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8호] 장래 희망은 콧수염

소녀는 인어가 되기 위한 긴 여행을 떠났지

어느 곳에서도 소녀는 인어를 보지도
인어를 보았다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지만
가족들에게 편지 쓰는 건 잊지 않았지

인어의 지느러미를 봤다던가
인어의 노래를 들었다던가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한 편지였지만
자꾸 쓰다 보니 정말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지

들르는 곳마다 인어가 되기 위해
기나긴 여행 중인 소녀의 사연은 화제가 되었지
인어가 되기 위해 기나긴 여행 중인 소녀
를 줄여 사람들은 인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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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정, 〈장래 희망은 인어〉 부분,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사, 2003)

             

                         


                                   

사진

콧수염을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다. 여자는 왜 수염이 없을까? 노인들의 희고 긴, 산신령 같은 수염을 보면 훔치고 싶었다. 어떤 증표처럼 그것은 내가 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의미했다. 


성미정의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은 20대 때 지금은 사라진 어느 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했다. 아주 단순하고 심심한 이 시를 읽고 그때는 코끝이 찡했다. 집을 떠나 멀리 와 있으니까, 인어가 되고 싶으나 인어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이라는 이 시집에서 성미정 시인은 여러 시인들(이상, 김수영, 김종삼 등)을 경쾌하게 오마주하거나, 자신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려 낸다. 가령 “남편을 골려 주는 재미로 사는 35살의 가정주부 성모 씨(〈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로 자신을 시에 등장시키거나, “나는 내 살을 음미하며 외로움을 달랬다(〈식성―나의 살〉)”며 시인이자 주부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풀어 낸다. 시집을 읽다 보면 온갖 감정으로 범벅이 된 일상이 아주 가벼운 ‘야채’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문득 깨달으며 풋,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시인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듯한 아삭거리는 식감의 언어를 우리는 톡, 톡 주워 먹기만 하면 기분 전환에 그만이다.


그래서 30대 중반에 접어든 내가 이 시를 모처럼 다시 꺼내 읽어 보니 드는 생각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20대에는 그래도 막연히 인어가 될 수 있으리라 짐짓 믿어 보려 했다면 지금은 결코, 죽어도 인어가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만년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카를 융 기억 꿈 사상》)”라고 했다. 


콧수염이나 인어 따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무엇이 된다.’라는 생각 자체가 일종의 오해가 아닐지.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거나 ‘되어 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이 세계를 흘러가고 그 세계의 형태에 따라 그때마다 몸을 바꾸는 물과 같은 존재다. 

                     

                                 


글 그림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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