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7호] 시간이 숨바꼭질하는 마을

꼭 한 사람이 사는 시간 동안 
문을 열고 닫았다. 1930년 10월 1일 
영업을 시작한 회덕역은 2007년 6월 1일
여객 취급을 중단했다. 
2005년 지금의 모습으로 역을 단장했지만,
철로가 바뀌고 교통이 좋아지면서 
역을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줄었다. 
통근열차만 다니도록 
열어 두던 때도 있었지만, 
하루 이용객이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77년 동안 사람을 맞이했던 역은 
새단장 한 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흘러간 풍경과 보이는 풍경

드나드는 사람은 없어도 역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역 바로 옆 철 구조물에는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주변으로 참새도 찌르레기도 정신없이 울며 지나다녔다. 역 바로 옆집에서 키우는 진돗개 두 마리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꼬리를 흔들며 짖어 댔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동네가 적막하지 않은 이유다. 동물들 소리에 주택 사이로 뜀박질하는 아이들 소리까지 더하면 동네 전체가 쿵쿵 큰 숨을 쉬는 것 같다. 

              
“옛날에는 갬재라고 불렀어. 옛날로 치면 갬재, 안갬재, 수척굴, 진너머까지 다 합해서 ‘신대동’이 된 거지. 지금은 다니기 쉽게 길이 많지만, 옛날에는 길도 하나 없었어.”
신대경로당 회장인 할아버지는 여든 넘는 세월 동안 갬재에 살았다. 《대덕의 전통마을 총서》를 살피면 ‘갬재’라는 이름은 마을 안에 있는 산에 개금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낮은 산봉우리가 개미허리 같아서 개미재, 갬재라는 유래도 있다. 갬재고개 너머,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다니는 곳이 진너머다. 고속도로가 나기 전에는 그곳에도 마을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살면서 크게 변한 것 하나도 없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변화만 해도 몇 가지였다.

“아주 어린 시절 모습은 거의 없지. 명령이었는가는 몰라도 6·25전쟁 때 미국 놈들이 후퇴하면서 다 불 지르고 떠났어. 어릴 때 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다 새로 지은 집이고 있던 자리에 지은 것도 아니니까. 마을 안으로 흐르는 천은 신대천이라고 했어. 그럼. 아주 중요한 물이었지. 언제부터인가 몰라도 물이 별로 흐르지 않는데, 옛날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어. 그 물로 농사도 짓고 주변에서 빨래도 하고 그랬지. 기찻길이야 일제강점기 때 생긴 거니까 아주 오래된 거지. 우리 어릴 때는 기찻길 너머에도 동네가 있었어.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생겨서 다 사라졌지. 옛날엔 회덕역 주변에도 상가가 많았어. 부산에서 목포로 갈 때도 회덕역을 거쳐야 했으니까. 지금은 화물만 취급하는 역이 돼 버렸어. 뭐 그런 거야 다 있었지만, 동네 자체는 별로 변한 게 없어. 교통이 편해지면서 회덕역이 아주 쓸쓸하게 돼 버렸지.”

                               

                            

2007년 문을 닫은 회덕역

서서히 변해가네 사람도 풍경도

“우리 역은 여객업무 취급 중지역입니다.”로 시작하는 안내문이 ‘쓸쓸’하게 되어버린 회덕역 문 앞에 붙어 있었다. 기찻길도 고속도로도 지나다니는 마을이었다. 신대동은 행정동으로는 회덕동에 속했다. 법정동으로 읍내동, 연축동, 신대동, 와동, 장동까지 회덕동에 속한다. 보이는 풍경으로는 길 건너 북쪽에 있는 와동 현대아파트 말고 그다지 높은 건물은 없다. 신대동에는 5층 남짓인 신대아파트와 빌라 몇 채가 있다. 마을을 돌아보다 갬재고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위로 올라가 보니 고속도로가 바로 옆으로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 


“별로 시끄러운 것 없어. 방음벽이 있잖아. 고속도로는 이 위로 지나다니니까. 크게 불편한 거 모르고 살았어.”
여든여섯 양희정 할아버지는 고향 부여에 살다가 1980년대 초반 갬재로 이사 왔다.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곳에서 4남매를 키웠다. 지금은 손자, 손녀까지 두루두루 두었다. 아내와 결혼해서 산 지는 65년이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부모님끼리 결혼 약속을 잡았다. 6·25전쟁 때문에 징집되어 군에 끌려가 3년 만에 휴가를 나와 처음 신부 얼굴을 봤다. 


“아버지가 가서 보고 두 집안이 연을 맺자고 약속하고 온 거지. 지금으로 말하면 약혼 같은 건데, 옛날에는 ‘사주(四柱)’라고 했어. 3년 만에 처음 색시 얼굴을 봤어. 예뻤지. 지금은 아파서 누워 있지만, 옛날에는 아주 활발한 사람이었어.”

                  

                    

양희정 할아버지가 연탄재를 버리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다.

시간은 어느 순간  그 흔적을 보여 준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건강하고 활발했던 할머니가 잠깐 앉아 밥 먹는 것 말고는 다른 활동을 거의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금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980년대 처음 갬재에 올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막내아들이 마흔이 넘었다. 할아버지는 86년을 살았다. 시간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든 그 흐름을 인식하게 했다. 


“아주 역사가 깊은 학교죠. 내가 여기 21회 졸업생이니까. 나도 여기서 장사한 지 20년 더 된 것 같네. 지금은 애들이 별로 없어요. 제가 장사 시작할 때까지도 학교 앞에 문구점이 네 개인가 있었어요. 지금은 애들이 별로 없으니까 업종을 바꾸거나 나갔지. 나는 살림집이랑 붙어 있고, 우리 집이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또 문구점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요.”

                  

 

와동초등학교 바로 앞에는 와동문구사가 있다. 와동문구사는 와동초등학교를 졸업한 은진 송씨 아주머니가 운영한다. 진너머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갬재로 넘어왔다. 답답한 날에는 문구점 바로 앞으로 보이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는 게 괜찮다고 느껴진다. 동네 앞으로 산이 있고, 자동차가 붐벼서 정신 사나운 것도 아니다. 큰 변화가 오기를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1930년대에는 기찻길이 생기고, 1950년대에는 마을 전체가 화재에 뒤덮였다. 1990년대에는 고속도로가 생기며 마을 하나가 사라졌다. 마을 사람 대부분 크게 변한 것 없다고 말하지만, 마을은 나라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마다 큰 변화를 겪은 곳이었다. 

“진너머라는 마을이 사라질 때 쓸쓸하셨겠어요.”라는 말에 한 할아버지는 “개발하기 위한 건데 속상할 게 뭐 있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어.”라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마을은 좋아진 게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바라는 게 뭐 있어. 내가 80이 넘었어. 내 생전에 뭐가 되겄어? 이때까지 봐 왔지만 쉽게 되는 거 하나 없어.”

                

빌라 뒤에서 키가 다른 아이들이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와동 지역아동센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뛰어다녔다. 2월 4일, 입춘이었다. 곧 뛰어다니기 좋은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찻길 아래로 난 굴다리, 동산 위 터널, 어지럽게 난 주택 골목까지 숨기 좋은 장소가 많았다. 시간도 사람도, 숨바꼭질하기 좋은 동네였다.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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