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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5호] 내가 만들어도 백프로 만족은 없어_성심양복점
“이걸 배운 거는 열여덟 살 때부터야. 군대 갔을 때 3년 빼고는 평생 한 거지. 지금은 없어졌는데 대전역 앞 중동에 영광양복점이 있었어, 기신양복점 바로 옆에 있는. 거기서 교통비 조금 받고 심부름부터 시작했지. 직원이 스무 명 정도 있었는데, 기술자들이 실 사오라 그러면 중앙시장 가서 재료 사다주고, 뒷바라지 해주는 역할을 했어. 양복점이 제일 호황이었던 때는 78년부터 5~6년 정도였던 것 같어. 대전 시내에 거래하는 데가 총 700군데 정도 됐는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열 군데 정도 남았나 모르겠어.”
장무식 사장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60년대 무렵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집안이 넉넉하면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기술을 택했다. 국민학교 한 반 60여 명의 인원 중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두세 명 정도였다. 당시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장무식 사장 또한 국민학교만 졸업한 후 기술을 배우기로 하고 양복점 일에 뛰어들었다.
“근데 그렇게 기술을 배워도 열 명 중 하나 버틸까 말까 했어. 나는 손재주도 있고 배우려는 극성이 강하다보니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빨랐지. 양복점에서 배운 걸 집에서 노는 날 숯불다리미로 마루에서 연습을 하는 거야. 그때는 전기가 없었으니까. 미싱질은 미싱 있는 집에 가서 연습 하고 그랬지. 돈에 욕심내면 못 배워. 돈 생각 안하고 그렇게 해서 남들보다 빨리 배웠지.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 스물두 살 때 이미 탄방동에 양복점을 냈었어.”
군대를 다녀온 1975년, 기술을 익히기 위해 다른 양복점에서 다시 일을 배웠다. 그러다 1981년, 대전역 앞 옛 대한통운 앞에서 성심양복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인근 양복점이 포화 수준인 데다 임대료와 인건비 등 고정비용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자 이듬해 그가 살던 동네인 갈마동으로 양복점을 옮겨왔다.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옷 만드는 일은 대부분 혼자서 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성미가 풀리는 꼼꼼한 성정 탓이었다
“그 때는 일이 엄청 많았지. 근데 많이 만드는 게 문제가 아녀. 많이 만들려면 남을 시켜야 하는데 내가 그걸 못 햐. 남을 시키면 내 눈에 안 차고, 옷이 옷 겉들 안 한 거여. 손님들한테는 안 보이겠지만, 나는 보이니까. 옛날에는 결혼식 한다고 하면 다 양복을 맞췄지. 88올림픽 전에는 한 벌에 23만 원에서 25만 원 정도 했어. 남을 시켰으면 한 달에 200벌도 만들었겠지. 나 혼자 제일 많이 만든 건 한 달에 28벌 정도 한 적 있어. 그러려면 잠 못 자고 겨우 만들어야 하는 말이 안되는 숫자고, 보통은 그렇게 못하지. 아니 안하지.”
손님의 몸을 부분별로 꼼꼼히 재고 초가봉을 만든다. 이것을 손님에게 입혀본 후 어색하거나 안 맞는 부분을 뜯어내어 고친다. 이렇게 양복 한 벌을 만들자면 최소 2~3일이 걸린다. 다른 일은 안 하고 오로지 옷 한 벌 만드는 데 그 시간이 든다. 그 시간이 채 못 걸려 급히 만든 옷은 옷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장무식 사장은 말했다.
시절이 변하고 기성복이 흔해지면서 양복을 맞추러 오는 이는 점점 줄었다. 요즘에는 양복이나 셔츠 수선을 맡기는 손님이 늘었다. 그러다 20~30대 젊은이들이 명품이나 비싼 옷을 들고 성심양복점을 줄지어 찾기 시작한 건 약 2년 전부터다.
“2년인가 3년 전에 옷에 관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오백만 원짜리 옷이라면서 가져온 거여. 명품 옷은 대부분 서울로 가져가지 대전에는 고칠 데가 없는데, 그 사람이 이 근처를 다니다가 양복점인데 ‘수선’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들어온 거지. 옷을 고쳐달라고 하는데, 이미 손을 너무 많이 본 상태라서 고쳐도 안 된다고, 안 한다고 했지. 그런데도 계속 해달라고 해서 ‘그럼 버릴 값으로 한 번 해보자.’라고 해서 전부 다 뜯어서 고쳤지. 그랬더니 맘에 들어 하고는 카페인지 뭔지에 올렸다는 거야. 나는 컴퓨터도 못하고, 스마트폰도 모르고 이렇게 옛날 핸드폰 쓰는 사람이라서 인터넷에 뭐라고 올렸는지 지금도 몰라. 암튼 그 이후로 젊은 사람들이 자꾸 와. 와서는 이건 얼마짜리 옷이에요, 하는데 만 원짜리나 십만 원짜리나 수선비는 똑같으니까 나한테 옷이 얼마짜린지 말하지 말라고 해.”
성심양복점은 ‘옷 좀 입는다’ 하는 젊은이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대전에서 믿고 맡기는 솜씨 좋은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 양복을 맞추러 오지는 않았지만, 평소라면 서울로 들고 가던 ‘비싼’ 옷을 가지고 성심양복점을 찾았다. 그러다보니 실랑이도 제법 생겼다. 옷을 들고 온 젊은이들은 대부분 ‘이 부분만 고쳐달라’고 말하지만 47년차 재단사인 그에게는 옷의 결점이 훤히 보였다. 해달라는 대로 했다면 수월했겠지만, 옷에 있어서만큼은 대충이 없는 그였다.
“옷을 가져오면 일단 입어보라고 해. 그러면 안 맞는 부분이 보이잖아. 하나를 고치면 다른 부분도 어색해지는데, 여기서 이것만 고쳐도 훨씬 낫다고 알려주는 거야. 옷을 입고 운전할 때, 허리를 숙일 때, 의자에 앉을 때 경우를 다 생각해야 하잖어. 입어서 불편하면 그건 옷이 아니지. ‘손님이 고쳐달라 하면 고쳐주고 돈이나 받으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한테는 그 돈 안 받아도 되니까 오지 말라고 해. 그래도 대부분은 좋아해. 오는 사람을 보면 실제로 재보면 허리가 32인치인데 30 사이즈를 늘 사 입었던 거야. 대부분이 그렇게 옷을 입어. 어깨가 올라간 사람, 내려간 사람, 근육이 많은 사람, 없는 사람…. 다 몸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기성복을 사 입을 거면 ‘내 몸부터 알아라.’라고 말해줘. 그리고 당신은 이런 옷이 맞으니 기성복 살 때는 어떤 걸 사라고 얘기해 줘. 잘못 사면 수선비가 더 나오고 테도 안 나. 젊은 사람들은 메이커 보고, 이테리제니 뭐니 그런 걸 따지지 옷감이나 질을 보는 게 아녀. 아, 일단 몸에 맞는지부터 봐야할 거 아녀.”
양복점 한편에는 젊은이들이 맡긴 재킷이 여럿 걸려 있었다. 장무식 사장과 얘기를 하던 중 문을 밀고 들어 온 한 젊은이가 이태리제 재킷을 찾으러 왔다. 장무식 사장은 옷을 입혀보고 요리조리 예리한 눈으로 옷 테를 살피더니, 젊은이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한 뒤 값을 치렀다.
“단골은 지금은 없어. 옛날에 단골손님들은 이렇게 종이로 본을 떠놨어. 여기에 이름을 써 넣고 보관을 해 놔. 그러면 나중에 옷을 맞추는 데 올 수 없을 때 전화로 얘기를 하는 거야. 요즘은 한 달에 서너 벌 정도 만들어. 맞추러 오는 사람은 50대가 대부분이여. 그런데 한 번 맞춰보면 그것만 입고 다녀. 이제까지 넘의 옷을 입고 다닌 거냐면서. (작업대에 놓인 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40대 보험회사 직원인데, 열 번 넘게 수선하러 온 거야. 그래서 차라리 한 벌 맞춰보라고 했지. 그랬더니 춘추복을 만들었는데 그걸 여름에도 주구장창 입고 다니는 거야. 이 좋은 걸 내가 왜 이제까지 사 입었냐면서 지금 수입으로는 수선이 나아. 그렇지만 내 본업은 맞춤복이여. 요즘도 옷 만들 때는 수선 일을 안 해, 마음이 흐트러져서. 이건 내 자존심이 걸려 있고 정성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만들어도 100 프로 만족이 안 돼. 지금까지 최대 만족이 80 프로야.(웃음)”
손님이 맡긴 재킷이 걸려있는 옆쪽으로 한 눈에 보기에도 반듯하고 정갈한 정장 재킷 몇 벌이 걸려 있었다. 장무식 사장이 자신을 위해 만든 옷이었다. 그는 양복점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주변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고 20여 벌 정도가 남았다. 그 옷들도 이제는 채 입지 못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다는 말은 장무식 사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 듯 했다.
“친구들이 지겹지도 않느냐고 해. 그런데 나는 옷 만들 때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겄고, 이게 체질에 맞는가비다 싶어. 옛날에야 웬만하면 다 옷을 맞췄지만, 요즘에 옷을 맞추는 사람은 평균적인 체형이 아닌 사람이여.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뭐 그런 사람. 처음 그런 사람이 와서 보고 옷을 만들 적에는 ‘아 저 사람 옷은 만들기 힘들겠다.’ 하면서 만들다가 완성해서 옷을 입히면 그렇게 흐뭇한 기분이 들 수가 없어. 그리고 잘 맞는다고 고맙다고 하는 한 마디에 힘든 게 싹 다 날아가.”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키가 큰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일 서울에 가기 전 닳은 양복바지를 고치러 왔다고 했다. 오래 전 이곳에서 맞춘 옷이었다. 할아버지는 옷이 다 고쳐지길 기다리는 내내 장무식 사장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장무식 사장은 말없이 천천히 옷을 손 보고, 미싱질을 한 뒤 놓치는 부분 없이 꼼꼼히 다림질을 했다. 한 시간 조금 못 되는 시간이 족히 흘렀다. 손질이 마무리된 옷을 곱게 접어 건네며 오천 원을 부르자 할아버지는 만 원을 건넨다.
“줄이고 이렇게 다리려면 만 원은 받아야지. 안 그래도 다림질도 새로 하려고 그랬는데, 아주 고마워.”
실랑이를 하던 장무식 사장은 할아버지를 이기지 못하고, 멋쩍게 웃어버렸다. 할아버지는 정년퇴직하기 전 한 공기업 부장이었다고 장무식 사장이 알려줬다. 옛날에는 동료들과 이곳에서 종종 옷을 맞춰 입고는 누구 옷이 더 멋진가 견줘 보기도 했었다고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없어.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내 나이가 그럴 단계는 이제 지났지. 오는 사람만이라도 제대로 해주는 거 그것 뿐이여. 건강하다면 10년도 더 하고 싶지. 나는 공부를 배우지 못해서 이걸 하게 됐지만, 나이 들고 나서 상견례 하거나 하면 다들 나보고 부럽댜. 정년퇴직하고 나이 먹으면 갈 데 없는데, 나는 여기가 내 평생직장이고,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내 일이니까. 그래도 내가 이걸로 내가 못한 공부 다 시켜서 자식들 대학 보내고, 시집 다 보냈다는 거, 오로지 이것만큼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거 그게 자부심이야.”
젊은 남성이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양복점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매장 단골손님의 옷을 맡기러 자주 들르는 백화점 직원이라 했다. 십 수벌의 옷을 펼쳐놓고 어디어디를 고쳐달라고 말하는데, 장무식 사장은 기어이 옷 한 장 한 장을 펼쳐 매무새를 살피며 오래도록 얘기를 나눴다. ‘이런 소재 옷은 한 치수 작은 걸 입혀야 된다.’라며 자연스레 옷에 대한 조언도 오고갔다. 이미 베테랑일 의류매장 직원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년째 양복점을 하고 있어도 지금도 배워가는 과정이야. 나는 배울 게 하나라도 있으면 쫓아가는 사람이여. 기술자들은 옛날 말로 ‘곤조’가 있어서 자존심 땜에 모르는 거 있어도 안 물어봐. 근데 나는 내가 열 가지 중 아홉 가지를 잘한다 해도, 열 가지 중 그 아홉 가지 못하고 내가 못하는 한 가지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 나는 그런 사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