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5호] 지난 시절, 한 데 겹겹이 쌓여

가볍게 나선 발걸음이었는데 갈수록 머무는 걸음이 많아졌다. 경부선역이 들어서면서 한 때는 도시의 중심부가 됐던 중동. 예전보다는 많이 가라앉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상인과 손님의 움직임으로 분주한 한의약거리를 비껴가면, 쓸쓸한 역사의 흔적을 현재의 삶터로 덧씌운 스산한 골목풍경이 드러난다. 다소 들뜬 분위기의 대전역과 은행동, 그 사이에 자리한 중동은 이제는 지쳤다는 듯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한약 냄새

중동은 대전역 앞에서 은행동에 이르기 전 대전천 인근에까지 이르는 직사각형 모양의 동네다. 북으로는 삼성동, 남으로는 한복거리가 있는 원동, 동으로는 대전역이 있는 정동, 남서로는 선화동을 면하고 있다.

은행동을 지나 목척교를 건너면 바로 중동이다. 고향 가는 기차를 탈 때마다 잰걸음으로 지나치던, 대전천에서 대전역에까지 이르는 중앙로가 중동에 속해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불어 중앙로는 중동의 가장 화려한 동시에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얼굴이라는 것도.

중동은 중앙로를 기준으로 동서로 펼쳐진 동네다. 목척교를 건너 당도한 우리은행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왼편의 중동으로 들어섰다. 역전의 풍경답게 소박한 식당들이 즐비하다. 적막한가 싶더니, 이내 점심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할아버지들의 인사 소리, 상인들의 말소리, 아주머니의 바쁜 걸음 소리 등이 귀에 들어온다. 얼핏 조용한 듯 보이지만 다리건너 은행동과는 또 다른 종류의 활기가 그곳에 늘 있어왔음을 눈치 챈다.

  
길 끝으로 대전역이 바라보이는 골목을 걸으면서 조금씩 풍겨오던 한약재 냄새가 조금 더 걷다보니 거리 전체를 가득 메운다. ‘한약방’, ‘한약국’, ‘한약 제분소’, ‘약방앗간’, ‘한의원’ 등 저마다 이름과 역할을 달리하는 한약 관련 업소들이 촘촘히 모여 있다. 조선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6·25 전쟁 후 활발하게 생겨났다고 하는 중동 한의약거리다. 다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수십 개의 관련 업소가 밀집돼 있었다. 못 해도 수십 년을 훌쩍 지났을 빛바랜 한약방 문틈 사이로 분주하게 약을 빻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길은 약재를 나르는 일꾼, 멀리서 온 듯한 손님이 자가용에 막 구입한 약재를 싣는 모습 등으로 제법 분주하다.
백제당한약방은 60여 년을 훌쩍 넘긴 곳으로 이 골목에서도 꽤 규모 있는 한약방 중 하나였다. 말을 걸기도 미안할 만큼 바쁘게 손님을 맞고 있던 중년의 부부는 12년째 한약방을 맡아오고 있다.
“여기 한약 골목은 역사가 100년이 넘죠. 손님들이 멀리서도 많이 와요. 옛날에는 한약방으로 꽉 찼는데, 이제는 많이 없어지고 별별 가게들이 다 들어왔어요. 남은 곳이 20군데 정도 되려나. 이쪽에서 저쪽까지 다 한약방이니까 한 번 세어보세요.”
  
     
춘일정 10번지

백제당한약방을 지나쳐 조금 더 걷다 왼쪽으로 난 좁은 골목에 눈길이 갔다. 지도에는 ‘명성장여관’이라고 표기돼 있는 명성모텔 건물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조금 더 넓은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붉게 칠을 한 단층 혹은 2층 건물이 양쪽으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오래된 여관 골목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 사이,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통로에도 여인숙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오후의 골목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의자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마알간 얼굴을 한 여자가 잠시 문을 열었다 닫을 뿐,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한때 ‘중동 10번지’라 불리던 향락촌의 일부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골목의 현재를 알기 위해선, 1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중동은 정동, 원동과 함께 본래 ‘한밭’이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대전천이 범람해 넓은 들에 갈대밭이 무성하고 시냇가에 모래밭이 깔려 있던 곳이었다. 그랬던 것을 1904년 경부선 철로 공사를 하면서 대전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부였던 중동은 당시 ‘춘일정일정목(春日町一丁目)’이라 했다. 일본 통감부는 당시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거류민단’을 설치해 이를 중심으로 도시를 발전시켰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유곽설치였다. 대전 중동에는 ‘춘일정10번지(春日町十番地)’, 이후 ‘중동10번지’라 불리는 유곽이 생겨났다. 일제시대에 불야성을 이뤘던 유곽은 광복 이후 폐쇄되고 재일교포들이 거주하기도 했는데, 한국전쟁을 거쳐 지역 유지들에 의해 주류상회, 막걸리공판장, PVC 주조공장, 인쇄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중동10번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성매매 행위가 계속돼 한편으로 여관 골목이 형성되고, 지금과 같은 모습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일제시대 유곽으로 사용했던 건물은 모두 헐렸는데, 딱 한 채만이 남아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관골목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에서 그곳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곳저곳을 많이 개조했지만 여전히 눈에 띄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인근에는 가정집, 미용실, 작은 슈퍼 사이로 드문드문 여관이 하나둘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두 서넛의 행인이 지날 뿐 거리는 대체적으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여관골목

옛 유곽 자리

  

  

먼저 살던 사람은 다 나가고 없어

대전천 쪽으로 방향을 트니 ‘○○상회’라고 쓰인 수많은 간판을 마주한다. 대부분 건어물 도·소매점으로 한 때는 중부시장을 중심으로 꽤 활기를 띄었을 상점들이다. 비닐이 벗겨지고 색이 바랜 간판이 걸린 곳들은 셔터가 굳게 닫혀 있거나 ‘임대문의’라는 종이가 붙어 있다. 다만 몇 집 건너 한 집 정도는 김, 멸치 따위의 건어물 상품 박스를 높이 쌓아두고 차에 싣거나, 손님과 흥정을 하는 등 활발히 영업을 하며, 이곳이 건어물 거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건어물 거리를 벗어나면 2009년 문을 닫은 신도극장을 만난다. 마주한 대전천을 왼편으로 끼고 중동의 가장자리를 죽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대전천 건너편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들이 이곳 중동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죽 걷다보면 나오는 큰 길에서 길 건너 삼성맨숀아파트를 마주하게 되는데, 중동이 끝나는 지점이자 삼성동이 시작되는 경계다. 코너를 돌아 중동의 북쪽 가장자리에 접어들면 인쇄사들이 줄지어 있는 인쇄거리가 시작된다. 중동 인쇄거리는 대전 지역 인쇄업체의 절반 이상이 몰려있는 곳으로 삼성동에 함께 걸쳐있다. 큰 길 사이로 난 골목 깊숙이 들어서면 나오는 이면도로에는 더욱 많은 인쇄업체가 종이와 잉크, 기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인쇄사들이 즐비한 길 사이사이 좁은 골목은 오래된 단층 주택이 빼곡한 주택가다. 이끼 낀 시멘트벽에 ‘하숙생 구함’ 같은 문구가 적혀있기도 한 골목은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함이 감싸고 있다. 대경장 여관 뒷길 주택가는 한층 더 고요하다. 그곳에서 두 할머니가 간이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집 앞에는 산더미처럼 고물을 쌓은 리어카가 세워져 있다. 할머니는 중간에 시집을 와 이곳에 대해 잘 모른다며 남편을 불렀다. 곧이어 대문 안 쪽에서 고물을 정리하던 할아버지가 나왔다.

“해방되고부터 여기서 계속 살았지. 아홉 살 때부터 살았으니까 딱 70년 됐네. 많이 달라졌지. 옛날에는 이 길이 도랑이었어. 정동, 중동, 삼성동 다 그 때는 좋았지, 젊은 사람도 많고, 장사도 잘 되고. 구멍가게를 해도 잘 됐고, 나도 냉차 장사도 하고 그랬어. 한 번은 힘들어서 정선 탄광에도 갔다왔지만은. 한약거리가 많이 모인 게 한 20년 됐나, 그 전엔 없었어요. 건어물도 잘 됐지. 홍명상가랑 동방마트 있을 때가 특히 잘됐지. 이제는 먼저 산 사람들 다 나가고 없고 저짝 골목 가면 오래 산 사람이 있어요. 우리야 어디 갈래도 갈 수 없어 여기 산 거지. 영세민도 안 되고, 이 눈 한짝도 안 보이는데, 고물이라도 좀 주서다 몇 푼이라도 벌려고 하는 거야.”

들이었던 곳에 도시가 만들어져, 일제에 의해 향락의 중심지가 되고, 해방 후에는 상업으로 흥하며 사람들도 넘쳐났던 곳. 희미하게 남은 흔적들이 ‘난 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쓸쓸하게 만든다. 상상으로만 떠올려볼 뿐인 지난 시절의 풍경이 차례로 펼쳐지더니 한 데 겹겹이 쌓였다.

  

  

(위 사진) 신도극장 (아래 사진) 문닫은 건어물 상점

인쇄거리


글 사진 엄보람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