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8호]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오월, 광주는 늘 평범했다. 매년 5월 18일에는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시청각 자료를 시청했고 거리 곳곳에서는 그때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보던 모습이었고 학교에서 늘 하던 행사였기에 나에게 오월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달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광주처럼 5·18 기념행사를 치르는 줄 알았을 만큼 나에게 또 광주 시민에게 5월 18일은 역사적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오월이 누군가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왜곡된 시선으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올해도 광주의 오월은 평범했다. 언제나처럼 광주 시민은 그날을 기억했다.
광주 시민이 기억하는 그날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하고 대통령 대행체제로 국정이 운영된다. 불안정한 상황을 틈타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무력으로 군부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이들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다시 군사 독재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1980년 5월 15일 이에 반대하는 전국 대학생이 서울역에 모여 민주항쟁 시위를 벌이는데 신군부는 이를 문제 삼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5월 18일 계엄군이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의 등교를 막으며 시작됐다. 등교를 저지당한 학생들은 계엄 해제와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거리로 모인 학생들에게 계엄군은 곤봉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폭력진압에 분노한 학생과 광주시민이 금남로로 모여들며 본격적인 민주 항쟁이 시작됐다.

 

5월 19일, 더 많은 계엄군이 광주로 투입되고 폭력 진압은 계속됐다.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이 배치되고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5월 20일, 광주 시민 두 명이 공수부대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후 더 많은 사람이 공수부대의 총탄에 부상입고 죽는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시위대를 넘어 일반시민에게까지 이른다. 무차별적인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고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무기를 구해 계엄군의 폭력에 항의한다.

 

 

5월 18일 오전부터 시작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새벽까지 약 열흘간 이어졌다. 5월 27일 새벽,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도청을 포위하고 도청에 모인 시민군을 향해 총을 쐈다. 도청을 비롯해 시내 전역을 폭력으로 진압하며 5·18 민주항쟁은 끝을 맺었다. 광주의 중심이었던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고, 거리에는 사상자가 넘쳐났다. 155명의 사망자와 81명의 행방불명자, 2,000여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시외로 통하는 모든 길과 연락망을 차단해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진압이 종료된 후에야 외부로 광주의 상황이 조금씩 전해졌다.

 

민주를 인양하라! 통일을 노래하라!

5월 17일 일요일 오후,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부터 길게 이어지는 금남로에 사람들이 꽉찼다. 평소 자동차가 세게 달리던 넓은 도로 양옆으로 다양한 부스가 자리 잡았고 도로 곳곳에서는 거리공연, 플래시몹, 5·18 사진전, 인권 담벼락 등 많은 체험 행사가 열렸다. 옛 도청 바로 앞에는 무대를 마련해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떠들썩한 거리는 마치 축제장에 온 듯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은 엄마와 아빠, 앳된 얼굴의 학생, 젊은 청년과 중년의 아저씨까지 다양한 사람이 거리에서 한데 어우러졌다.

 

올해로 35주년을 맞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5월 17일 금남로 일대에서는 5·18 공식 기념행사 전 광주 시민들이 그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민 전야제가 열렸다. 매년 많은 사람이 찾는 행사 중 하나인 전야제는 올해도 광주 시민을 거리로 이끌었다. 5·18 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와 여러 시민단체가 함께 ‘민주를 인양하라! 통일을 노래하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시민난장, 오월풍물굿, 전야제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올해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세월호 사건, 콜트·콜텍기타 노동자, 남북통일 등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할 기회를 마련했다.

 

불과 35년이 지났다

거리 곳곳에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거리에 걸린 5·18 관련 사진을 보며 그들은 그때를 다시 회상했다.

 

“광주 MBC 있던 자리가 지금 저기 장동 정철 영어 학원 부지였어. 시위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시민군이 MBC 건물에 불을 놨지.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이놈들이 이런 걸 TV에 내보낼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드라마나 틀어대니…. 그때는 전화도 안 되고 기차도 안 다녔어. 군인들이 다 막아서서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지.”
세상은 그날을 다 잊은 듯 완전히 바뀌었지만 불과 35년이 흘렀을 뿐이다. 그날을 고스란히 살아낸 이들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저씨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거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거리 끝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팀을 만났다.

 

“5·18 민주항쟁 시민군을 북한특수부대라고,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정말 잘못된 역사인식입니다. 시민군은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해 또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분들이에요. 세상이 몰라보게 바뀌었죠? 지금 우리는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어요. 각기 다른 방법과 형태로 그때의 불합리함이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요. 1980년 5월 계엄군이 거리를 돌며 가두방송을 했어요. 거리에 시민 폭동이 일어났으니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말을 언제 들었는지. 바로 세월호 사건입니다. 아이들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했죠. 이미 흘러간 과거라고 치부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거리를 가득 채운 50여 개 부스는 모두 다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부스를 시작으로 세월호 사건, 비정규직 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방사능 위험 지역,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근로정신대 할머니, 쌍용차 해고노동자, 콜트·콜텍기타 노동자, 네팔 대지진 모금을 위한 부스까지. 하나하나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문제가 우리 사회에 가득했다. 부스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생각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오월 엄마와 사월 엄마가 만났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수백 명 풍물패가 금남로 일대를 가득 채웠다. 신명 나는 놀이판이 한 차례 벌어지고 옛 도청 앞 무대에서는 본격적인 전야제 행사가 시작됐다. 주 무대와 보조 무대를 설치하고 양쪽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공연은 총 5부로 광주에서 활동하는 극단과 합창단, 예술가와 시민들이 함께 무대를 꾸몄다.

 

1980년, 그날의 함성을 회상하는 연극으로 1부 무대를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오월을 추모하는 합창과 연주, 춤 등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다. 4부 무대가 시작될 무렵 무대 위로 하얀 한복을 입은 할머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대편 보조 무대에는 노란 옷을 입은 젊은 엄마들이 올랐다. 35년 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때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엄마들과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엄마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오월 엄마가 먼저 사월 엄마를 위해 노래했다. 굽은 허리, 하얗게 센 머리카락, 기력이 다한 오월 엄마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노래를 이어갔다.

 

“5·18때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었습니다. 자식을 잃으면 하늘의 별이 안 보인다고 하죠. 젊은 엄마들 그 아픔 우리가 왜 모릅니까. 우리를 믿고 의지하세요. 우리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눕시다.”

 

35년이 지났지만 오월 엄마는 여전히 눈물지었다. 매년 오월 하얀 한복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엄마들은 죽는 날까지 옳지 않음에 맞서 싸우며 1980년 5월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는 그 길을 혼자가 아닌 사월 엄마들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오월 엄마의 노래에 사월 엄마가 답가를 보냈다. 합창을 끝내고 오월 엄마를 만나기 위해 사월 엄마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반대편 메인 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광주 시민들 사이를 지나는 엄마들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광주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손을 부여잡으며 미안하다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눈물로 약속했다.
전야제는 세월호를 하늘 높이 인양하는 퍼포먼스로 막을 내렸다. 하늘 높이 쏟아 오른 세월호 아래 모인 광주 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불렀다.

 

올해 5·18 기념행사를 앞두고 많은 잡음이 오갔다. 잡음의 시작은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안에 반대하면서부터다. 국민 통합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임을 위한 행진곡 공식 기념곡 지정 및 행사에서 곡 제창을 금지했다. 이에 반발한 광주 시민과 시민단체, 광주시의회 등은 정부가 마련한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따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결국, 반쪽짜리 기념행사를 치르게 된 것이다.
‘세월은 흘러도 산천은 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고 노래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정말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노래일까? 진짜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이는 누구일까? 


글 사진 박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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