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08호]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몰랐어요, 전혀. 여성들이 그토록 불안을 느끼는지….”
이 책을 읽은 한 남성의 반응은 그랬다. 그럼에도 페미니스트 하면 왜 과격한 여성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고. 남성만 그럴까? 페미니스트를 남성의 힘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잘못 읽고 있다면 당신의 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 폭력은 인적이 드문 어둑한 골목 그늘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밤길, 어두운 주차장, 늦은 시각 엘리베이터 안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호화로운 스위트룸에서 벌어지는 권력자의 폭력은 언론 기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라고. 대낮 광장에서,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학교 캠퍼스에서, 사무실에서, 내 집 거실에서, 누군가와 전화통화에서 경험되는 것은 별것 아닌 양 취급한다. 하물며 점잖은 대화에서 ‘아주 중요한’ 남성들에 의해 여자들이 발언할 기회, 경청 될 기회, 참여하고 존중받을 기회를 빼앗기는 것에 대해선 무감각하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 사건은 뉴스의 배경에 드리운 벽지처럼 취급된다.
이 책의 원제 ‘MANSPLAIN(남자를 뜻하는 단어 man과 설명하다, explain을 합한 신조어)’은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2010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단어로 선정, 2014년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등재되었고, 2014년 오스트레일리아 올해의 단어로 꼽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성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반감을 품는 옹졸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페이지 자체를 건너뛰었을 테니까. 저자 리베카 솔닛은 1980년대부터 환경, 반핵, 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이면서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다. 그녀의 이력과 저력을 믿고 따라가 보자.
그녀가 주목한 젠더간 엄청난 힘의 격차는 때론 악랄한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2016년 2월 6일, 전 세계 강간합법화시위가 계획되었던 사실은 비록 취소되긴 하였으나 놀라울 정도다. 일베가 여성혐오를 무임승차나 이중 잣대를 근거로 하고 있듯이 웹사이트 return of kings는 페미나치(꼴페미)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시위 주최자인 Roosh V는 “공공장소에서 여자에게 가해진 폭력은 법적 처벌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제안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강간 문화에 대해 저자는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가 남성 인구 전체에게 종속된 위치에 머물도록 만드는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라고 일갈한다.
대체 남성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놀라지 마시라. 어느 의학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이라는 성별은 출생 전 담배 연기에 노출된 것, 반사회적 부모를 둔 것, 가난한 가정에 소속된 것과 더불어 폭력적 범죄 행동을 유발하는 위험인자 중 하나인 것으로 여러 조사에서 확인되었다.”라고 한다. 너무 흥분하지 않길 바란다. 이 사실을 근거로 남성을 비난할 생각이 있거나 모든 남성이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처럼 고문에 가까운 루드비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저자 리베카 솔닛은 여성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문제로, 혹은 위기로,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지만 젠더는 있다고. 하지만 저자의 눈에 비친 모든 사건은 제각각 동떨어진 일화로만 묘사된다. 점들은 하도 바싹 붙어 있어서 하나의 얼룩으로 녹아들 지경이지만, 그 점들을 잇거나 그 얼룩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처럼.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으로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저자가 폭력을 젠더에 대입시키는 방식은 더욱 흥미롭다.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그녀의 이름은 아시아였다. 그의 이름은 유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침묵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의 이름은 풍요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것이었지만, 그녀가 과연 무엇을 소유했던가?
그의 이름은 그의 것이었고, 그는 그녀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그의 소유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의향을 묻거나 뒷일을 염려하지 않고도 그녀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다.
선뜻 동의가 되는가? 고개를 조금이나마 끄덕였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가 평등주의자라는 공식에 반쯤 동의한 셈이다. 제국주의, 보수주의, 권위주의가 바라는 전통적 위계는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재산, 권력, 인종, 젠더 덕분에 잘못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이쯤에서 피로가 몰려온다면 책 표지 그림을 보고 가도 좋겠다.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여자의 몸에서 보이는 부분은 손가락 몇 개와 갈색의 탄탄한 두 종아리와 두 발뿐이다. 흰 시트가 여자 앞쪽에 걸려 있는데, 바람이 그것을 여자의 몸으로 날려 붙이는 바람에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옷가지를 널어 말리는 일은 더없이 일상적인 행동인데도 여자는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로 차려입은 것처럼, 아니면 이 집안일 자체가 춤추는 자리인 것처럼 까만 하이힐을 신었다. 엇갈린 두 다리는 댄스 스텝을 밟는 것 같다. 태양이 그녀의 그림자와 흰 시트의 검은 그림자를 땅에 드리운다. 그림자는 검고 다리 긴 새처럼 보인다. 여자가 이 일을 하는 공간은 너무나도 헐벗고 황량하고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풍경인지라 지평선에서 지구의 만곡(彎曲)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빨래를 너는 것, 이것은 더없이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행동이다.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그림에서 여자는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되었다.
리베카 솔닛의 감상이 기막히다. 그녀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림에서 말소를 읽어내는 그녀의 촉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녀가 탈출 마법사라고 극찬한 버지니아 울프가 이상적 여성을 죽이는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죽였다. 만일 내가 법정에 서야 한다면, 내 행동은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하리라… 이제 천사는 죽었다. 이제 젊은 여자는 자신에게서 허위를 제거했으므로, 앞으로는 그저 그녀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호명과 묘사가 현 상태의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항하는 어떤 반란에서 긴요한 작업임을 역설한다.
폭력과 불평등이라는 밀림에서 길을 잃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길 어디쯤에서 당신은 리베카가 새겨둔 이정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특권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능성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진부한 옛이야기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