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8호] 소제호의 바람

소제동에서 바람은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휘어지고 꺾어지고 조금 달리는 듯했다가 이내 골목길을 굽이친다. 이 바람의 촉감은 빨랫줄에 널린 다 마른 이불 홑청 사이를 두 손으로 쫙 가르며 지나갈 때 들리던 기분 좋은 바스락거림과 비슷하다. 골목 굽이에 앉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나올 바람을 기다리던 유년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이제 소제동의 바람은 이곳저곳에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고 몇몇 곳은 그럴 채비를 하고 있다. 바람 소리와 느낌, 그것이 때때로 싣고 온 알듯 모를 듯한 냄새까지도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어떤 장소의 소소한 모습이 그립다는 것은 내가 그곳을 떠나왔거나 그곳의 모습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 변화는 진보요, 진보는 이전보다 좋아지는 것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았다. 불편한 것은 개선되어야 하지만 소제동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옛 정취가 사라지는 것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소제동에 살았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된 일이 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당신이 지은 집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 지은 지 50년이 훌쩍 넘은 친정집은 겉은 여러 차례 보수했지만, 그 근본은 아버지가 날라다 쌓았다는 흙벽돌을 품고 있다.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이 집을 지을 때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는데 옆에서 귀동냥하던 나는 젊었을 적 아버지가 훌륭한 일을 해낸 것만 같아 달리 보이곤 했다. 친구들이 우리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살기도 했으니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나름 어린 소견에도 소제동과 우리 집에 대한 자부심이 컸었던 것 같다. 덩달아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왜 소제동인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자연스럽고 익숙해진 것에 의문을 갖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학기 초에 담임선생님이 가정환경조사를 하였다. 대동, 신안동, 가양동, 소제동 일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키가 작아 맨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소제동 사는 사람 손들어.” 할 때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교단에서 나를 굽어보며 “동네가 얼마나 지저분하면 날마다 소제하나?”라고 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소제라는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마루나 마당 소제를 자주 시키셨기 때문이다. 그 소제가 내가 살고 있는 소제인가 싶어서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드는 것이었다.

                  
민감한 사춘기에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것과 자랑스러운 소제동이 늘 청소가 필요한 곳으로 격하된 것에 대한 분함을 안고 집에 왔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 아버지에게 “왜 우리 집은 하필 소제동에 있어? 선생님이 우리 동네가 얼마나 지저분하면 날마다 소제하냐고 그랬어.”라고 불만을 말하였다. 아버지는 밥숟가락을 뜨다 말고 “담임선생님이 그랬다고? 네 담임선생님 이름이 뭐냐?” 하고 물으셨다. 담임선생님 성함을 듣고 난 후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더니 알았다고만 하시고 무심히 밥을 드셨다. 내 속상함을 풀어 주기는커녕 묵묵히 밥을 드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정말 담임선생님 말이 맞나보다 짐작하였다.

                 
다음 날 종례를 하는데 선생님이 나를 보며 “네 아버지가 ○○○시냐?” 하면서 빙그레 웃으셨다.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게 의아했지만 이미 선생님을 미워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네.” 대답하고는 집으로 쌩하니 오고 말았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밥을 드시다 말고 엄마에게 “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수정이 담임선생이 내 국민학교 동창이야. 전화해서 물어보니 맞다네. 짜식, 국민학교 때는 내 꼬붕이었는데 공부를 계속했는지 선생이 되었네?” 하셨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다음 날 조회를 하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 꼬붕이었다면서요? 하하하’ 하고 소심한 복수를 하였다. 

                                   
소제동 이름에 얽힌 작은 일화인데 정작 소제동의 유래를 알게 된 것은 2015년, 가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엽서로 제작된 소제호 사진은 내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하늘을 향해 한껏 잎사귀를 들어 올린 연들과 제각각 휘어졌으나 결코 옆에 있는 나무를 거스르지 않는 소나무들 사이로 소제동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두 소나무 무더기 사이를 지난 바람이 부드러운 초가집의 곡선을 타고 넘어 소제호의 연잎에 닿는 찰나를 담은 듯 보인다. 소제동은 소제호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소제호는 중국 소주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호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소동파가 항주 자사로 있을 때 쌓은 소제 방죽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유래야 어찌 되었든 지극히 아름다웠던 곳임이 틀림없다. 대전역 주변에 한때 이렇게 멋진 호수가 있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호수의 흔적을 2015년 여름, 대동천은 88년 만에 연꽃을 피워내는 것으로 증명하였다. 이제 소제동을 떠올리면 소제호에 불던 무채색의 바람도 함께 살랑이며 일어날 것이다. 은은한 연향을 싣고서 말이다. 

                                             

                     


글 천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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