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8호] 당신 곁에 예술이 있다

당신에게 일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누군가에게는 목표를 위한 수단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본인이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또 ‘휴대전화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없으면 허전해지고 있으면 귀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일은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의미를 부여하거나 특별한 행위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경제 활동의 측면에서 정의하는 ‘노동’이다.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일’을 한다.
 
런치 인터뷰 3탄 “예술과 일, 그리고 된장”
사람들에게, 예술가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근로기준법 제2조를 살피면 ‘근로’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는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이다. 근로자의 조건을 갖추려면 ‘사용자’가 있어야 한다. 사용자란 ‘사업주 또는 사업 경영 담당자, 그 밖에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업주를 위하여 행위하는 자’를 말한다. 근로기준법에는 많은 노동자가 해당하지만, 사용자가 없는 노동자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예술인의 일 또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에 적용되지 않는 노동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종종 ‘너는 그래도 너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라는 질문을 받는다.

200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구두끈을 풀며」로 당선한 김희정 시인 역시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종종 듣는 질문이다. “네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며 지나가지만, 속이 쓰리다. 시인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시집 한 권에 8,000원이면 시 한 편당 130원꼴이다.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워서 받아들인 세상을 다시 꺼내 압축한, 시 한 편에 세상이 책정한 금액이다. 김희정 시인은 돈을 벌기 위해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런 시는 시인도 세상도 알아볼 수밖에 없다. 물질을 추구하는 순간부터는 시를 쓰더라도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시만 써서는 절대 ‘먹고 사는 일’이 가능하지 않은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시의 경우, 원고료 책정이 낮거나 주지 않는 곳이 70~80%입니다. 시 한 편이 3만 원~5만 원 사이입니다. 웬만한 유명세가 있는 시인이 아니고서야 시만 쓰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유명한 시인도 강연하며 먹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 역시 시를 쓰는 일은 아닙니다.”

김희정 시인은 2011년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의 예를 들며, 자본주의 안에서 아무런 물질을 생산하지 못하는 예술만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설명했다. 2011년 1월 서른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 최고은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유는 굶주림과 추위였다. 이로 인해 예술인의 삶과 예술가의 ‘일’ 즉, 예술이라는 것의 가치에 관해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되었다. 예술인과 그들의 창작 활동에 대한 대가, 사각지대에 놓인 그들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과 노동

2012년 제정된 예술인 복지법은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고 복지지원을 통해 예술인의 창작활동을 증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일명 ‘최고은 법’으로 불린다. 예술인 복지법에서 예술인이란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자로서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창작, 실연,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예술가들에게도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2012년 ‘밥 먹고 예술합시다’라는 외침과 함께 첫발을 내디딘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원회는 그동안 예술인복지법 개정, 문화예술산업진흥법에 관한 법률 개정 등 예술인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법의 테두리를 만들고, 다지는 데 지속해서 참여했다. 이어 3년여 만인 2015년 5월 1일, 예술인소셜유니온이 공식출범했다.

예술인소셜유니온 나도원 공동위원장은 “많은 사람이 예술과 노동, 즉 일을 연결하는 데 있어 생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 수입을 착출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노동으로 포함된다. 즉 예술가의 예술 활동 또한 노동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일은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일과도 일맥상통한다.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창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활동 또한 ‘일’로 정의할 수 있다. 지난 5월, 식사시간을 이용해 이 주제로 대화한 예술가는 총 네 명이다. 앞서 언급한 김희정 시인, 밴드 개인플레이의 드러머 김태훈 씨, 연극협동조합 나무시어터의 조중석 대표, 소제관사42창작촌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김보람 작가다.

마음을 만지는 일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출범 소식을 전하자 김희정 시인은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통해 본 예술인의 삶은 ‘자괴감’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을 바라보아야 하는 예술가의 죽음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젊은 친구들이 그런 단체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결국, 선배들이 해야 했던 일입니다. 예술가의 근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제도적 장치가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시만 쓰는 것으로 생계를 잇기 어렵다. 김희정 시인이 시 쓰는 일 말고 택한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많은 예술인이 자신의 재능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또 다른 ‘일’로 선택한다. 개인플레이의 드러머 김태훈 씨도 마찬가지다.

‘직업’을 적어야 하는 빈칸에 가장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는 일을 써야 한다면, 개인플레이 드러머가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드럼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맞죠.

사실은 개인플레이 드러머로만 살고 싶은데, 그것만으로는 삶을 꾸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참 딜레마죠. 예술인이라고 모두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걸 받아들이는 환경이 먼저 만들어져야 해요. 좋은 작품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환경 말이에요. 예술 시장이 상식적으로 돌아가야 예술가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개인플레이 첫 번째 앨범을 녹음할 때예요. 아는 분 녹음실을 빌려서 했어요. 최대한 합을 맞추고, 녹음실 사용 시간을 줄이려고 몇 번이고 연습해서 한 번에 녹음이 끝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렇게 해도 개인당 50만 원씩 냈어요. 다음 앨범은 그렇게 제작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제대로 된 시장에서 우리가 양질의 음악을 할수록 그 가치가 인정받는다면, 그런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술이 일로, 직업으로 인정받고 그런 판이 만들어져야 예술가도 그 가치에 맞는 생산물을 생산한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이들은 예술을 한다. 많은 사람의 질문처럼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래서 너 이거 안 할 거야?”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럼에도 한다.”라고 답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서 자신만의 예술을 한다.

김태훈 씨에게 음악은 “소리뿐만 아니라 그 시간과 냄새, 공간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무대에서 사람을 만나고, 풍기는 에너지가 함께 곡을 연주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지고 싶은 게 예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삶을 알고 관심을 기울이고 힘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게, 김태훈 씨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일이다.

“칠판 긁는 소리가 마음에 와 닿는 사람에게는 그게 음악이에요. 아무리 좋은 멜로디라도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소음이에요. 형식에 얹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만지는 것, 그게 음악이 이 사회에서 하는 일인 것 같아요.”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이다

연극 역시 여러 사람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이다. 연극협동조합 나무시어터의 조중석 대표는 ‘함께’의 힘을 믿는다.

“영동의 한 폐교에 연극 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극공동체를 만들었어요. 처음엔 대학 졸업하고 어쭙잖은 운동적인 관점으로 연극을 시작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극단 터가 그런 성격을 지닌 단체였던 거죠. 2000년도 초반에 영동에 들어가서 10여 년 가까이 다 무너진 폐교를 매일 쓸고 닦다가 나왔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나왔는데, 나올 때는 절망적이었죠. 그럼에도 대전에 돌아와 다시 연극공동체를 만들었던 건 연극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라는 것 때문이에요. 연극이라는 예술의 특성상 순간 예술이고 재생할 수 없으며, 복기할 수 없어요. 때마다 다르므로 계산하지 못한 순간 속에 중독되는 에너지가 있어요. 그 에너지는 연극을 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연극을 보는 관객에게도 나오는 에너지예요. 공연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계속 연극을 하는 것 같아요.

연극이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어요. 어떤 매체를 통해서 보는 것보다 눈 앞에서 이야기하니까 더 크게 와닿는 거죠. 그래서 오랜 시간 탄압을 받기도 했던 예술이죠. 무대에서 직접 소통을 하니까 옛날처럼 대본을 검열하지 않는 이상 막을 방법이 없는 거예요. 무대에서 해버리면 바로 관객에게 흡수되니까요. 그러니까 연극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에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거잖아요. 예술가이기 때문에 본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젊은 날 연극을 했던 이야기를 하며 10년 동안 1년에 10만 원을 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건 듣는 사람도 당사자도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지점이에요. 모든 예술이 사회에 말을 건다고 생각해요. 연극은 특성상 직접 눈앞에서 말을 거는 거예요. 이야기할 특권을 주고, 본질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무대이고, 그 무대 위에 연극인들이 있어요. 무대 뒤에도 함께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요.”

사람들 사이에 예술이 있다

소제창작촌 4기 입주작가인 김보람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죽 교사가 되고 싶었다. 엄마의 꿈이기도 했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회적인 명성도 함께 따르는 직업이라고만 생각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실습을 나갔어요. 매일 저한테 와서 장난치고, 어리광 피우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왕따였던 거예요. 어떤 날 다른 아이들이 와서 걔랑 놀지 말라고, 걔 왕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전까지 교사는 그냥 멋지게 짜잔 수업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어요. 더 큰 걸 못 봤던 거예요.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걸 생각했어요. 그게 무서웠어요.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게 제일 힘든 거라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 선생님 안 한다고, 애들 임용 준비할 때 아무것도 안 하고 매일 실습실에 있었어요.”

김보람 작가는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도 거스른 적 없던 삶에서 만난 유리처럼 투명한 벽에 반응했고, ‘교사’라는 직업을 내려놓았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좋은 스승이 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졸업 후 대전에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예술가로의 일과 자신의 삶에 관해서 생각했다.

 

“혹시 된장 만드는 법 아세요? 할머니가 매년 메주를 쑤어서 된장을 만들어줬어요. 할머니가 밭을 갈아서 콩을 심잖아요. 콩을 심고, 수확해서 1년 내내 농사를 지어요. 그렇게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는 데 200일이 걸린대요. 그런데 그렇게 메주를 띄우는 게 다가 아니라 간장에 담가야 된장이 나온대요. 그건 할머니한테 특별한 게 아니라 생활인 거예요. 가만히 설명을 듣다가 ‘할머니, 그럼 나도 된장 만드는 거 알려줘. 나도 예술 하게.’ 이랬어요. 저는 예술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오랜 시간 밭을 일구고 진득하게 앉아서 마침내 나오는 메주 같은 거 말이에요. 그 메주가 다시 된장이 되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 아닐까. 할머니는 이제 된장 만드는 걸 알려줄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저도 너무 늦지 않게 주변을 발견하고, 할머니가 오랜 시간 밭을 일구는 것처럼 살면 되겠구나. 할머니가 사는 게 예술이다. 그러니까 사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삶의 아픔과 고통에 반응하고, 그 반응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그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보게 한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을 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하나 더한다면, 감동을 주는 삶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 예술적인 상상력, 누군가의 마음을 만지려는 마음이 없는 세상, 그리고 할머니가 만드는 된장이 없는 세상은, 살기 싫어질 것 같다.

예술 이전에 사람이 있다

“오늘날 소비자가 무엇을 살지 사업자가 더 잘 안다. 소비자의 마음을 간파해서가 아니라 대형 사업자가 정해주는 상품을 대부분의 소비자가 사게 되기 때문이다. 문화상품도 마찬가지다. 예술인과 향유자가 모두 자본의 그물에 빨려 들어갔다. 산업은 커지고 사람은 작아지는 사회에서 문화산업의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예술인의 자리는 좁아진다. 예술의 가치와 예술인의 삶은 뒷전인 한류산업과 문화강국은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하다. (중략) 낙후된 문화산업의 제반 조건들이 완비되어야 예술노동의 여건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낙후된 것이다. 예술노동의 여건 완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문화산업의 조건도 낙후성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싸워야 할 대상은 장막 너머로 숨어들고 조직적 연대와 저항은 악화되어간다. 이러한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전략이 필요하다. 전망은 만드는 것이다. (하략)”

예술인소셜유니온 출범선언문 부분이다. 이 출범선언문의 부제는 ‘우리가 주체이고, 우리는 연대한다’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은 ‘예술을 둘러싼 사회적 가치와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예술인들의 자율적인 조합’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 나도원 공동위원장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생각도 좋지만, 이미 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창작물인 예술이 이미 한국사회에 기여한 점을 강조한다. 문화강국이라고 불리는 한국사회에서 그 문화의 ‘소스’를 만든 출발점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서 누리는 많은 부분에서 이미 예술이 깊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걸 만든 사람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큰 산업을 만들고 있음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기업이나 자본이 그것을 본인의 것으로 독점하는 사회입니다. 이 틀을 깨는 게 중요합니다.”

독일은 1981년에 예술가사회보험법을 제정하고 1983, 예술인사회보장금고(Küstler Sozialkasse, KSK)를 만들어 예술인들이 건강보험, 상해보험, 연금보험을 반값만 내도록 지원한다. 프랑스에서 시행하는 ‘앙떼르미땅’은 예술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다. 작업 특성상 매달 월급을 받으며 일할 수 없는 예술인을 위해 일정 부분의 월급을 정부에서 지원한다. 이탈리아는 비정규직 예술인을 위한 별도의 통합적 사회보험 제도가 있다. 아일랜드, 일본처럼 예술인을 대상으로 별도의 연금제도를 운용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예술은 배고픈 것이라고 말하는 건,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목표를 개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 잘못된 시선입니다.”

예술인소셜유니온 나도원 공동위원장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가 일로서 예술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다.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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