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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8호] 우리가 아는 시간의 풍경
어린 시절, 나는 만화광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이미 만화에 미쳐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내 놀이터는 만화방이었다. 만화방에 얽힌 달콤쌉싸름한 추억은 아주 많다. 소풍 가는 날, 소풍 대신 혼자 만화방에 처박혀 만화만 종일 보다 집에 돌아간 일이며 성당에 가는 대신 만화방에 죽치고 앉아 있곤 하다 들켜서 뭇매를 맞던 기억, 미리 받은 수업료를 만화방에다 다 갖다 바친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가출 아닌 가출 사건을 일으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기억 등등.
그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만화광이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신림동 버스 종점 부근에 있던 만화방에 죽치고 앉아 종일 만화를 보곤 했다.
세월과 함께 내 만화의 황금시대도 지나가 버렸다. 요즘은 만화방 대신 만화 카페가 대세다. 북카페처럼, 글로 된 책들이 아닌 만화가 가득 있는, 첨단(?) 만화방이다. 가끔 옛 만화방 추억을 떠올리며 만화 카페에 들러 만화책을 보곤 하는데, 옛날처럼 만화책을 빌려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싸구려 과자를 먹으면서 보는 그런 재미가 없다.
그리고 내 고향 경북 영천에는 지금도 유명한 오일장이 섰는데, 나는 장이 열리는 날이면 부모님 손을 잡고 장 구경 하는 걸 무척 좋아라 했다. 장에 가면 온갖 신기한 볼거리가 많았다. 만병 통치약을 팔면서 연신 “애들은 가라!”라고 외치곤 하던 약장수, 차력장사, 각설이 풍물장수, 그리고 진기한 온갖 물건이 나를 유혹했다. 요즘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통시장이 있긴 하지만, 고향의 오일장 맛은 찾기 어렵다. 지금의 전통시장은, 그저 마트의 한 종류일 뿐이다.
월간토마토에서 낸 첫 책 《우리가 아는 시간의 풍경》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아련한 내 어린 시절 시간의 풍경을 추억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오프라인 잡지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절, 월간토마토는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잡지를 내면서 점점 더 멋진 잡지를 만들고 있고, 이젠 이런 책까지 낼 정도로 발전해 가고 있다. 참으로 대견하고 반가운 일이다.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숨결’이다. 무슨 숨결인가? 시간과 장소들, 그리고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빚어낸 삶의 숨결이다. 그리고 그 숨결은 정신없이 질주하는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 우리가 행여나 잃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를, 시간의 향기가 빚어내는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정체성이다.
“월간 토마토가 10년 가까이,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며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기록하고, 공간에 스며들어 그 공간 안에 녹아 있는 시간의 틈을 들춰내며 발견하려 했던 것은 ‘숨결’이다. 이 ‘숨결’을 공유하고 싶었다. ‘숨결’만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다. 6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대창이용원의 이종완 이발사, 종일 차가 오가는 공영주차장 작은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이희탁 씨,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신탄진 거지다리 넝마주이들의 삶, 손목의 깁스를 깨고 칼을 갈러 나가는 칼갈이 김덕호 씨 이야기. 아무럴 것도 없는 이들 삶에서 진하게 배어 나오는 숨결이 이 시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함께 생각하고 싶었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임시숙소로 옛 모습을 잃어가는 만화방, 단관극장으로 한때 호황을 누렸으나 현재는 성인 전용 극장으로 전락한 동화극장, 한낮의 시끌벅적함이 사라지고 고요가 찾아온 전통시장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싶었다. 이것은 낡고 오래된 것에 관한 맹목적 ‘향수’와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변화의 속도가 빠른 만큼 공간과 장소들, 사물들도 너무 빨리 변해 버린다. 그럴 때 우연히 찾아간 어느 오래된 골목길, 그 골목길에서 만나는 오래된 이발소, 구멍가게, ‘다방’이라고 적힌 간판, 이런 오래 묵은 것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하지 않는가? 시간의 중첩,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공간, 하나의 장소에서 겹쳐지면서 거기에 서 있는 나 자신의 삶의 역사 역시 그렇게 겹쳐지면서 내 속으로 흘러드는 느낌.
이 책을 읽는 시간 역시 내게는 그런 오래된 골목길을 서성이며 추억과 향수에 젖고, 잃어버린 내 과거의 시간들과 조우하고, 그 과거의 시간들이 내 안에 쌓아 놓은 온갖 시간의 궤적의 ‘가치’ 와 ‘의미’를 떠올리며 나 자신과 기꺼이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책엔 그저 그런 풍경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풍경의 중심인 진정한 풍경,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있다. 어쩌면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아버지 어머니가 겪고 보았을, 혹은 바로 그 분들의 삶의 풍경 같은 것.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어느 골목길에서 ‘대창이용원’이라는 이발소를 수십 년째 하고 있는 분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1937년생이고, 현재 80세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 ‘대창이용원’이라는 오래된 이발소에서 손님들의 머리를 깎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해방기, 전쟁, 쿠데타, 산업화, 그 모든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분.
그는 9남매의 넷째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땐 6·25전쟁이 터졌다. 북한 인민군이 내려온 3개월 동안 그는 매일 밤 그들에게 소집 당해 김일성 찬양가 같은 노래를 배우고 불러야만 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서는 480명 중 48등이나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날부터 그는 생계를 위해 철공소에 다니고, 그러다 이발 기술을 배웠다.
제대할 무렵인 1961년엔 5·16쿠데타가 터져 제대가 몇 달이나 미뤄지는 어이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리하여, 어쩌면 중학교 입학금을 내고 학교를 다녔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를 한 소년의 인생은, 이발 기술과 함께 이발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로 살면서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고, 지금까지도 이발사로서 일을 이어가고 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남자들이 ‘미용실’ 이 아닌 이발소를 찾던 시절, 그는 제법 돈을 벌기도 했지만 세월과 함께 유행도 변하고, 미용실이 성행하면서 이발소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는 80년 세월을 지나오고 있는 것이다.
고령의 나이, 이젠 쉴 때도 되었지만 그는 쉽사리 이발소 문을 닫지 못한다.
“나에게 머리를 깎겠다고 그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어?”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다방, 헌책방, 단관극장, 양복점을 오랫동안 운영해 오고 있는 모든 이들도 그런 심정이리라.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 시간과 함께 마치 스스로가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자체가 되어 버린 사람들도 여전히 힘차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인 오연호 기자가 쓴 추천의 글이 이 책에 딱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누가 글 속의 주인공이고, 누가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풀어쓰고 있는지 헷갈린다. 지역의 한 골목길에서 인생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는 《월간 토마토》의 대표기자 이용원 씨를 비롯한 글쟁이들이,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을 닮아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들이 아니면 누가 그들을 주목했으랴. 이리하여, 우리의 인생은, 역사는 또 한번 풍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