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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6호] 우리는 늘 모호함 그 어딘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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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무대, 네 귀퉁이에 놓인 작은 나무 의자에 네 명의 여인이 각자 자리한다. 머리에는 옷걸이를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가장자리를 맴돈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 오른쪽을 향하던 발걸음이 이내 왼쪽으로 급히 방향을 바꾼다. 다시 오른쪽으로 또 다시 왼쪽으로 점점 빠르게 혼란스러운 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네 여인은 다시 네 귀퉁이 작은 나무 의자에 싸늘하게 자리한다.
무대 중앙에 조명이 들자 의사 가운을 입은 하두바와 반도라크가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모세’라는 환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가 끊기고 두 사람 사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 오간다. 하두바는 불편한 얼굴로 반도라크를 쏘아보고, 그런 하두바에게 반도라크는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낸다. 그녀는 하두바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싶은 야노슈가 하두바를 찾아온다. 하두바는 야노슈를 정신병 환자로 착각한다. 상황을 설명하려는 야노슈의 말을 싹둑 자르며 그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곧, 그녀가 견습생 게다가 병원 이사장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공손하게 자신의 태도를 바꾼다. 상대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우리의 모습이 하두바에게 슬며시 묻어난다. 하두바는 야노슈에게 자신을 거북이라고 착각하는 한 환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사나운 환자라는 말을 남기고 하두바는 무대를 떠난다.
연극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세계 최고의 정신과 전문의 하두바, 그의 곁을 지키는 파트너 간호사 반도라크, 자신을 거북이라고 착각하며 자신 이외 모든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 환자 그리고 그들이 궁금한 정신과 전공 의대생 야노슈. 네 사람은 병원에서 제법 그럴듯한 모습과 말투로 제 역할을 해낸다. 한동안은 그렇다.
무대에 혼자 남은 야노슈 곁으로 반도라크가 다가온다. 둘은 서로를 정신병 환자라고 오해한다. 하두바가 말했던 아주 사나운, 자신을 거북이라고 생각하는 그 환자 말이다. 서로를 안심시키려는 듯 두 사람은 갑자기 바닥을 기며 거북이 흉내를 낸다. ‘나도 너와 같은 거북이니 안심해도 좋다.’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조금 더 지나자 두 사람은 서로가 진짜 거북이라며 경쟁하듯 더 거북이처럼 바닥을 긴다. 거짓말이 점점 진짜가 된다.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말 거북이가 되어버린 듯하다.
극이 흐를수록 어딘지 모를 불편함, 이상함이 찾아든다. 언제부터였는지 또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없어 더욱 불편하다. 이상하다고 하기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기도 모호한 그런 이상한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야노슈가 자신을 거북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상황은 더 심해진다. 그녀는 ‘자신을 의사라고 착각하는 하두바’와 ‘자신을 간호사라고 착각하는 반도라크’를 신에게 받은 사랑으로 감싸 안고 치료한다고 말한다. 진짜 환자는 누구일까, 그렇다면 진짜 의사는? 야노슈는 혼란에 빠진다.
정신병원에 저녁 식사를 알리는 방송이 흐르고 무대 앞 나무 의자에 모여 앉은 네 명의 여인이 각자 배식받은 빵을 먹는다. 고요한 극장에는 그녀들이 쩝쩝거리며 빵 먹는 소리만 가늘게 울려 퍼진다. 머리에 옷걸이를 쓴 채 네 여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너 때문에 이사장한테 걸린 거 아냐!”
“내일은 우리 역할을 바꿔보자.”
“나 거북이 하고 싶어.”
“힘들 걸, 거북이 엄청 힘들어.”
“근데 머리에 옷걸이는 왜 썼어?”
“소화가 잘돼. 돌아. 너도 써봐. 돌지?”
“돌아!”
“밥은 참 괜찮은데 말이야.”
“퇴원 못 해, 못 해 못 해.”
무대에 다시 어둠이 내리고, 네 여인은 무대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다시 연극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반도라크는 하두바로, 하두바는 반도라크로, 환자는 견습생이 되고, 견습생은 환자가 된다. 경계가 무너진다. 연극 속 그들도, 연극을 보는 관객도 말이다. 연극 <거북이, 혹은>은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 짓는 경계, 과연 그 경계선은 무엇이며, 명확한 경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연극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한다. 연출을 맡은 박준우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알고 이해는 하면서도 실수는 항상 일어난다. 실수해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실수로 인해 범죄자가 될 수도 있고, 정신병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대에 오른 네 명의 여인은 환자였을까, 아니면 연극 속 또 다른 연극을 펼치는 여배우였을까. 혹은 또 다른 누군가였을까? 그들은 누구였을까. 스스로를 A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B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B가 확실하다고 안심할 때쯤 또 다른 무언가가 나타난다. 그럼 C인가? 아니, 아직은 C가 되지 못한, 그렇다고 B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서 있는 우리. 무대 주위를 혼란스럽게 맴도는 네 여인이 바로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우리 모습 아니었을까. 무대 중앙이라고 생각했지만, 무대 중앙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느끼는 혼란스러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연함, 우리는 늘 모호함 어딘가에 아스라이 발을 내딛고 서 있다. 명확해지길 원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