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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4호] 단편영화 <코스모스 액자(가제)> 촬영현장
카메라 ‘롤’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팽팽한 기운이 감돈다. 회색빛이 감도는, 햇볕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날이었다. ‘S#21 거실 - 늦은 오후’를 연출하려고 지는 해가 들어오는 듯한 거실로 만들었다. 베란다 문으로 가려 놓은 커다란 조명이 ‘지는 해’ 역할을 맡았다. 1월 16일, 단편영화 <코스모스 액자>의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서경숙 선생님이 제 영상 관련 수업을 들으셔서 인연이 되었어요. 대화하다 예전에 박철수 감독님과 영화 작업을 오래 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대전독립영화협회 민병훈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시나리오는 있고,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데, 어떤 배우가 좋겠냐는 서경숙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대전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대전독립영화협회에 영화를 출품했던 학생들이나 영화를 꿈꾸는 학생들이 제대로 된 영화를 찍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영화는 ‘협업’이 중요한데 자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전에 사는 대학생을 모아서 함께 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스무 명 남짓한 대학생과, 두 명의 연극 배우가 모였다.
“자본이 많지 않아서 서울에서 알던 분들에게 촬영이나 진행을 부탁하고, 배우만 대전에서 구하려고 했어요.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도와줘서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죠. 스태프진으로 꾸려진 학생들이 정말 잘해줘서 고마웠어요.”
서경숙 감독의 이야기다. 영화감독이 꿈이거나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학생이 모였다. 모두 대전독립영화협회에서 인연이 된 학생들이다. 조연출, 음향감독, 미술감독 등 모두 하나씩 역할을 맡았다.
촬영에 쓰일 소품인 '피'를 제작하고 있다.
“대전에서 대학생영상제를 기획해서 추진하다 민병훈 사무국장님을 만났어요.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협업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서 당연하게 진행했거든요. 대전에서는 그게 가장 힘들더라고요. 결국, 투자받는 게 잘 안 돼서 영상제를 개최하지 못했어요. 그것 때문에 자괴감이 들고, 정말 힘들었어요. 이번에는 뭔가 어그러지는 일 없이 제대로 끝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뿌듯했어요. 영화 때문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작업한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한데, 이게 결과물로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더 떨리죠. 앞으로 영화 제작 쪽 일을 하고 싶어요.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미술팀장을 맡은 이송이 씨의 이야기다. 송이 씨는 올해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3학년이다. 송이 씨 말고도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는 새내기, 졸업을 앞둔 학생 등 열 명 남짓한 스태프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저는 연출부에서 일정을 짜고, 함께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슬레이터 치는 그런 일을 맡아서 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동아리였어요. 현장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선배들이랑 찍던 거랑은 다른 분위기여서 좋은 경험이 됐던 것 같아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는 막내 수한 씨의 이야기다. 프리 프로덕션을 거치고 프로덕션까지 긴 시간 동안 꼼꼼히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제대로 하고 싶었다. 스태프가 꾸려진 후로 일주일 동안 시나리오를 공유하고, 분석하고, 촬영 계획을 세우는 등 영화 촬영 전 해야 할 것을 준비했다. 1월 14일 오후부터 17일 새벽까지는 촬영을 마무리했다.
“작년에 정신없이 보냈어요. 올해는 되도록 많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일정을 비우고 있었어요. 마침 그때 민병훈 국장님이 시나리오를 보내주신 거예요. 평소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그냥 시나리오를 읽는데 좋은 거예요. ‘영심’ 역을 꼭 제가 하고 싶었어요.”
남명옥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영심’과 영심을 만든 작가에게 매력을 느꼈다. 만나보니 시나리오를 쓴 서경숙 감독에게 더 깊은 신뢰가 생겼다. 자신이 느낀 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것이라는 신뢰였다. 영심의 남편 역으로 조중석 배우를 소개하고, 카메라 앞에 섰다.
영화 <코스모스 액자>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언제부터인지 남편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싫어진 아내, 아내는 남편이 사라졌으면 한다. 영화 속 장면은 모두 아내의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차례로 장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생각의 흐름처럼 조각난 파편이 꽉 맞지 않게 이어져 있다. 남편과 사이가 틀어지자 남편의 모든 게 미워진 아내는 남편이 걸어놓은 ‘코스모스 액자’에 분풀이를 한다. 이것 역시 영심의 상상일지, 현실일지는 모호한 상황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어느 순간 흉기로 변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이 답답함으로 온몸을 조인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독은 부부, 넓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각종 매체로 인한 의사소통의 부재, 복잡미묘하게 엉킨 감정의 실타래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페미니스트 비평에 관심이 많았고, 여성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 것 같아요. 여성과 성, 사회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고요. 제 작품은 한 여자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두려고 해요. 시나리오를 보고 많은 분이 ‘요즘 저런 남자가 어딨어.’라는 반응이었어요. 정말 가부장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남편을 하나의 우화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시나리오도 박철수 감독님 살아계실 때 이야기했던 내용이었어요.”
‘영심’역의 남명옥 배우가 ‘S#21-3 거실-오후’ 촬영을 위해 감정을 잡고 있다.
서경숙 감독
고인이 된 박철수 감독은 여성과 성,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다루며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았다. 서경숙 감독과 박철수 감독은 2004년 충남대학교 축제 때 개최한 작은 영화제에서 만났다. 서경숙 감독은 그때도 충남대학교 교수로 있었고, 영화제 사회를 봤다. 박철수 감독은 심사자로 참석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요. 영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꾸준히 영화에 관심을 두었죠.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영화비평과목을 들었어요. 마지막 논문을 쓸 때 박철수 감독님의 <301 302>를 봤어요. 그때 미국의 비디오 가게에서 한국 영화는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그 이후에 박철수 감독님 영화를 많이 봤죠. 본인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관심을 가지니까 좀 통했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종종 연락했고, 함께 작업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주셨죠. 그렇게 해서 감독님과 함께 한 작품이 꽤 있어요.”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 <베드>, <녹색의자 2013 - 러브 컨셉츄얼리>, <생생활활>까지 박철수 감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함께 작업했다. 이제 서경숙 작가는 감독에 도전한다. 영화는 2월부터 편집에 들어갈 예정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커졌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아무 말 없이 장소를 빌려준 분도 많고요. 민병훈 사무국장님이나 함께 촬영했던 친구들, 배우들에게도 배운 점이 많아요. 현장경험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이 없는 친구들이었는데 잘 이끌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지역에 있는 친구들과 지역에서 모두 촬영한 단편영화인만큼 도움을 많이 받아서 부담감이 좀 커졌어요. 제대로 완성하고 꾸준히 작업해서 영화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