 미스코리아보다 더 고운 자태로 차곡차곡 쌓여있다. 고급스러운 주단 가게에 감히 들어서기 무서워 결국 밖에서 가게 안을 힐끔거리기만 했다. 줄줄이 늘어선 주단 가게를 따라 마네킹을 구경하며 죽 걷다 좁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 더 깊은 곳으로, 더 좁은 곳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지금 중앙메가프라자라고 이름 붙은 그곳은 옛날 중앙시장 A동이라 불리기도 했고, 현대 백화점이라 불리기도 했다. 중앙시장 A동 옆에는 비슷한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중앙시장 A동, 신중앙시장 B동, 중앙도매상사 C동이다. 옛날부터 중앙시장 A동에는 주단과 포목, 한복을 파는 상인이 많았다. 1987년 9월 22일 자 경향일보에서 추석 연휴를 앞두고 중앙시장 A동에 자리한 한복집과 주단 가게에 손님이 없어 걱정이라는 내용과 함께 세 건물의 역사를 설명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에는 1969년 중앙시장 A동에 불이 났었다는 내용을 함께 전한다. 중앙시장을 주름잡던 세 건물은 5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시장과 함께 보냈다. 70년대 중앙시장 A동 1층에는 주단 가게가, 2층에는 현대 백화점이 그리고 3층에는 한복집이 있었다. 백화점이 빠져나간 후에는 주단 가게에서 옷감을 보관하는 창고로 2층을 사용했다. 지금도 여전히 1층은 주단 가게, 2층은 창고, 3층은 한복집이 남아있다.
중앙시장 A동 1층에 들어서자 넓은 공간에 여러 주단 가게가 3~4평 남짓 공간에 주단을 늘어놓고 가게를 열었다. 대로변에서 봤던 고급스런 주단 가게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썰렁한 공기, 손님이라고는 건물을 통해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가 전부다. 누구 하나 공간에 발 들여놓기 무섭게 주단 가게 주인들은 “뭐 찾으세요? 물어보셔도 돼요.” 라는 말을 내뱉으며 다급하게 손을 흔든다. 손님이 사라지자 조용한 공간에는 간간이 들리는 TV 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울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2층을 지나 3층에 도착했다. 복도 양옆으로 칸칸이 자리 잡은 작은 방들, 그리고 미닫이문 앞에 놓인 다소곳한 한 켤레 신발이 보인다. 방마다 켜진 형광등 불빛이 복도를 비췄다. 문 너머 소곤소곤 작은 말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복’이라고 적힌 빨간 간판이 방 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1층 주단집에서 주단을 골라오면 여기서 치수재고 치마, 저고리, 두루마기 다 만들었어. 치마 하나에 5천 원, 저고리 1만 원 다 따로 받았지. 한복 한 벌을 한 사람이 다 만드는 게 아니고 저고리만 만드는 사람, 치마만 만드는 사람 이렇게 다 따로 있었어. 한 벌을 온전히 다 만드는 이는 거의 없지. 나도 치마는 안 해. 다른 이에게 주고 저고리, 조끼, 두루마기, 마고자만 만들어.”
3층에 자리 잡은 작은 방의 비밀, 한복집이라 부르던 허름하고 조촐한 그곳에서 여인들은 미싱을 돌리며 한복을 만들었다. 그이는 저고리를, 저이는 치마를, 이제 막 한복을 배우기 시작한 이는 잔심부름을 했다. 양팔을 벌리면 딱 맞을 너비에 크게 두 걸음이면 끝나는 좁은 공간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인들과 한복감을 들고 한복을 지으러 올라오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스물여섯, 처음 한복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는 최수년 할머니는 올해로 51년째 한복을 만들고 있다. 중앙시장 A동에 ‘현대한복’을 연 지는 올해로 44년이 됐다. 한복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고 7년 동안은 시장 구석에 있던 ‘우리한복’에서 미싱을 돌리고 잔심부름을 하며 한복 만드는 일을 배웠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서 일곱 살까지 살다가 광복되면서 한국으로 나왔어. 그때 일제 미싱을 가지고 나왔는데, 우리 엄마가 미싱 다루는 솜씨가 참 좋았지. 나도 자연스럽게 아가씨 때부터 미싱을 돌렸어. 미싱 돌릴 줄 아니까 한복을 배워보자 한 거야. 가르쳐 주는 게 어디 있나, 미싱 3~4년 돌리다 보면 저절로 배워지는 거지. 바빠서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어.”
‘두루마기 시다’부터 시작해 78세가 다 되도록 할머니는 많은 이의 한복을 지었다. 미싱을 세 번이나 바꿨고, 다림질 판이 다 벗겨지도록 일했다. 할머니 기억 속에는 여전히 한복을 지으려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던 그때가 생생히 남아있다.
“70년대는 안 바쁜 날 없이 매일 손님이 많았어. 구정, 추석은 말할 것도 없고, 결혼식이다 환갑, 칠순 잔치다 한복을 많이들 입었으니까. 밀려드는 일거리에 밤새는 날도 많았지. 명절 앞두고는 손님들이 한복집에 앉아 한복 지어지기만 기다리다 받아가고 그랬어. 그때는 돈 셀 틈이 어디 있어 그냥 주는 대로 받고 보내는 거지. 겨울 김장할 때나 학생들 대학 시험 볼 때 그때만 잠깐 한가하고 늘 바빴어.”
밤을 새워 일해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일거리가 많았다. 약속 날이 되었는데도 한복을 다 짓지 못해 저고리만 만들어주고 도망가버린 이들도 몇 있었다. 한복 한 벌 짓는데 손이 빠른 이도 이틀은 꼬박 바느질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힘들다는 생각도 안 했다. 말도 못하게 좋은 시절이었다고, 예쁘게 지은 한복을 입고 나서는 이들을 보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었다고 할머니는 그 옛날을 추억했다.
“2층에 현대백화점 있을 땐 주말마다 여로(1972년 KBS1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보려고 2층 텔레비 파는 데로 우르르 내려가 보고 그랬는데….”
많은 사람으로 붐비던 중앙시장 A동은 흐리는 말끝처럼 저 멀리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냉랭한 기운만이 중앙시장 A동을 채운다. 1층 주단 가게 손님이 줄어 한복집을 찾는 손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드문드문 찾아오는 단골손님이나 봄, 가을 결혼식이 많을 때나 일거리가 있다.
“요즘은 결혼할 때도 신랑, 신부, 양가 부모만 입지 가족이 전부 한복 해 입지는 않잖아. 그것도 전통한복으로 바지, 저고리,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 온전한 세트로 맞추는 게 아니고 바지, 저고리, 배자 딱 이렇게만 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그러니 용돈 벌이밖에 더 되겠어?”
그마저도 한복 대여나 기성품으로 대체하는 사람이 늘어 한복집을 찾는 이는 해가 갈수록 더 줄고 있다. 권리금을 받고 방을 내주던 그때, 지금은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이나 겨우 받아 방을 뺀다.
복도를 비추는 불빛이 하나씩 꺼져간다. 온종일 미싱 앞에 웅크리고 덜덜덜 바느질 하던 할머니의 한복집도 언제 불이 꺼질지 알 수 없다.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라고 말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썰렁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