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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5호] 곤룡골에서
1950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트럭 위에 올라탔다. 군인과 경찰이 그들을 끌고 간 곳은 당시 산내 곤룡골, 현재 골령골이라 불리는 낭월동 일대, 외딴 골짜기다. 재소자들의 눈을 가리고 미리 준비한 나무 기둥에 손을 묶었다.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7천여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시신이 낭월동 일대에 묻혔다.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유해, 무자비하게 잡혀간 민간인의 유해였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2007년 34구의 유해만을 발굴했을 뿐이다.
2015년 2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낭월동 일대에서 2차 유해 발굴이 있었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1차 발굴을 벌인 이후 두 번째 유해 발굴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4 · 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의 민간단체가 구성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민간인학살 공동조사단)’과 2월 4일 대전 지역 열여덟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발족한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전공동대책위)’가 함께 했다.
유해 발굴 두 번째 날인 2월 24일,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이하 대전희생자유족회) 모소영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 국장은 반가운 목소리로 “봉사활동 하러 오시게요?”라고 말했다. 일손이 부족해 작업이 더디고, 일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때문에 촉박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2월 25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에 찾아갔다. 오전 아홉 시에 도착한 낭월동에는 대전희생자유족회 김종현 회장과 민간인학살공동조사단 박선주 발굴단장,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학생들, 고등학생 둘, 예비 고등학생 하나 등이 초록색, 빨간색 천막 아래 있었다.
“자 오늘 처음 오신 여러분 모여주세요. 지금 우리가 작업하는 자리에 유해가 많이 나왔고, 앞으로 계속 나올 겁니다. 호미로 땅을 파다가 유해가 나온다고 흥분해서 막 파면 안 됩니다. 유해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유해다.’ 싶은 게 나오면 일단 호미질을 살살 하셔야 하고요. 옆 사람과 호흡을 맞춰서 같은 깊이로 파야 합니다. 혼자서 막 구덩이 파면 안 되고요. 같은 깊이로 파야 이후에 발굴 상황이 쉬워질 수 있습니다. 발굴 작업 중에 사진 촬영은 되도록 삼가주시고요. 방금 말씀드린 점 모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의할 점을 안내받은 ‘오늘 처음 오신 여러분’은 월간 토마토 기자 둘, 남대전고등학교 조태민, 이경호 학생과 조태민 학생의 동생 조중협 학생, 예순 살 김정진 씨다. 태민 학생은 중학교 3학년 때 UCC 영상을 찍기 위해 소재를 찾다 대전산내학살사건을 접했다. 그때 대전희생자유족회 김종현 회장과 연락해 만났다.
“아버지께서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으세요.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여러 매체를 접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에 UCC 영상 만들어서 출품하려고 회장님을 만나뵈었죠. 처음 산내 사건을 접했을 때 놀랐어요. 제가 사는 도시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때문에 더 관심을 기울였어요. 그때 인연으로 유족회 분들을 알고 지냈어요. 이번에 모소영 사무국장님이 봉사 활동하지 않겠느냐고 연락해주셔서 오게 됐어요.”
첫 방문자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을 끝으로 자원봉사자들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3mx7m 정도 되는 네모난 구덩이였다. 지난 이틀 동안 굴착기로 한차례 건축물 폐기물을 발견했다. 원통한 마음으로 쓸어낸 건축물 폐기물이 걷히자 유해가 조금씩 발견되기 시작했다. 유해는 발견한 자리에 그대로 놓고 그 주변에 하얀 분필 가루를 뿌렸다. 25일은 유해가 발견되지 않은 주변땅을 파는 작업을 진행했다.
나무젓가락 정도 길이가 되는 대나무대, 호미, 낫, 페인트 붓, 벌건 양동이 하나가 2월 25일, 유해를 찾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주어진 발굴 도구였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모소영 사무국장이 자원봉사자들에게 쌍화탕 한 병과 피로회복제 하나씩을 건네주었다.
“감기몸살 걸릴 것 같은 분들, 하나씩 드시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세요.”
피로하기도 전에 회복제를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주머니에 넣었다. 어쩐지 이 알약을 먹으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것 같았다. 그런데 웬 걸, 세 시간 일해야 사진 한 컷을 찍게 해주겠다는 말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알약을 입에 넣었다.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거기, 작업 속도가 느려요. 서둘러야지!”
“거기, 그렇게 깊이 파면 안 되는데…. 옆 사람이랑 호흡을 맞춰야 해요.”
모두 나를 향한 말이었다. 영남대학교 구가은 씨와 짝을 이룬 나는 일하는 도중 인터뷰하려는 잔꾀를 부리다 박선주 발굴단장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그 뒤부터는 조용히 일만 했다. 조용히 일만 하다 보니 어느새 혼자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래서 또 한소릴 듣고, 옆 사람과 평행을 맞추기 위해 또다시 눈치를 보며 일만 했다.
구가은 씨는 스물한 살, 영남대학교 2학년에 올라간다. 교수님과 선배들을 따라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 선배들은 경험이 있어 능숙했지만, 처음인 구가은 씨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유해’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돌이 많은 땅이라서 돌 같기도 하고, 나무 조각 같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달라요. 조금만 힘을 줘서 눌러도 부서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만져야 해요.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계속보다 보니까 보이는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유해 구분이었다. 흙과 돌무더기 속에 부서져 파묻힌 유해를 구분하는 데만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눈썰미가 없어 그만큼이 지나자 겨우 유해와 돌, 흙이 구분되었다. 그사이 쉬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제야 현장에 놓인 유해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여든 살 신순란 할머니가 눈에 보였다.
“오빠가 자필로 쓴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는데, 너무 서럽네요. 사람은 이렇게 죽어서 뼈만 흩어져 있는데, 책이 있으니까 가슴이 사무쳐서 눈물이 나요. 내가 열세 살에 오빠가 돌아가셨어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언제나 말했던 오빠였다.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오빠였다. 사람들에게 밤이면 야학에서 글을 가르치던, 신순란 할머니에게는 세상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오빠였다. 공부하던 오빠가 방에 앉아 붓글씨를 쓸 때면 막냇동생인 신순란 할머니가 먹을 갈아다 주었다. 신순란 할머니에게는 돌무더기와 진흙더미 속에서 잘게 부서진,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는 유해도, 오빠였다.
“1949년에 갑자기 끌려갔어요. 책방에 앉아 있는데 경찰들이 와서 잡아갔어요. 공주형무소로 갔다가 대전형무소로 옮겼어요. 그리고 1950년에 그런 일을 겪은 거죠. 그때는 몰랐어요.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야 했지만, 이렇게 갔을 줄은…. 평생 모르다 2000년이 되어서야 대전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게 된 거예요. 처음엔 기뻤어요. 드디어 오빠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택시 타고 한달음에 여기까지 왔어요. 입구에 있는 비문을 보고 한참을 울었어요. 우리 오빠가 여기에 있겠구나….”
할머니의 오빠 이름은 신석호였다. 스물여섯에 끌려가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돌덩이 아래에서 발견된 유해는 자칫 잘못 만지기만 해도 산산조각이 났다.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 있는 하얀 뼈가 아니라 다시 흙으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유해는 나무껍질, 흙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너무 약해서 살짝만 힘을 주어 눌러도 가루가 되었다. 내 실수로, 누군가의 오빠가, 누군가의 아빠가, 누군가의 삼촌이, 산산조각이 날까 봐 손놀림이 조심스러웠다. 눈을 크게 뜨고 돌덩이를 골라내고 흙을 파낼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옥천군 군서면 은행리에 살았어. 총소리가 나서 언덕에 올라가 이쪽을 구경하는데 사람들이 죽 서 있었고 군인들이 총 쏘는 걸 봤어. 그때는 여기 산이 하나도 없으니까 훤히 보였지. 두 번인가 와서 봤어. 오래 보지는 못했어. 그 담에는 미서워서 못 왔어.”
열세 살에 학살 현장을 보고, 올해 일흔여덟이 된 박석규 할아버지가 지나가던 길에 현장을 찾았다. 할아버지가 학살사건을 목격한 이후 마을은 비가 오면 개울에 피가 흥건했고, 핏물이 밴 자갈 때문에 더는 개울물을 마실 수 없었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왔습니다. 지금은 금산에서 지냅니다.”
올해 예순, 김정진 씨는 가오 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은 역사교사였다. 눈으로 본 현장의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 범죄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해결 되지 않았다는 점, 국가가 아니라 민간단체에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속으로는 눈물이 났습니다.”
밖으로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은 일하는 내내 그의 마음에 차올랐다. 그래서 더 열심히 흙을 나르고, 성실히 움직였다.
며칠 동안 몇십 명이 들락거리며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에 제대로 된 화장실 하나 없었다. 간이 화장실이라도 설치해달라는 말에 동구청은 곤란하다는 답변만 했다. 대전희생자유족회에서 주장했던, 제발 유해가 있을 법한 곳에 현판이라도 설치해달라는 이야기는 수년째 지켜지지 않고 있다. 개토제 이후 두 번째로 대전 동구청에서 발굴 현장을 찾았다. 모소영 사무국장은 화장실과 현판 이야기를 다시 했고, 동구청 주무관은 수첩에 받아 적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안타까움과 미안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당혹감과 당황스러움 등 수많은 감정을 얼굴에 비쳤다.
“유가족분들 보면 정말 안타까운데, 제가 어떻게 해드린다고 말씀드리는 부분이 아니어서 곤란합니다. 말씀해 주신 것들 꼭 보고하겠습니다.”
낭월동 13-1번지는 유해가 묻힌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13-1번지는 시체가 묻힌 긴 구덩이의 중간 지점으로 여겨지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굴할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다.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노용석 연구교수는 “일단 기간이 짧고, 유해가 많이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에 발굴 작업이 아주 쉬운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3월 1일까지는 지금 작업하는 공간까지만 작업하려고 합니다. 워낙 면적이 넓어서 절대 민간에서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국가에서 움직여줘야 하고요. 이렇게 시민사회에서 움직임을 시작하면, 국가에서도 어떤 반응이…. 올 수도 있겠죠. 시급한 문제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과 같이 유해 손상이 심하고, 시간이 지나면 더 부패하겠죠. 그 전에 빨리 발굴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는 충북대학교 임시 안치소에 보관하거나 산내에 마련한 컨테이너에 보관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오후가 되자 한쪽에서는 그동안 발굴한 유해를 조심스럽게 통에 담아 소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묻었던 흙을 닦은 유해는 더 나무와 비슷한 색이었다. 오후가 되자 흙 파는 구덩이에서 나던 시큼하고, 눅눅한 냄새는 익숙해졌다. 유족들은 보관할 수 없는 가루라도 모시고 싶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부서져 흙과 함께 섞인 뼛가루도 가족이었다.
“우리 유족회는 DNA 검사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어요. 하면 비용도 많이 들고, 또 전부 가족을 찾을 수도 없을 것 아닙니까. 누구는 찾고, 누구는 찾지 못하면 찾지 못한 사람 마음이 어떻겠어요. 나오는 유해 모두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모시기로 했어요.”
유해 발굴 현장에서 줄곧 씁쓸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대전희생자유족회 김종현 회장의 이야기다.
“저는 이계성입니다. 올해 일흔여섯입니다. 아버님께서 건국군 대장이셨는데 부하가 잘못한 것을 뒤집어쓰고 잡혀가셨습니다. 이렇게 젊은 양반들이 와서 고생하는 걸 보니 고맙습니다. 앞으로 죽기 전에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평화통일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사건에 여러 젊은이가 함께 한 것을 보니 우리 아버님이 젊은 분들에게 교육을 시키려고 그렇게 가셨나 봅니다. 하하. 모든 것이 인연입니다.”
대전희생자유족회 이계성 부회장이었다. 그는 마치 단상에 나가 발표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껏 수없이 이야기했을 사연을 줄줄이 이야기하며 그는 계속,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