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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8호] 달맞이 꽃 아이들
3월의 봄, 많은 식물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3월의 봄은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하는 계절이다.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학교를) 못 다니겠어요.”
“아무리 말해도
우리 애가 말을 안 들어요.”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학생이 있는데….”
개학을 했지만 며칠째 학교에 가지 않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다, 부모님은 이런 아이의 상황에 달래기도 때론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상황은 그저 악화될 뿐이다. 가끔 마음먹고 학교에 나갈 때면 모든 교사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문제아라는 딱지만 옷에 잔뜩 붙이고 돌아온다. 나는 이런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대안학교 교사이다. 이들은 대개 공립학교에서 방황하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자 할 때, 나를 만나게 된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교육이라고 하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업중단위기학생’이라는 꼬리표는 어느새 그들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우리학교에는 그런 그들을 위한 특별한 수업시간이 있다. 이름하여 ‘작은모임’. 주입식으로만 배우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배움을 찾아 나서는 능동적인 수업시간이다.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 세우고자 교사들이 고안해 낸 수업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비슷한 주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모여 자연스럽게 모임을 만든다. 어쩌면 학교 안의 동아리 수업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 형태가 더욱 자유롭고 학생에 의해 실질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한 주는 기타모임, 한 주는 커피모임, 때론 영화모임에 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냥 쉬기도 한다. 학생 스스로 배우고 싶은 활동을 한다는 정체성만 유지되면 무엇이든 가능한 시간이다.
“가장 맛있는 라면을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십시오!”
영화 <식객>(2006)의 주변인으로 등장하는 한 인물이 힘겹게 군 생활을 하던 시절 선임이 끓여 줬던 라면 맛을 잊지 못하고 그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선임에게 찾아가 던졌던 질문이다.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그 인물은 여러 가지의 비법을 추리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 선임으로부터 레시피가 적힌 한 장의 메모를 받는다. 그리고 메모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고플 때 먹을 것”
라면은 배고플 때 먹어야 제 맛이다. 사실 모든 음식이 그렇지만, 비단 음식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은 건강이 망가졌을 때, 비로소 운동을 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상관없이 스스로 방이 더럽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청소를 한다. 배움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을 때, 비로소 스스로 찾아가서 배운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비법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은 어리석게도 좋은 교육을 위한 방법론에만 매몰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전제하여 생각할 것은 그 학생이 배고픈 시간이 언제인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확인해 보는 것이 아닐까? 작은모임은 배고플 때 먹는 라면과 같이 배우고 싶은 시기를 기다리는 수업이다.
나는 기타를 잘 치지 못했다. 가장 기초가 되는 A코드, D코드도 간신히 쥘 정도였다. 내 버킷리스트에는 몇 년째 ‘기타 치며 노래하기’란 과제가 적혀있었다. 어느 날 어설픈 실력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복도에 나와 이야기하는 몇몇 학생들 옆에서 집적거렸다. 역사적인 기타모임이 결성된 그날이다.
처음 교사 두 명에 학생 네 명으로 시작된 기타모임에는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열 명도 넘는 학생이 다녀갔다. 우리 학교 학생 정원이 열다섯 명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수였다. 하지만 여리여리한 소녀의 손가락은 철로 만들어진 가늘고 차가운 끈을 버텨내지 못했다. 마지막 수업에 남은 학생은 단 세 명이었다. 물론 스파르타 전사 300명이 아쉽지 않을 만한 세 명의 여전사였지만.
“잘생긴 기타 선생님으로 섭외 좀 부탁해요.”
“저기…. 기타 샘, 그냥 샘 노래 듣고 싶어요.”
“답답한데, 오늘은 야외로 나가죠.”
작은모임 시간에는 학생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우리는 학생의 바람대로 노래잘하는 인디밴드의 멋진 강사를 섭외했고, 탄탄한 기초보다 한 주, 한 주 즐길거리를 찾는 방식으로 진행해 나갔다. 열심히 배우기도 했지만, 때론 강사님의 달콤한 노래 메들리에 시간을 때우기도 했고, 때론 야외 수업을 명목으로 밖에 나가 기타모임 대신 커피모임을 한 적도 있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 어떤 강제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그런 모임이었다.
우리 학교는 1년 동안 배운 것을 마무리하는 발표회를 한다. 그마저도 강제는 아니지만, 기타를 배운지 아니 쳐 본 지 열다섯 번 정도(1주일에 1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마어마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발표회 준비 겸, 길거리 버스킹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으능정이 거리에서 말이다. 두려움을 느낀 난, 외딴곳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세 명의 여전사들은 유독 사람이 많은 장소를 고집했다. 못난 실력에 급기야 기타 잡은 원숭이가 된 우리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길거리 버스킹을 했다. 누가 그랬던가, “배움과 두려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고. 우린 그날의 길거리 버스킹을 통해 실력과 더불어 엄청난 강심장을 갖게 되었고, 그 기세를 몰아 발표회까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작은모임 시간은 주입식 교육에 맞지 않아 입맛을 잃은 특별한 학생을 위한 회복의 시간이다. 자신이 원하는 흥미있는 활동을 하며 스스로 배우고, 그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시간이다. 우리 학교의 많은 시간이 이런 시간의 연속이다. 대부분의 학생은 이런 활동에 즐거움을 느끼며, 잔뜩 움츠렸던 몸의 긴장을 푼다. 그리고 서서히 내뻗어 천천히 싹을 올리고 결국 꽃을 피운다.
모두들 학업중단위기학생이라고 말하던 아이들이었다. 배움에 대한 의지가 없는, 교육 받기를 포기한 학생들이라고 보았다. 그리나 그들에게도 꽃이 피어난다. 아이들의 본질에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배움의 씨앗이 심겨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학교에서 맞는 3월의 봄 햇살이 혹독했던 이유는 이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피어나는 꽃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따사로운 햇살보다 은은한 달빛에 피어나는 달맞이 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