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8호] 원래는 칼럼을 쓰려고 했었다

     
               
                                 
intro

오늘 안에 꼭 해야 할 일이 몇 개 있는데 아침부터 머리가 복잡했다. “도솔길 걷고 와야겠다.” 혼잣말을 했다. 옆에서 엄마가 냉큼 “같이 걸을까?” 물었다. 도솔길은 가수원동에서 도안동으로 이어지는, 아직 ‘재개발’의 손이 미치지 않은 숲길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길을 ‘도솔길’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고요하고도 청명한 숲길을 혼자 걸으며 잡생각을 정리하려던 애당초 내 계획이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미 엄마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있었다.
엄마는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붓고 카누 두 봉지를 털어 넣었다. 배낭에 그 쇠붙이를 넣고, 스테인리스로 만든 컵 두 개를 넣었다. 저건 내가 들어야 한다. 손에 뭐 들고 걷는 거 싫은데.

                  

#1

저것 봐라. 너무 예쁘지 않니, 오늘은 미세먼지가 없어서 (엄마 눈에는 그게 보여?) 걷기에 딱 좋다. 가끔 이렇게 엄마한테 같이 걷자고 해. 이 길 따라 쭉 가면 엑스포도 나오고 만년동도 나와. 등등 뭐 그런 얘기들이었다. 얼른 걷고 혼자 카페 가서 생각 정리 해야지. 마음먹고 오늘은 내 육신을 엄마를 위해 사용하겠다. 하고 엄마 곁에 바짝 붙었다.

             

#2

엄마는 바위 절벽 앞에서 멈추었다. 돌 틈에 뿌리를 박고 사는 수십 개의 작은 나무들을 감탄하며 보고 있는 거였다. “봐봐. 강해야 저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매우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돌과 나무가 엉겨서 서로를 붙들어 주는’ 모양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간단히 결론짓고 앞서 걷는 엄마가 안쓰러워졌다. 저 말은 여러모로 강하지 않아서 온몸으로 ‘살기 힘듦’을 겪어본 사람이 하게 된다. 혹은 강하기 때문에 편안히 살 수 있었던 사람이나. 두 쪽 다 안쓰럽긴 매한가지지만.

            

#3

땅이 녹아서 어딜 밟으면 질척거렸다. ‘질척’은 연애하는 내 모습을 묘사할 때 쓰면 좋은 단어다. 마른 땅을 골라 밟기 위해 땅만 보았다. 그러느라 내 왼쪽으로 흐르는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이나 안구의 피로를 씻어줄 진녹색 소나무 친구들을 볼 수 없었다. 질척거리는 게 이렇게 나쁘다. (알아도 못 고쳐.)

                   

#4

엄마는 어제 본 <슈퍼맨이 돌아왔다>이야기를 했다. 휘재 아들들이(엄마가 아는 사람이야?) 정말 귀엽다고. 특히 서준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엄마가 즐거우면 나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남의 아이들을 구경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대개 유명인의 아이. 잘 입고, 잘 먹고, 잘 노는 아이. 낳고 싶은 만큼 낳아서 예쁘게 기를 수 있는 삶. 언빌리버블하지만 그것은 ‘리얼리티’ 육아 예능 버라이어티다. 집안 곳곳에 CCTV와 비슷하게 생긴 카메라를 여러 대 달아놓고 찍으니까, 그럼. 리얼리티지. 그런데 왜 이렇게 빈정대고 싶지? 돈이 없으면 아이를 못 낳는, 낳아도 최소한만 입히고 최소한만 먹여야 하는 현실이 ‘리얼하게’ 보여서 그렇다.  

                         

#5

종아리가 뻐근하게 굳는 느낌이 날 때쯤, 가로로 긴 나무의자에 앉았다. 엄마가 커피를 따라 주었다. 우리 앞엔 강이 있었다. 은색에 푸른색을 섞어 놓은 것 같았다. 물 표면에 꼬집힌 자국이 생겼다. 뾰족한 부분마다 햇빛이 닿아 빛났다. 아이 좋아. 얼른 마셔야지. 컵에 앞니부터 넣고 뜨끈한 커피를 입안으로 살살 흘려 넣었다. 사방에 드문드문,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땐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이곳을 돌면서 커피를 마시는 이들에게 자릿세를 받으면 김선달이 되지만, 강에 붙은 땅을 사서 ‘레이크 카페’ 따위의 이름을 붙이면 카페 사장님이 된다. 커피는 오천 원. 자릿세 포함.    

                 

#outro

걸으면서 했던 생각을 몇 개 기억해서 여기에 적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라고 글로 쓰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주 의심한다. 그러니까, 나는 말을 거는 것이다. 징검다리를 휘적휘적 밟아가는 꼬마에게 엄마가 건넨, “발 빠지지 않게 조심해 아가.”라는 말이 응답받지 못했어도, 그런 말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다르니까. 아, 엄마랑 자주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글 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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