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8호] 여러분 앞에 서약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Wedding’ 그러니까, 서양식 결혼식은 언제였을까. 1893년 김점동과 박유산 부부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치른 교회 결혼식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결혼식이다. 1880년대 초 조선과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조선 땅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점동과 박유산 부부는 이화학당 미국인 선교사가 중매한 커플로 종종 선교사가 중매를 서기도 했다고 한다. 사진을 찾아볼 수 없어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었는지, 결혼식 풍경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결혼식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주례선생님과 결혼 서약, 하객 사이를 수줍게 걸어 나오는 신랑신부 행진 등 짧은 상상을 해보자면 그렇다.

 

북적이는 결혼식장에서 생각한다

결혼식은 결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결혼이라는 단어에는 당연히 결혼식이 포함된다. ‘나 결혼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축하를 전하기도 전 ‘결혼식은 언제야?’라고 먼저 묻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과 결혼식을 함께 놓고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결혼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자 사람들 앞에 부부가 됨을 서약하는 자리, 단어의 뜻만 놓고 보면 결혼식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풍문으로 듣는 이야기만도 수백은 될 만큼 결혼식 준비 과정은 복잡하고 고되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결혼식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컨베이어 벨트 위 인형처럼 신랑신부는 후다닥 결혼식을 치른다. 비슷한 옷과 화장, 머리스타일, 심지어 하객을 맞는 방법도 예식 순서도 비슷함을 넘어 똑같다.

북적이는 결혼식장을 찾은 하객은 신랑신부를 축하하러 온 건지 얼굴도장을 찍으러 온 건지 자신도 헷갈린다. 신부대기실에 들러 사진 한 장 찍고 먼발치에서 예식을 잠깐 보다 식권을 들고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으면 그날 결혼식은 끝이 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장을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절대 이런 결혼식 안 해야지.’라고 말이다.

낭만 가득한 결혼식을 꿈꾸다

서점에서 우연히 들춰본 잡지에서 대안 결혼식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신랑신부에게 친환경 결혼식을 만들어주는 사회적 기업 ‘대지를 위한 바느질’ 대표 인터뷰였다. 대지를 위한 바느질은 옥수수, 한지, 쐐기풀 등 자연에서 뽑아낸 직물을 이용해 만든 웨딩드레스, 뿌리가 살아 있어 예식 이후 화분에 심어 키울 수 있는 부케, 친환경 케이터링, 공정여행을 통한 신혼여행 등 결혼식 전반을 친환경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보통의 결혼식과는 확연히 다른 대안 결혼식의 대표적 예이다.

기사를 보고 얼마 후 우연히 이세은 씨를 만났다. 금산 간디학교를 졸업한 세은 씨는 낭만결혼식을 만들어주는 ‘프로젝트 낭만’이라는 팀에서 활동 중이었다. 5월 프로젝트 낭만 2호 커플을 위한 결혼식을 준비 중이었다.

“프로젝트 낭만을 꾸릴 때 한창 삼포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말인데 젊은 친구들에게 낭만은 완전히 사치처럼 여겨졌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만의 방식으로 낭만을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결혼이나 연애가 포기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요즘은 결혼식이 쇼 같아요. 가장 낭만적이어야 할 결혼식이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만의 방식,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결혼식을 만들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대안 결혼식이라는 거창한 말보다 낭만결혼식이라고 불러달라는 세은 씨는 차분히 자신이 생각하는 낭만결혼식을 이야기했다.

“프로젝트 낭만이 추구하는 낭만결혼식은 허례허식이 없는 결혼식이에요. 얼음 조각이라든지, 의미 없는 하객 알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비싼 결혼식 용품들은 낭만 결혼식에는 없는 것들이에요. 하객도 150명 이내로 받고 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신랑신부가 원하는 결혼식을 만드는 거예요. 두 사람의 이야기와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결혼식이요.”

보여주기 식의 결혼식이 아닌 원래의 목적을 충실히 하는 결혼식을 만드는 것이 바로 프로젝트 낭만이 지향하는 점이다. 작고 특별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세은 씨는 말을 이었다.

“요즘 작은 결혼식, 대안 결혼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연예인, 유명인이 작은 결혼식을 치러서 그런 것 같은데 더 보여주기 식 결혼식이 돼 버린 것 같아 조금 속상해요. 내가 이걸 계속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누구나 꿈꿀 수 있는 낭만결혼식을 만들고 싶었어요. 화려하지 않아도 또 아주 멋지진 않아도요.”       

13년 연애의 결실을 맺다

5월, 프로젝트 낭만의 2호 커플이 된 유인수, 손미옥 커플. 두 사람은 대학생 때부터 13년을 만나온 장수 커플이기도 하다. 그들이 드디어 그 결실을 맺게 됐다.

“결혼을 결심하고 저희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이 예식장을 벗어나자는 거였어요. 예식장을 예약하면 그 뒤로는 저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업체가 제시하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런 식은 싫었어요. 그동안 본 많은 결혼식이 영향을 미쳤죠(웃음). 그러다 프로젝트 낭만이 생각났어요.”

풀뿌리사람들에서 근무하던 인수 씨가 프로젝트 낭만을 만난 것은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서였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친구들이 결혼식을 만든다기에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잠시 잊고 지내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다시 연락했다.

“보여주기 위한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가 연애를 오래 했잖아요. 그동안 저희를 쭉 지켜봐 주신 분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재미있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약식은 짧게 진행하고 이후에 공연과 맥주를 즐기는 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이 자신의 결혼식으로 모여 오랜만에 이야기 나누고 신나게 즐기다 가는 즐거운 결혼식이 됐으면 한다고 신부 미옥 씨가 이야기했다.

“제가 가진 인맥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지역사회에 도움이 됐으면 해요. 그래서 풀뿌리사람들에서 일 할 때 만났던 분들이 결혼식을 위해 많이 애 써주셨어요. 피로연 음식은 희망밥집이라는 사회적 기업에서 맡아주셨고요, 결혼식 영상 촬영은 사회적 기업 U&MEDIA 황인창 대표가, 사회는 사회적자본지원센터 권인호 씨에게 부탁했고요. 희망밥집은 피로연 음식이 처음이라 정말 많이 고민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참 감사하죠.”

두 사람의 낭만결혼식

5월 16일 토요일, 날씨는 화창했다. 유성구 함께하는 교회 야외에서 치러진 결혼식은 오후 다섯 시부터 시작해 아홉 시까지 이어졌다. 햇볕이 가득 드는 식장과 식장 뒤로 넓게 펼쳐진 잔디가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식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세은 씨는 결혼식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식장 입구에는 신랑과 신부가 함께 서서 직접 하객을 맞았다. 신부대기실은 없느냐고 묻자 자유롭게 서서 직접 하객을 맞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고 미옥 씨가 이야기한다. 높은 구두에 드레스까지 불편할 법도 하지만 두 사람은 미소를 잃지 않고 식이 시작될 때까지 직접 하객을 맞았다.

인호 씨의 인사말로 식이 시작됐다. 주례는 없고 두 사람이 직접 작성한 서약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식을 진행했다.

“하나, 둘만의 사인을 만들겠습니다. 둘, 유지비가 적은 살림을 꾸리겠습니다. 셋, 사회의 불의에 눈뜨고 있겠습니다….”

하나하나 두 사람의 약속이 사람들 앞에 공개되고 두 사람은 드디어 부부가 됐다. 

누군가는 두 사람의 결혼식을 야외에서 치러진 특별할 것 없는 식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번 결혼식을 위해 여덟 차례 프로젝트 낭만과 회의를 거쳤다. 작은 것 하나하나 고민하고 직접 선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결혼식을 만들어갔다.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여는 의식이니만큼 모두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지금 우리는 이 당연한 과정은 뒤로한 채 다른 것에만 신경 쓰고 있다.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 세은 씨가 말했다.

“내 결혼식인데 왜 업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요? 남이 어떻게 볼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날보다 중요한 날이잖아요.”


글 사진 박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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