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8호] 「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차브’는 ‘아이’를 뜻하는 집시 언어인 차비(chavi)에서 유래되었다. 『차브에 관한 작은 책』에 따르면 ‘차브’란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한다. ‘차브’로 투사되는 21세기 영국의 하층계급은 사다리를 올라타지 못한 노동계급의 잔재로 대부분이 영세민 공영주택에 거주하고 실업수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차브는 종종 영국의 코미디 프로에서 희화되고, TV 리얼리티 쇼에 출연해 만인의 공격 대상이 되는가 하면, 정치인뿐만 아니라 BBC를 비롯한 영국 언론계의 계급 투사들에 의해 멍청하고, 게으르며, 인종주의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더럽고, 천박하게 옷을 입는 사람들(그들은 때론 돈도 없는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버버리’를 입기도 한다)로 그려진다. 영국의 특권층 젊은이들(예를 들어, 옥스퍼드대 중간계급 학생들)은 차브의 외모를 흉내내며 조롱하는 ‘차브 파티’를 열기도 한다.

이 책 『차브』의 저자 오언 존스(Owen Jones)는 노동계급 거주지역에서 나서 자라고, 운 좋게(?)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가디언』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칼럼니스트이다. 그는 다양한 식자층으로 이뤄진 한 모임에서 차브에 대한 조롱과 동조를 목도한 데 이어, 두 10대 소녀의 실종사건을 다루는 상이한 언론의 태도를 보고 연구자로서, 저널리스트로서 묵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책의 목적을 (원서 부제처럼) “노동계급의 악마화”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미 계급의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고, 계급편견이 뿜어져 나오는 연못에 주목해야 한다고.

대처에 비수를 맞고 붉은 장미로 표상되는 노동당에 배반당한 노동계급은 ‘열망의 빈곤’ 내지는 ‘복지 식객’으로 두들겨 맞는다. 노동계급을 회피하기에 이른 노동당 당수였던 토니 블레어는 심지어 “우리는 모두 중산계급이다.”라고 외치기까지 하였다. 신노동당은 ‘계급’으로 더는 사회의 불평등과 사회적 불편함을 제기할 수 없게 되자 ‘사회적 배제’와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창조했다.

사실 정부관리와 경영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대중매체가 유행시킨 사이비 과학용어에도 우리는 익숙하다. 유연화, 구조조정, 슬림화, 경영합리화는 비정규직, 비할 데 없는 노동강도의 강화, 주주가치 극대화와 다르지 않다. 선거철마다 들려오는 강남의 ‘계급투표’라는 푸념은 또 어떤가. 서동진은 『변증법의 낮잠』에서 노동과 대표의 역설을 제기한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대표되어야 할 자신에 관해 언제나 오인하거나 무지하다. 가진 게 없는 자들이 세상의 이치에 따라 행동할 때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해에 반할 수밖에 없다. 강북의 노동은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늘 불투명한 주체이다. 노동자는 항상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눈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식별하지 않을 수 없다.”

‘반지의 제왕’에 중간대륙에 사는 엘프들이 나온다. 그들은 인간과 동맹을 맺고 같이 싸우기도 하고 인간에게 땅을 내어주고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존재들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간계급 혹은 상층 계급들이 엘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왠지 그들에겐 약속된 땅이 있어 보인다. 그곳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란 없는데 말이다.

중산계급 영국을 소비하는 동안 자부심 많던 위대한 노동자들은 잊혔으며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은 ‘목도된 폭력자들’이 넘쳐나는 위험지역으로 쇠락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부서진 영국은 회생할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망해가고 있는 한국’이라는 진단은 단순히 기우이거나 오판일까.


대전 시민아카데미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