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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8호] 사울의 아들 part1
# 1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눌러 내렸다. 경의를 보내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영화 <사울의 아들>은 개봉 한 달이 지난 지금, 관객 수 2만을 조금 넘기며 대부분 관에서 내려가고 있다. 지난해 깐느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지만, 아트무비로 분류되어 수입된 기존 외화의 스코어를 밑돈다. 영화를 본 평론가들은, 몇 가지 지점에서 공통된 의문과 해석을 내놓았다.
홀로코스트 재현 시 윤리의 문제, 미학적 관점에서의 기법, 오프닝의 의도, 엔딩에 등장하는 아이의 의미, 아웃 포커스 된 배경, 그리고 아들의 진위에 대한 해석들. 오랜만에, 한 영화에 대해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의견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이렇다. 감정이라기보다 사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세계 영화사의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의 선두가 출현했다. 이력을 찾아볼 수 없던 이 헝가리의 신인이, 자신만의 명확한 언어로 본인이 서 있는 세계의 전과 후를 완벽히 구분 지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사실이 저릿할 만큼 또렷이 느껴졌다. <사울의 아들>이라는 실체를 앞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이 필요한 일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영화인 것은 확실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동안 이 영화를 펼쳐 두고 세밀히 뜯어 보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칼럼을 쓰려고 했으나, 나는 지면을 3회로 나눠 영화의 주요 장면을 scene by scene 하려고 한다. <사울의 아들>을 흥미롭게 본 독자는, 어떻게 이런 작품이 가능했는지 함께 곱씹어보면 좋겠다. 이 작업은 오는 6월, 《월간 토마토》 110호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말미에, <사울의 아들>과 표면적으로 몇 가지 궤를 같이하는 영화 <귀향>에 대해 적겠다.
# 2
먼저 영화의 배경인 당시 폴란드의 상황을 정리해본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 이후,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이탈리아·일본 세 나라는 식민지를 찾아 나섰다. 자구적으로 경제회복이 불가능했던 그들이 택한 방법은 전쟁이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 나눠 먹자는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폴란드는 13세기 후반부터 유럽 각지에서 박해받던 유대인을 받아들인 결과, 세계 1차 대전 후 자국 인구의 1/3이 유대인이었다.
1939년 독일은 다시 폴란드를 점령하고, 소련은 폴란드 동부와 발트 3국을 합병한다. 그러나 1941년 약속을 깨고 독일이 소련을 급습하고, 그제야 소련은 미·영·프가 주축이 된 연합국에 가담하여 폴란드 서부로 진격한다. 이후 4년간 지속했던 전쟁으로 5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됐고, 이중 폴란드에서만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울의 아들>은 독일이 항복하기 1년 전인 1944년, 폴란드 남부의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진 제 2수용소)에서 소련군을 기다리던 유대인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중, 같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인솔하거나 소각한 후 뒤처리를 하며 목숨을 부지했던, ‘존더코만도’라는 계층에 속한 한 남자에 집중한다.
# 3
나는 영화에서 이런 오프닝을 본 적이 없다. 화면이 열리면, 초점이 나간 숲이 보인다. 이미 카메라는 초점(무엇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으로 하나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곧이어 호루라기가 울리고, 화면 멀리 몇몇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인물이 가까이 다가오자, 한 남자의 얼굴에 초점이 맞는다. 표정도 핏기도 없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남자, 사울이다. 뒤이어 그가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을 인솔하려 이동하자, 카메라는 그의 등에 초점을 맞춰 팔로우한다. 영화를 보면, 이 초점의 진행은 굉장히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의 동작과 카메라의 태도가 연이어지며, 이 설정의 엄청난 효과가 차차 드러난다.
초점이 흐린 상태에서 숲을 조망할 때, 관객은 답답함과 의구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그러다 사울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답답한 감정을 그에게 쏟아내 해소하려 한다. 사울과 관객 사이에 관계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뒤이어 사울이 움직이며 고정되어있던 카메라가 그를 따르자, 관객은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등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초점은 배경을 흐린 채 그와 그의 가까이 있는 부분만 선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은, 사울을 통해 주변 풍경을 정확히 볼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빠진다. 이 절망감은 다시, 풍경과 관객 사이에 놓인 그에게 쏟아진다. 애초 인물의 등이나 어깨를 관객 사이에 놓고 촬영한다는 것은, 관객이 주체적으로 인물 너머의 대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걸쳐진 인물이 절대적 주체가 되어, 관객은 그가 보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대상이 속한 풍경을 정확히 볼 자격을 박탈당한 관객의 절망감은 곧, 사울이 그 풍경 속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그림자이다. 이제 관객은 사울이라는 남자를, 더는 자신과 분리된 대상으로 관조하지만은 않는다. 이는 영화 속 이야기의 주체, 영화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주체가 서로 동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상이 사라지고 주체가 곧 대상이 되는 순간, 관객은 대상이자 주체가 된 사울의 심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울이 있는 곳은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절멸 수용소이다. 사울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혹은 그에게서 의식적으로 배제된 대상을 관객이 자의적으로 상상하여 수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관객은 사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무언가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의견이 틀린 이유이다. 이 영화는, 시작과 함께 관객의 상상을 거세해 버리는 영화이다. 감독은 단순히 초점을 조절한 오프닝으로 이 같은 의미를 만들어 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기막힌 오프닝을 본 적이 없다.
# 4
사울을 따라 가스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사울이 인솔한 유대인들은, 샤워를 끝내면 따듯한 스프를 먹을 수 있다는 독일군의 말에 옷을 벗고 있다. 사울은 그들의 탈의를 도우며 분주하다. 카메라는 간혹 그들 가까이 다가가 옷깃을 만지는 사울의 모습을 투 샷으로 잡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놓고, 사울의 인간적인 감정을 조금씩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절대 그들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다. 곧이어 전라가 된 몸들이 사울의 주변에 모여,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관객은 사울의 뒤로 보이는 살색 전라를 ‘곧 죽임을 당할 피해자’로 인식하지, ‘성적 대상이 되는 벗은 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전라를 자세히 보기 위해, 사울이 그들 가까이 걸어가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에서 증명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유일한 대상이자 주체가 된 사울과 관객 사이의 관계가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사울은 관객이 자신의 주변을 희미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초점의 차원은, 사울의 바깥에서 사울을 찍고 있는 카메라이자 관객이 그에게 부여한 의도일 뿐이다. 이것은 즉, 형식이자 감독의 태도이다. 사울이라는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대상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이는 마찬가지로, 풍경 속 대상을 향한 관객의 욕망이 주체인 자신에게 소급되도록 하기 위한 의도와 일치한다. 나는 사울이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며, 이 홀로코스트 영화가 취한 태도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그것은, 그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울은 그것이 전라든, 학살이든, 죽은 시체더미든, 그 무엇이든 정면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한 개인인 사울의 태도이자, 곧 영화의 내용이다. 사울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그 표면 아래 부글거리는 욕망이라는 내용이, 홀로코스트라는 소재에 대해 감독이 취한 형식에 다가와 남김 없이 뒤엉킨다. 즉, 관객이 앉은 자리에 세워진 카메라가 화면을 그려내는 형식,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사울이 발생시킨 내용이 서로 부딪혀 섞이는 것이다. 이는 전라가 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간 다음,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 5
독일군은 가스실이 닫히자, 존더코만도들을 문 앞에 나열시킨다. 그들이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기 위함이거나,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면 막기 위함인 것 같다. 사울도 그들 사이에 같이 선다. 그가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으니, 비명은 더 가까이 들린다. 관객의 마음속엔, 문 안쪽 상황을 상상하려는 불쾌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이 욕망의 실체를, 흑백 고전 홀로코스트 영화 중 한 장면을 찾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서 있는 한 유대인과 극장에 앉아있는 당신 사이에 철조망 하나가 쳐져 있다. 그리고 그 철조망엔 전기가 흐르는 것을 당신은 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전기 철조망을 향해 그 유대인이 돌진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당신은 다음 장면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가 전기 철조망에 부딪히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기대하는가, 부딪혀서 몸을 부르르 떨며 나자빠지는 것을 기대하는가. 관객은 눈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며, 그가 절대 부딪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가 부딪혀 나뒹구는 것을 손가락 사이로 보려 한다. 여기서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의 윤리와 미학에 대한 문제가 시작된다. 다시 사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금 가스가 새어 나오는 가스실 속 유대인과 관객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바로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울이다. 그는 내내 풍경 속 대상과 완벽히 분리되어, 생사에 대한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일관해 왔다.
하지만 이 장면의 대상인 유대인들이 가스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상은 초점으로 제어할 수 있던, 희미하게나마 보이던 이미지가 아니라, 눈앞에서 사라져 음향으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이때,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던 사울이 고개를 떨군다. 동족의 절멸을 더는 버틸 수 없어, 인간적인 마음을 내비친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사울만 바라보고 있던 관객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이후, 소각장 속 비명이 사울을 이기는데 정확히 10초의 시간이 흐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혼돈에 빠진 관객은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제 자신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질문을 퍼붓는다. 이것은 감독이, 자신과 사울과 관객을 동시에 카오스 상태로 몰아넣고 승부를 던진 것이다.
감독 자신이 이 영화를 장르로서의 포르노그래피나, 스너프 필름, 스릴러나 고어 물로 의도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사울을 통해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간적인 감정이다. 이는 동시에, 감독이 관객이 가진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관객이 절멸 앞에 선 사울에게 연민을 느끼며, 자신도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뒤이어 관객은, <사울의 아들>에 대해 홀로코스트 소재로서의 모든 윤리적 혐의를 거두고, 사울이라는 한 인간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감독은 사울이 고개를 떨군 1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영화의 모든 형식과 내용을 화학적으로 일치시킨 후, 검은 화면을 띄운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이라는, 그에게 곧 ‘분신’일 수 있는 대상의 등장을 예고한다.
# FIN
지면에 이 영화와 관련된 사진을 쓸 기회가 앞으로 두 번 더 있으니, 이 사진을 먼저 띄운다. 영화를 본 독자는, 왠지 눈에 익는 느낌에 섬뜩할 것이다. 극 중, ‘카츠’라는 남자가 나치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이 사진과 그 장면은 정확히 구도와 내용이 일치한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실제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갇혀 있던 ‘Alberto Errera’라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1944년 8월에 사망했다. 폴란드는 전쟁이 끝난 2년 뒤인 1947년 7월 2일, 남아 있는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와 비르케나우 제2 수용소의 지대 위에 박물관을 설립하기로 한다. 이 사진은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 그럼 다음 호에서 이어, 사울의 ‘아들’과 만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