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8호] 시간이 만든 분위기와 공간이 품은 이야기

회색 건물은 정직하게 서 있다. 기록에 이 건물은 철근세벽스라브 구조의 사무실로 등록되어 있다. 1961년 2층까지 지었다가 1968년 3층을 증축했다. 대한상이군경회의 소유였던 그 건물에는 국가유공자나 상이군인을 위한 사무실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편하게 그 건물을 보훈회관이라고 불렀다. 기록으로는 1992년부터 대한상이군경회 외 2인의 소유로 되어 있다. 1961년 처음 지었을 때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것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별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물은 아니에요. 다만 상이군경회가 있어서 사람들이 보훈회관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국가에서 관리하는 그런 건물은 아니었고요. 거긴 480-1번지 이고, 대흥동 보훈청이라고 하면 209-1번지였어요.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건물은 말 그대로 살림집이었죠. 시청 앞이었고 하니까 임대가 잘 되던 곳이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살았던 집이에요.”


유병우 CNU 건축사 사무소 대표의 이야기다. 어떤 의미를 품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5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묘한 분위기를 품었다. 그 분위기 덕분에 무언가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1층은 오브하우스, 2층은 무언가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작업실이 되었다. 2015년 유피시스템주식회사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건물은 사라지고 큰 복합상가가 생길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오브하우스
오브하우스 070.7799.4799 ┃ 월~토 ┃ 13시 ~ 21시 30분
               

회색 건물 1층, 왼쪽으로 보이는 하얀 문이 열리면 짧은 골목 하나가 나온다. 건물 안채는 건물에 달린 살림집이었다. 
오브하우스는 골목 안 분위기를 한층 밝게 한 1등 공신이다. 오브하우스가 들어오기 전 불 꺼진 창고로 쓰였던 건물은 어쩐지 음침한 분위기만 더했다. 인터넷으로만 판매하려고 했던 수입 소품 둘 곳을 찾다가 발견한 건물은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피어오르는 상상력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인테리어 전문가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한 달여간 공간을 꾸몄다. 


“처음 봤을 땐 폐허 같았어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니까 꼭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거예요. 오프라인 상점 운영할 생각이 아니어서 싼 데만 골라서 봤거든요. 가격도 가격이지만 건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어차피 리모델링을 해야 하니까 아버지랑 같이 건물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오브(Aube)는 프랑스어로 새벽, 여명, 발단, 시작을 의미한다. 오후 특정 시간이 되면 햇볕이 한가득 안으로 들어온다. 오브하우스에는 소품 중에서도 특히 시계가 많다. 고풍스러운 시계가 벽에 걸려 있기도 하고, 선반 위에 있기도 하다. 꼭 오래된 시간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대흥동 오랜 터줏대감 경미당

경미당은 30여 년 전에는 밖으로 보이는 회색 건물에 있다가 3년여 전,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유진열 씨는 바깥에 있는 건물을 ‘보훈회관’, 안에 있는 건물을 ‘은호회관’이라고 불렀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유진열 씨도 문 닫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 표구사를 할 때는 그림을 많이 사기도 했다. 경미당 안에는 유진열 씨가 사 두었다가 아직 팔지 못한 그림이 벽에 기대 몇 겹씩 서 있었다. 유진열 씨는 표구하며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한 점씩 사두었다가 팔며 돈을 벌기도 했다. 예전엔 그렇게 그림에 투자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산 가격보다 한참 싸게 팔 수밖에 없다. 유진열 씨로서는 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리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에야 그림을 사는 사람도, 집에 액자를 해서 그림을 거는 사람도 많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잖아요. 심지어는 가족사진 하나도 집에 거는 문화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표구하는 사람이 없지. 잘 될 때는 대전에 표구사만 100군데가 넘었어요. 표구사도 기술을 배워서 하는 거기 때문에 전망이 좋은 줄 알고 시작했지. 실제로 10년 전까지만 해도 잘 됐어요. 지금은 표구사도 거의 사라졌지.

                     

                        

계단을 올라가 첫 번째 집에는 
한 군과 곽 양의 ‘몽상mongsang’

둘이 함께 작업할 공간을 찾았다. 저녁에만 작업실을 이용하기 때문에 임대료가 비싸지 않으면서도 함께 작업하기에 알맞은 크기, 집과 회사와 적당한 거리 등 여러 조건을 비집고 넣다 보니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그러다 오브하우스를 발견하고 위층이 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물도, 공간도 마음에 들었다. 2015년 12월, 보자마자 바로 계약했다.


한 군은 프라모델 만드는 걸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다. 혼자서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배우는 과정이다. 건담 프라모델 같은 피겨를 직접 만드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해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 한 군의 책상 위에는 그가 만들고 있는 프라모델 머리가 나무 꼬치에 끼어 있었다. 곽 양은 자수를 한다. 직장 그만두었을 때 잠깐 배웠던 걸 계속한다. 한 군보다는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배웠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재미있었다. 꾸준히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원래 저희가 의견 일치가 잘 안 되는데 처음으로 합이 맞은 게 몽상이라는 작업실 이름이었어요. 꼭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저는 꾸준히 해서 직업으로 삼고 싶고요. 곽 양은 천천히 실력을 키우는 중이고요.”

                         

                                

계단을 올라가 두 번째 집에는 
차 군의 만화작업실

갑작스럽게 옆집 문을 두드렸다. 두 번째 문이 열리니 또 다른 분위기다. 만화가를 꿈꾸는 차 군의 작업실이다. 진한 민트색 페인트를 칠하고, 크기가 다른 포스터가 벽에 붙었다. 수집하는 물건을 모아놓기도 하고, 작업하다 지칠 때 몸을 기대 눕는 소파도 한쪽에 놓았다. 


“작년 4월에 들어왔어요. 작가로 데뷔하고 싶어서 웹툰을 준비하고 있어요. 만화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수업이 없을 때 작업실에 나와요. 여기는 선배가 알려 줘서 오게 됐어요. 제 바로 옆 방도 만화 그리는 선배의 작업실이에요. 요즘에는 잘 안 오는데 선배 덕분에 여길 알게 됐죠. 처음 왔을 땐 1층에 오브하우스가 없어서 어두침침했어요. 지금은 좀 밝아졌죠.”


스릴러물을 좋아해서 준비하고 있는 차 군의 작업실에는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낸 흔적이 곳곳에 있다. 이 흔적이 어느새 공간안에 스며들었다.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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