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5호] 독자의 야심, 작가의 야심

이런 말을 하면 오만하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걸 후회한다. 책을 읽느라 그토록 많은 밤과 낮을 흘려보내는 대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열심히 글을 썼어야만 했다. 스스로 문학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작품에 대한 의무에 더 충실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마치 세이렌의 마법적인 노래에 홀려 정신없이 그 노래를 향해 다가가다 결국 목숨을 헌납하고 만 뱃사람들처럼, 책의 유혹에 너무 쉽게 굴복했다. 꾀 많은 오디세우스는 부하 선원들의 귀를 막는 대신 자신을 돛대에 묶어세운 채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향해 나아갔지만, 내게는 책이라는 세이렌의 유혹에 이끌려 파멸하지 않게끔 나 자신을 묶어줄 돛대도, 선원들도 없었다. 더 나아가, 불경스럽게도 나는 평생토록 오직 책만 읽다 죽기를 자주 갈망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강해진다.
책을 쓰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작가들에겐 모독이 될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그 누구라도 평생 책만 읽으며 살아도 끝내 다 읽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을만큼 아름답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심오한 책들도 이미 충분히 많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오늘날엔 책의 과잉 시대가 아닌가? 전 세계에서 쓰나미처럼 책이 쏟아져 나오고 책을 팔기 위한 출판사들의 무분별한 과장 광고와 마케팅이 순진한 독자들을 현혹하는 탓에 옥석을 가려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오늘날 독자들은 무한한 책의 바벨탑 속에서 쉽사리 길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높은 지식과 교양,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평생 1, 2 천 권 정도만 ‘제대로’ 읽어도 충분하다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평범한 직장인 독서가가 호메로스나 그리스 비극 작가들, 셰익스피어나 괴테,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나 샤토 브리앙, 빅토르 위고,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나 토마스 만, 보르헤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밀란 쿤데라, 토마스 핀천, 한국의 최인훈이나『죽음의 한 연구』같은 걸작 소설을 쓴 박상륭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모든 작품을 단 한번씩만 읽는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인가? 문학만 해도 이런데 역사에 중대한 족적을 남긴 동서양의 철학자 역사가만 몇몇 더해도 한 인생 전체가 소진되고 말 것이다.
나 또한 바로 위에 든 작가의 작품들도 대표작 몇 작품만 읽었을 뿐, 읽지 못한 책이 많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탁월한 작가의 작품도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절로 다급하고 초조해진다. 내 마음 속의 근원적인 불안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이 남아있을 때 내 생이 끝장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생각하면 인생은 너무 짧다. 만일 내가 다음 생에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직 읽지 못한 책을 더 읽기 위해서인 경우 뿐이다.
책의 아름다움과 독서의 쾌락을 발견한 이래, 아직 읽지 못한 책들에 이런 병적인 불안과 집착이 창작에 대한 갈망을 압도해왔다. 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저주받은 독자의 운명’이라는 덫에 걸릴 뻔 했던 것이다. 저주받은 독자의 운명이란, 책과 독서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 ‘광기’로까지 치닫아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책과 독서의 역사의 페이지에는 그런 운명에 사로잡혔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2006년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젠틀 매드니스』라는 책이 바로 그런 엽기발랄한 사람들을 다룬 책인데, 이 책의 두께만도 무려 1,110페이지나 된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애독자라면 그 어떤 소설이나 전기류보다도 더 재미있게 읽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몇몇 광기어린 독자들의 얘기는 나를 깊이 사로잡았다.
19세기의 철학자 쟝 밥티스트 보다-데몰랭은 가난한 처지임에도 거의 모든 수입을 책을 사는 데 다 써버리곤 했다. 하루는 그가 마지막 남은 잔돈 몇푼을 갖고 서재로 쓰는 다락방을 내려와 식당으로 향하던 중 서점 창문으로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고 말았다. 몹시 주린 상태였지만 그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밥을 포기하고 책을 샀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져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그 다락방을 떠나지 않았다. 19세기의 프랑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샤를 앙리 발랑탱 모랑쥬는 서가에서 책을 꺼내다 과도한 무게에 시달리던 서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책에 깔려 죽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저주받은 독자의 운명이라는 덫에 걸려버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무한한 존경심과 공감의 탄식을 자아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운명의 덫이 두렵기도 하지만 내심으론 한없이 부럽고 그 뒤를 따르고 싶은 충동도 생기곤 했다.
그러나 제일 부러운 사람은 다섯 권짜리『로마사』(이 책은 현재 한국에서는 푸른역사 출판사에서『몸젠의 로마사』라는 제목으로 2권까지 나와있다)를 쓴 역사학자이자 비문학작품으로 19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놀라운 경력의 소유자인 테오도어 몸젠이다. 그는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도서관으로 달려가 연구와 독서에 몰두했다고 한다. 로마 역사에 관한 책 뿐만 아니라 무려 1,000종에 이르는 논문과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니, 나의 짧은 재능과 게으름을 생각하면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위대한 독자이면서 위대한 작가가 될 행운의 별자리는 따로 있는 것일까? 
테오도어 몸젠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그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몸젠은 합승마차 안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바로 곁에서 어느 소년 하나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짜증이 난 몸젠은 소년을 꾸짖을 생각으로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는 내 이름도 몰라요! 내 이름은 하인리히잖아요!”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만하지 않은가? 광적인 독서가이기도 했던 몸젠은 85세 되던 해에는 서재에서 촛불을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을 찾고는 그 자리에 선채로 책을 읽다가 촛불이 머리카락에 옮겨붙어 얼굴에까지 화상을 입었다고 하니,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까지는 그런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과거 한 때 자칫 그런 덫에 걸릴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용케 거미줄을 탈출하듯 겨우 빠져 나왔다. 
물론 나는 위에서 언급한 위대한 독자들의 대열 언저리에도 가기 힘든 독자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반환점을 이미 돌아버린 탓인지 아직 읽지 못한, 그러나 꼭 읽고 싶은 책들의 거대한 리스트를 생각하면 속이 얼얼해진다. 마음이 자주 쓰기와 읽기의 충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과 창조력에 확신을 가진 작가라면 지나치게 독서에 열정을 쏟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테오도어 몸젠이나 움베르토 에코, 보르헤스 같은 위대한 독자이자 걸출한 작가가 되는 행운의 별자리는 슬프게도 따로 있는 듯 하다. 작가들에겐 불가피하게 작가적인 야심이 있듯, 독자들에게도 피하기 어려운 독자의 야심이란 것이 있을 터이다. 나로 말하자면, 작가로서보다는 독자로서 더 많은 재능과 열정을 가진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작가로서 쓰게 될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거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두 개의 야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방황하고 있다.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허영심이다.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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